‘그대는 조국을 위해 헌신할 준비가 되었는가’는 꽤 기묘한 소설입니다.
이 소설은 엄청나게 짧은 소설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이 소설에는 실질적인 내용이 없다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소설은 분명히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런 모순이 성립하는 것은, 이 소설이 장르 클리셰를 기반으로 세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정확히는 스파이물의 클리셰죠. 정부 소속이지만 정부 소속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비밀 요원, 그리고 그 비밀 요원에게 주어지는 비밀 임무. 비밀리에 누군가를 감시해야 하기 때문에 가짜 신분을 만들어서 대상에게 접근하는 요원, 그리고 무기력하게 길어지는 임무와 요원이 느끼게 되는 회의감… 이런 요소들은 스파이물에서 다양하게 이미 소비되고 있는 이야기들이고, 그렇기에 ‘클리셰’ 라고 분류됩니다. 그리고 이 소설은, 그 클리셰를 기반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다만 이 소설이 클리셰로만 이야기를 진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떻게 보면 클리셰라는 기반을 바탕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쌓아 나가는 것에 가깝습니다. 그럼에도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클리셰라는 기반은 매우 넓고 단단한 것에 비해서, 이 소설만의 이야기는 충분히 전개되지 않아 조금 알아보기 어렵다는 점 정도입니다.
소설은 조국을 위해 A를 계속해서 감시하는 ‘요원’의 이야기입니다. A에게는 특별한 점 하나 없어 보이지만, 요원은 조국을 위해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보고해야 합니다. 요원은 A를 감시하기 위한 위장 신분으로 취직하고, A의 집 근처로 이사가서 우연히 A의 친구가 된 것처럼 꾸며냅니다. 시간이 지나자, 요원은 위장 신분이 탄로나지 않도록 결혼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요원은 A의 친한 친구가 되어갑니다.
이조차도 어떻게 보면 클리셰라고 할 수 있지만, 소설은 그 부분에서 영리하게 나아갑니다. 요원은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도대체 어떻게 되어 가는 것인지 궁금해하지만 단지 그것뿐입니다. 임무를 그만둔다거나, 다른 사건으로 인해 위장이 탄로난다거나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렇게 나아간다면 정말 더 ‘클리셰’ 적인 이야기였겠지만, 요원은 계속해서 조국에 헌신하며 임무를 이어나갑니다.
이러한 이야기 구조는 소설의 담백한 문체와 합쳐저서, 기반이 되는 클리셰를 잊고 전개되는 이야기 자체에 집중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렇게 독자는, 이야기 속 요원의 생각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빠져들었을 때 쯤, 이 소설의 마지막 펀치가 날아듭니다. 바로 본부의 명령이죠. 하지만 저는 그것은 잽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펀치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것은 꽤나 즐거운 경험입니다. 단, 장르 자체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즐거움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장르를 위해 읽어나갈 준비가 되셨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