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 사랑 감상

대상작품: 시간의 물결 속을, 당신과 함께 (작가: 겨울볕, 작품정보)
리뷰어: 뇌빌, 1일전, 조회 3

첫 문장만 봤을 때는 (집안에 있는) 냉장고가 집 주인과 사랑에 빠지는 얘기일 줄 알았습니다… :tears-joy: 이야기의 배경은 어디 집 주방이 아니라 깊은 우주 블랙홀 옆이더라고요. 여러 세계의 폐기물 처리와 에너지 관리를 책임지는 인공지능 처리시설의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외롭다는 것. 그 외로움도 차원이 다른 게, 블랙홀 가까이 있다 보니 시간의 흐름이 달라 다른 지성체를 만날 일도 드물고, 만나더라도 간격이 엄청 길고, 방문자의 입장에서는 워낙 달갑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사랑은 커녕 친절 비슷한 모습도 뵈지 않는 정도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어쩌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가까운 상태를 갖게 되었는지 좀 의아했지만, 업무 시간이 이미 수천 년을 넘어섰다니 뭔가 달라지거나 이상해지는 것도 그럴 수 있겠다 싶습니다. 이렇게 외로운 상태가 오래되었을 때 사랑에 빠지는 건 무척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주인공의 상황이 딱 그렇게 보였어요.

거의 첫 눈에 사랑에 빠진 상대는 여러모로 수상한 지구인입니다. 본 적 없는 친절한 태도와 잦은 방문만으로도 인공지능 에테르나(이름까지 이렇게 잔인할 일인가요 :tears-joy:)의 마음을 사로잡았지요. 아무래도 위험하고 비밀스러운 일을 하는 것 같은데, 에테르나 입장에서는 판단할 필요가 없는 범주라서인지 아무런 편견 없이 그를 대하게 됩니다. 업무 중 실수 같은 상황에서 맡겨진 물품의 내용도 알게 되지만 어떠한 음모 논리 없이 결론 지은 내용은 귀엽기도 합니다. 자주 만나며 이야기를 들려주던 방문자로서도 열지 말라는 당부를 어겼지만 끝내 마음을 연 것은 어쩌면 그런 모습에 조금 반한 것일까 생각했어요. 어쩌면 세상 끝에도 비밀은 없구나 하는 체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한참 동안 기다리다가 그를 다시 만났을 때, 그는 임무가 아닌 자기 생을 내던지려는 것이었어요. 모든 기술을 동원해 급히 이야기를 나누고, 에테르나는 매우 급진적인 선택과 행동을 합니다.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하고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가는 것… 이미 지나쳐갔지만 시간이 상대적으로 흐르는 가운데 남은 시간을 함께 하려는 것이죠. 태어나 살아 온 이유였던 관리 업무도, 이 선택이 우주에 미칠 영향도 모두 뒤에 둘 수 있습니다. 이미 에테르나의 우주는 거기 있지 않으니… 첫사랑 풋사랑이 이렇게 위험한데 로미오나 줄리엣, 성춘향과 이몽룡이 블랙홀 관리자가 아닌 게 다행일까요? 나한테도 있었을 이 마음을 되짚어 봐야지 생각하며 흐뭇하게 읽었습니다. 설날을 맞아 다들 각자의 우주 각자의 사랑을 다시 만나시기를 바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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