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옳고 그름을 따지는 오답노트가 아닙니다. 일개 독자의 주관적인 감상에 불과하니 참고 부탁드립니다.>
떠올려보면, 저는 이영도를 필두로 한 판타지 소설이 유행하던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습니다. ‘드래곤라자’ ‘눈물을 마시는 새’ 등은 당시에도 한국형 판타지 소설의 바이블로 취급되었고, 너나 할 것 없이 그 뒤를 따르기 위해 글을 쓰고 세계관을 만들어보던 일이 유행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이 시절은 ‘종이’의 시대였습니다. 인터넷 소설이라는 매체가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소설은 종이에 적힌 글귀였고, 개중 몇몇 소설은 텍본과 스캔본이라는 매체로 알음알음을 통해 공유되던 것들도 더러 있었습니다. 기본적으로 그 형태는, 현재의 웹소설과는 상이하게 다른 면이 있었습니다. 웹소설이라는 매체가 하나의 장르로 정형화되었다면, 그 시절 판타지소설은 말 그대로 ‘소설’이라는 형태에서 한 갈래로 나온 부산물에 가까웠죠.
한 가지 확실한 건, 종이로 출판되는 소설은 둘 중 하나였다는 것이죠. 정말 재밌거나, 정말 글을 잘 쓰거나…….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종이로 출판되어 도서관에 꽂혀 있는 책들은, 아무리 다른 판타지소설을 답습하며 탄생한 정형화된 작품이라고 비판할지언정, 그 나름대로는 ‘읽어볼만하다’는 품질보증 마크를 찍어둔 셈입니다.
참고로 그 시절의 저는, 한재경 작가의 <오! 나의 주인님>이라는 로맨스 판타지 소설을 좋아했습니다. 혹시 기억하시는 분이 계신가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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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이 길었습니다. 어쨌든 이번에 읽은 <검은 덤불 속에서>라는 작품 또한 그 시절의 향수를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웹소설보다는 종이를 넘기면서 읽기 좋은 형태의 ‘판타지소설’과 가까운 향내가 나며, 그 안에 담긴 문법과 구성 또한 당시 유행을 타며 불어나던 중세판타지풍의 설정을 적지 않게 답습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함께 읽은 독자 분들과 이 소설의 매력에 대해 차근차근 풀어볼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만큼은 그런 욕망을 잠시 구겨두고, 이 소설에서 보이는(혹은 보이지 않는) 덤불들을 하나씩 거둬내 보는 건 어떨까요?
저는 이 작품에서 보였던 답답한 덤불을 세 가지로 분류해볼까 합니다.
첫째, 지나치게 정적인 이야기
흔히 이야기가 ‘역동적’이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만, 그 ‘역동성’을 갖추는 방식은 작품마다 판이하기 마련입니다. 사건 자체가 그 힘을 발휘할 수도 있고, 그 사건 한복판에 뛰어드는 주인공의 능동성이 빛을 발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주인공을 비롯한 주변인물들 자체가 그럴듯하게 조형되어 극을 움직이는 것을 ‘역동적’이라고 느낄 가능성도 있죠.
무엇이든 핵심은 하나입니다. 사건이든, 인물이든, 배경이든, 모든 것이 움직이는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죠.
제가 이처럼 극을 움직이는 요소를 설명한 이유는, 이 <검은 덤불 속에서>라는 작품에서는 그런 요소가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 과하다고 느낀다면, 부족하다는 표현도 괜찮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이 소설이 무언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 힘들었습니다. 초반 7회차까지도 중심사건을 파악하기 힘들었고, 인물들 또한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기보다는 그저 작가님이 깔아둔 배경에 머물러 있다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물론 이야기가 진행된다면, 여주인공을 필두로 많은 것이 벌어지리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자유를 원합니다. 그 자유라는 가치를 위해 움직일 수 있는 발판이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초반에 그녀가 그 가치를 위해 무엇을 하고 있느냐를 떠올리면, 마땅한 답이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건이 존재하지 않고, 인물이 움직이지 않는 셈입니다. 만약 저였다면 가주들의 회견 장면을 선두로 이야기를 풀어나가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둘째, 지나치게 설정만 남은 이야기
밑밥 좀 깔자면, 저는 작품의 배경설정에 대해 좋다 나쁘다를 논하고 싶지 않습니다. 딱히 논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세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도, 가문과 자유 사이서 묶여 있는 여자의 고충도, 가문 간에 얽힌 사정까지……. 누군가는 어디선가 봤을 법한 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이 세상에 나온 이야기들 중에 신선하다고 불릴 만한 소재가 얼마나 있는지를 생각하면 또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설정들로 작가가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있겠죠.
문제는 이 작품이 보여주는 것들이 모두 ‘설정’에 그치고 있다는 점입니다. 주인공인 나탈리아는 가문의 적장자(적녀)라는 위치에 있다는 설정이 있지만, 그 설정은 사교모임에 참석하고 귀족들과 사색을 즐기는 장면들로 낭비되는 형편입니다.
결국 이 소설이 살아나기 위해서는 주인공 ‘나탈리아’가 조금 더 자신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가장 쉬운 방법은 그녀를 비롯한 인물들의 목소리를 키워주는 것입니다. 과도하게 많은 서술을 줄이고, 대사를 늘린다면 더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은 지나치게 많은 것을 가리려고 합니다. 인물들은 말을 아끼고, 소설 대부분은 그녀가 바라보는 풍경과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사건과 변화가 너무 늦게 등장하는 탓에, 결국 블랙손 가문을 비롯한 가주들의 설정에 대해서만 눈에 띄는 형편입니다. 주인공 또한 변화보다는 상황에 안주하는 장면이 많다보니, 장르태그로 제시한 로맨스도 추리도 모호합니다.
결국 한 회차를 전부 읽었을 때, 독자들은 작중에서 벌어졌던 사건보다는 나탈리아가 감상했던 풍경이 남게 됩니다. 소설에서 서사 없이 이미지만 존재하는 구간이 많다는 것은 많은 것은, 이 작품이 소설로서 기능하지 못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까 우려됩니다.
흔히 ‘사람 하나 죽이고 시작하라’는 과격한 조언이 받아들여지곤 합니다. 그 의견은 거의 농담처럼 받아들여집니다만, 의미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적어도 어떤 작품이든 사람 하나 죽을 정도로 강렬한 사건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죠. 이 소설의 시작은 다음 질문에 답을 하는 것으로 시작해야합니다. 해당 구절은 ‘작품소개’란에서 발췌했습니다.
블랙손 가의 유일한 적장자인 나탈리아 블라디미르나 블랙손.
하지만 19세기 여왕의 법에 따라 그이는 집안의 재산도, 명예도 물려받을 수 없는데….
물려받을 수 없다면? 나탈리아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을 소설의 시발점으로 끌어당겨 보면 어떨까요? 그것이 곧 설정을 벗어난 서사가 만들어지는 시발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셋째, 지나치게 사족이 많은 문체
문체는 개성이라는 말로 뭉뚱그릴 수 있으니, 가볍게 언급만 하고 가겠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소설은 웹소설 보다는 그 시절 종이책에서 느끼던 향내가 물씬 풍기고 있습니다. 그 시절 소설을 평가하는 기준을 떠올려보면, 작가님의 집중력 있는 묘사와 장면 하나하나를 파고드는 문체는 분명 강점으로 작용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문체가 다듬어지진 않았습니다. 묘사는 상세하나 사족이 많고, 표현은 다르지만 의미가 같은 말들이 반복되며 호흡이 늘어지는 구간이 많았습니다. 초반 두 회차에서 등장했던 문장 몇 개를 예시로 들겠습니다.
나탈리아는 마음속으로 온전히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었다. 그저 얌전히 입을 닫기만 하였다.
이 구절은 나탈리아가 마음이 내키지 않아 대답을 거부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문제점을 찾기 힘든 구절입니다. 하지만 이런 문장 구조가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 중 하나입니다. 일반적이라면 ‘얌전히 입을 닫았다’는 문장만으로도 나탈리아가 이 상황이 내키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굳이 ‘마음속으로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다’는 친절한 수식을 덧붙여서, 문장의 호흡을 늘여놓고 있습니다.
나탈리아는 그것이 꽤나 미심쩍게 여겨졌다. 마뜩찮게 여겨졌다.
‘미심쩍다’라는 단어와 ‘마뜩찮다’라는 단어가 의미상으로 중복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나탈리아가 이 상황에 거리를 두고 싶다는 것을 묘사하고 싶었다면, 한 쪽만 남겨둬도 충분합니다. 굳이 이 상황이 ‘미심쩍고 마뜩찮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당장은 문장 두 개만 예시로 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구조는 소설 전반에 깔려 있고, 독자로서는 마치 같은 문장을 두 번에 걸쳐 읽는 듯한 피로감마저 전해집니다. 띄어쓰기가 수시로 변하는 등 퇴고가 부족한 부분도 적지 않게 눈에 띄었습니다. 물론 앞서 지적한 요소들은, 작가님이 충분히 쥐고 갈 수 있는 무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무기가 이 소설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생각한다면, 더 무게를 줄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럽게 첨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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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덤불’은 사전적 의미로 ‘어수선하게 엉클어진 수풀’을 뜻합니다. 기본적으로 잘라내고 덜어내야 하는 장애물로서의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서 소설에서 발견한 문제점들을 ‘덤불’로 표현한 것은 이 때문입니다. 분명 이 소설에는 많은 장점이 담겨 있습니다. 하지만 무시할 수 없는 단점들이 그 장점들을 가리고 있는 형편이죠. 만약 작가님이 이 작품을 다시 돌아보신다면,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단점은 ‘잘라내고 덜어내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작품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멋진 작품 활동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