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개인적이고 중요하지도 않은 감상을 두서없이 써 보겠습니다.
여성향.
개인적으로 뭐든 남성, 여성으로 구분하는 걸 싫어합니다. 어쩔 수 없는 것만 빼고요. 옛날부터 그렇게 배워 왔고, 저도 그 생각에 동의했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그런 구분은 끈질기게도 사회에 만연해 있고, 요즘은 더 심해지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아니, 왜! 같은 모양 신발을 파는데 남자용 – 이라지만 그냥 큰 신발 – 은 오트밀 색이 없는 거야! 남자는 그냥 쭈그리한 회색이나 검정만 신으란 거냐!). 그리고 일부는 스스로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 잘은 모르지만, 분리주의(라고 하나요?)적인 느낌의 – 것들, 저도 부인하기 쉽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아무튼 그런데요, 이 소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고 말았습니다. ‘이 소설, 여성향 같네.’
여성향 소설이 뭔지, 그 반대가 뭔지 어디서 배운 건 아니지만, 그렇게 느꼈습니다. 자주 나오는 (명품) 브랜드 이름, 남자 캐릭터를 대상으로 놓고 용모를 훑어내리는 묘사. 그런 것들에서요. 아, 나도 글렀나, 아니면 그냥 어쩔 수 없는 건가, 아무튼 그랬습니다.
성(性) 묘사.
잘 몰랐는데, 미리 준비하고 읽지 않은 소설에서 성(性) 묘사가 나오는 걸 제가 불편해 하더군요. 이번에 알았습니다. 와, 벼라별 썩은 생각은 다 하는 주제에! 뭐, 그랬습니다.
아, 뭔가, 넷플릭스 (다른 것도 그렇죠?) 콘텐츠 볼 때 첫머리에 아이콘으로 폭력, 성적 묘사(있던가?) 등등의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 브릿G에도 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인간중심주의자로서의 생각.
저는 (잘 알지도 못하는 주제에) ‘주의’라는 말을 싫어하는 편인데요, 소소한 오해를 무릅쓰고라도 간결하게 말하기 위해 그 말을 사용하자면, 저는 인간중심주의자인 것 같습니다. 선을 인간과 그 나머지 동물 사이에 굵게 그려 놓은 거죠. 외모나 행동이 귀엽고 (예쁜) 인간같은 동물들도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 선 밖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 밖에도 또 선이 있죠. 또 그 밖에 또… 뭐 그렇습니다. (파리 모기는 선을 몇 개 넘어야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어떤 동식물 종이 멸절하는 것에 대해 크게 안타깝게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종들을 유지보존하고자 하는 것도 인간의 일종의 수집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고요.
그런 저에게 있어… 곳니들은 지금 이 상태로는 멸절시켜도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보호구역에 가둬 놓든가요. 인간을 먹이로 삼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같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무리일 것 같기도 합니다. 적어도 송곳니는 빼버려야 할 것 같네요.
시튼 동물기.
읽으면서 어떤 동물의 생태를 다룬 다큐멘터리 같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걸 기반으로 만들어 낸 이야기 같다는 느낌이 들었고요. 자기가 속한 종을 뛰어넘는 것 같기도 하지만, 결국 그 종의 한계 내에서 움직이는 동물 이야기 같기도 했고요. 그래서 시튼 동물기가 생각났습니다. 뭐, 제가 시튼 동물기를 다 읽은 건 아니지만요. 하나라도 제대로 읽기는 했던가? 그보다는 어린이 잡지에 실린 요약본이나 만화로 만든 걸 많이 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애초에 원전에 시튼 동물기라고 묶여 있지도 않다더군요.
뭐, 아무튼.
주인공 호연이 처음에는 종의 한계를 벗어나려 애쓰는 것 같았지만, 결국 종의 본능이 이끄는 대로 흘러가는 걸 보고, 아, 그런 거구나, 뭐 그런, 살짝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더랬습니다. 제가 너무 인간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다고 호연이 보다 인간적으로 살기를 바랐다기 보다는, 뭔가 자기 종의 틀에 불만이 있다면 그걸 깨고 나갔으면 어떨까, 그런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인간이 되고 싶어!’ 같은 건 말고요. 그런 건 저도 부정하는 이야기를 쓴 적이 있거든요. 아, 아니면 그런 걸 부정하는 건 저의 표면 뿐이고, 그 아래에는 여전히 한계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네요.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호연의 아버지가 흥미로웠습니다. 어쩌면 이 소설이 보다 긴 이야기의 도입부이고, 나중에는 그런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르겠네요.
근친상간.
호연과 호진은 씨가 다르기는 하지만 남매인데, 음. 개인적으로 근친이든 뭐든 자기들이 좋다면 뭐 어때라는 입장이지만, 그게 소설의 소재로 쓰일 때는 좀 다르게 볼 수 밖에 없네요. 뭔가, 단지… 터부를 건드려서 흥미를 돋우는 장치로 쓰였을 수도 있으니까요. 그냥 서로 혈육이 아닌, 상관 없는 관계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다르게 생각해 보면 곳니가 멸종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말하는 장치일지도 모르겠네요.
매끄럽게 읽힌다!
오래 전에 어느 서점에서 정치 이야기를 무협지 형식으로 풀어나간 책을 집어들고 읽어 봤는데요, 너무나 매끄럽고 부드럽게 술술 읽혀서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도 그랬습니다. 감히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부럽네요. 제 글은 저 자신이 읽어도 여기저기 턱턱 막히는데. 다만, 저로서는 약간 애매했던 부분들이 있기는 했는데요, 다음과 같습니다.
애매 1: 도입부 이해하기
저는 소설의 도입부를 힘들어 하는 문제가 있는데요, 이 소설에서도 그랬습니다. 남자와 호연이 있는 그 공간을 이해하기가 좀 힘들었어요. 호연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남자와 전화를 하면서 엿보는 그 부분이요. 다 읽고 나서 조립이 되기는 했지만요. 좀 답답했습니다.
애매 2: 호연과 호수가 만나는 장면.
굉장히 극적인 장면인데요, 너무 휙 지나가 버린 것 같아요. 영화나 드라마였다면 그 장면에서 시간이 느려지거나 아니면 아예 멈춘 뒤에 카메라가 한바퀴 빙글 돌거나, 두근두근 소리가 들리거나,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거나 뭐 그러면서 관객이 그 충격을 맛볼 시간을 주었을 것 같은데요. 적어도 “호수 언니……?” 뒤에 두어 줄 정도는 뭔가 넣어서 시간을 흘려보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