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미래를 묻다’ 라는 사회과학 책의 161p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현실적이지 않고 현명한 방법도 아닌 것 같습니다. (중략) 그 일을 직접 시도하는 사람은 이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소생하더라도 그런 사람은 과거에서 온 ‘난민 같은 존재’라 자기가 살던 세상과는 너무 다른 사회에 부담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게다가 우리의 가치관과는 달리 미래 사회가 그런 사람을 보살펴줄지도 의문입니다.
이 소설을 읽자마자 딱 이 문장이 떠올랐다. ‘이방인’을 가장 잘 나타내는 책의 한 구절이라 가져와봤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방인’읽은 후기를 남겨보겠다.
이 소설의 제목이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과 같다는 점에서 내 시선이 사로잡혔던 것 같다. 그래서 이 소설을 읽게 되었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은 기억을 잃은 상태에서 깨어나고, 주변 사람들은 주인공에게 별 관심이 없을 뿐더러 오히려 귀찮아하는 낌새다. 주인공이 질문을 하려고 해도, 그냥 기다리고 있으라는 말 뿐이고, 자칫하면 끌려나가 폐기하겠다는 협박을 당한다. 주인공은 일련의 과정을 걸쳐 자신이 냉동 인간이었고, 계약 기간이 끝나 깨어나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다. 주인공은 이 세계에 적응해 살아가려 하지만, 실패하고야 만다.
여기서 흥미로웠던 점은, 냉동 인간이 주인공 뿐만 아니라 하루에 수백(?)명을 깨워야 할 정도로 많다는 점이다.
보통 ‘냉동 인간’하면 바로 과거를 살아 온 살아있는 유물이 떠오르게 된다. 냉동 인간이 깨어나는 순간, 코 앞에 모인 전문 의료진들이 친절하게 ‘괜찮으신가요? 정신이 좀 드세요?’하고 물어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신기한 시선을 보내게 될 것 같다. 극진한 대우를 받지 못하더라도, 특별 대우는 받을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그게 바로 냉동 인간이다.
하지만 냉동 인간이 수천명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사실 이게 더 현실성 있다. 지금 인간들이 보았을 때 ‘불치병을 고칠 수 있다’나 ‘노화가 사라진 시대에 살 수 있다’ 같은 것들은 꽤 매리트 있는 일이다. 죽음을 직면한 사람일수록 더 그렇다. 진시황처럼 불사의 욕망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기술은 점점 더 발전할 것이고, 어느 순간 인간 냉동 기술을 아주 간단한 시술의 일종이 될지도 모른다. 냉동 인간들이 점점 축적되어 수가 불어나는 것이다.
많은 문제가 생긴다. 언어가 다른 것, 기존에 사고하던 방식으로는 미래를 살아갈 수 없는 것, 기존에 있던 모든 세계가 뒤바뀐 것, 돈이 없는 것, 세계를 살아 갈 능력이 없는 것. 가장 큰 문제는 미래 사람들이 냉동 인간에게 호의적이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할머니랑 나는 50살 정도 나이 차이가 나는데, 그렇게 긴 기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통하지 않는다. 아애 다른 세상을 살아온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사회만 봐도 그렇다. MZ, Z, X. 세대를 나누고 그 세대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같은 콘텐츠들이 올라온다. 지역 홍보 채널을 운영하다 유명해진 어느 공무원은 ‘길어봤자 2,3년이에요. 난 이게 왜 재미있는지 잘 모르겠어요’하고 솔직한 심정을 밝히기도 했다.
한 사회 안에서도 서로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500년 뒤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 소설은 이 부분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구절이 있다.
어떻게 냉동에서 깨어난 ‘조상님들’은 모두 다 이렇게 이기적인지 모르겠습니다. 다음 세대가 어떻게 해주겠지, 우리가 남긴 돈으로 어떻게든 살겠지 하는 안일한 생각으로 다들 냉동인간이 되었겠지요.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냉동 인간만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지구라는 한정적인 자원, 미래 세대에게도 되물려 줘야할 소중한 것들을 우리가 펑펑 써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해결해야 할 숙제들을 떠밀듯 한 곳에 묻어 놓고 방치한 꼴이다. 그리고 그 무덤에서 깨어난 것들은 한 맺힌 귀신처럼, 살아있는 자들을 붙잡고 늘어지고 있다.
우리가 냉동하는 건 인간 뿐만이 아닐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