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과 연재본, 단행본이 모두 각기 다른 재미를 줬어요.
장편 버전에서는 세일의 꿈 같은 일상이 상세하게 묘사되면서 천천히 올라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말도 안 되게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이전에는 누릴 수 없던 것들이 내 것이 되고, 나보다 우월한 조건을 가진 재수없는 남자를 누를 수 있게 된 삶. 까닭 모를 두려움과 꿈이 점점 일상을 침범하기는 하지만, 고양된 감각으로 그것들을 밀어내는 동안에는 계속 계속 위로 올라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 노인과 함께 문명의 것을 손에 쥐고, 박 노인과 함께 마법의 힘을 느끼는 동안은요. 김 노인과 일하면서도 고양감이 한동안 이어지지만, 김 씨를 통해 꿈 꾸는 자에게 다가가면서 긴장감이 고조되다가, 파수꾼의 진실이 밝혀짐과 동시에 롤러코스터는 급강하합니다.
고통과 비명을 통해서만 유지되는 문명. 작품은 박영종 노인의 적나라한 설계라는 장치와 코스믹 호러라는 장르로써 이를 이야기하지만, 사실 작품 밖의 현실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운 좋게 안정된 사회에 태어나서 — 비록 무한경쟁과 빈부격차 속에 고통 받더라도 — 살육을 일상으로 느끼지는 않는 삶을 살고 있지만, 당장 내전과 테러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같은 지구 안에 있다는 것. 일상품을 구매함으로써 전쟁에 자금을 대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고, 선거에 던지는 표로 이웃의 생활비를 앗아갈 수도 있고, 그저 하루를 살아가는 방식이 기후위기를 가속하기도 하고. 작품 속 셰계보다 훨씬 교묘하게 가려놓았을 뿐, 일부의 고통 위에 일부의 평화와 번영이 가능한 구조라는 점은 동일합니다. 어쩌면 문명이라는 개념 자체가 누군가를 착취함으로써 다른 누군가의 편리한 삶이 보장되는 구조 속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어요. 원숭이의 왕이 훔친 불처럼 문명은 우리 인간들이 추위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온기를 주기도 하지만, 장작이 될 처지에 있는 이들에게도 문명이 따스하게 느껴질까요.
박영종 일대기를 보면서 의아했던 점 중 하나는 그가 한국에 자리잡은 것이 전후였다는 것이었어요. 고통과 비명을 들려주기에는 전쟁 한복판이 유리하지 않을까? 어째서 군사정권이 폭력을 독점하기 시작하던 때에 이곳에 자리 잡은 걸까? 선생으로서의 역할을 하기 위해서? 그의 발명품이 의심없이 자리잡는 시간이 필요해서? 안정과 번영을 약속 받은 후에 배신당한 채로 지르는 비명이 가장 효과적이어서? 그러고보면 파수꾼들의 집과 가족과 소중한 것들이 과천에 소재하는 이유도 의아했어요. 선별된 이들이 부유한 출신이 아닌 건 거인의 의중이더라도, 박 영감의 뜻대로 레버를 당기게 하려면 파수꾼들이 과천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는 편이 유리하지 않은가 해서요. 결국 박 영감이 원한 건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면서도 체제의 유지를 위해 소중한 것들을 잔혹하게 버릴 수 있는’ 후임이었던 걸까요? 아니면 사랑하는 종들의 비탄과 고통이야말로 거인에게 단잠을 선물하는 자장가의 핵심이었던 걸까요? 어쩌면 문명이 은폐해온 비밀이 완전히 발각되는 순간들이 필요했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단편, 연재본, 단행본이 디테일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지만 결말만은 동일합니다. 세일은 꿈을 꾸고 꿈꾸는 자는 꿈에서 깨어나죠. 거인이 깨어난 세계는 어떤 모습일지 궁금합니다. 그저 파국일지 어떠한 희망이 있을지. 전자라면, 현실의 우리는 타인을 장작으로 밀어넣지 않고 온기를 얻을 방식을 고민해야겠죠. 희생과 공멸 외의 제 3의 길을요. 절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요?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품이었어요. 2023년의 정서와 공명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고요. 악몽 같은 단편, 꿈과 현실의 경계를 흐리는 연재본, 갈등이 뚜렷하게 드러나는 단행본 모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