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말부터 시작합니다. 스포일러 주의!
* 소제목은 대부분 본편의 문장을 인용했습니다.
* 인용한 문장은 기울임체로 표시했습니다.
– 명정은 자유로워졌다.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 단 한 단어에 사로잡혀 몇 번이고 이야기를 곱씹었다. 명정이 마침내 자유로워졌다고 말하는 순간에 이야기는 끝났으나, 나는 끝이 난 이야기를 한참 붙잡고 있어야만 했다.
명정의 부자유는 어디로부터 왔으며, 그는 어떻게 자유로워졌을까?
명정은 ‘일방적이었던 관찰‘이 끝났다고 말했다. ‘빌렸던 감각‘으로부터 자유로워졌으며, ‘윤리적 의무‘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한다. 각각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해보기에 앞서 루바토가 처한 상황을, 명정이 어떤 사람인지를 점검해보자.
이야기의 시작은 머리의 외침이다.
루바토의 함장 명정은 ‘제법 오랜 시간을 살았고‘, ‘그간의 경험’으로 미루어 ‘직감을 꽤 신뢰했다‘. 말하는 머리를 발견하고 취한 행동들 또한 신중한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통합상태판단 작업을 지시하고, 함선 점검 현황을 살폈다. 그리고 머리를 수거했다. 결과는 ‘이상 없음’이다.
통합상태판단이란 건 꽤 흥미로운 시스템인데, 우선 이것이 함선 전체를 살핀다는 점부터 생각해보자. 명정은 지휘석에 앉아 함선 점검의 진행도를 스크린으로 살필 수 있다. 열두 개의 항목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각각의 결과를 종합하여 함선의 상태를 평가한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통합상태판단이란 탐사 중 발생할 수 있는 각종 문제 상황에 직면할 시 루바토가 대응할 수 있는 여력을 판단하는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주 탐사 중 발생할 수 있는 문제 상황에는 대체 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말하는 머리를 발견하는 건, 이들 조직에서 예상한 범주를 벗어나고도 남는다는 게 분명하다. ‘일어나서는 안될 일이 일어났다’는 명정의 반응만 보아도 확실하다.
그리고 다른 의문이 생긴다. 통합상태판단은 함선 자체만을 대상으로 할까? 비상시 승무원들의 대처 능력도 평가 대상에 들어갈까? 매번 시뮬레이션을 통해 확인하기는 어려울 터이니, 전자일 가능성이 높다. 함선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한다는 전제 하에 탐사가 이루어지리라. 만약 문제 상황이 발생할 경우, 위험 요소가 함선 내부까지 침입하지 못하도록 막는다. 함선이 무사하다면, 함선 내부의 승무원들도 안전할 것이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루바토에서는 이것이 당연한 상식이었다.
말하는 머리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이한 루바토라면 어떨까. 인간의 능력으로, 함선의 기능 평가만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눈앞에 튀어나왔다. 이때 머리가 경고하는 것을, 기존의 평가 체제에 근거해 근거 없는 망상으로 치부해도 괜찮을까. 엄중한 판단은 미뤄두고 머리의 말을 들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명정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면 답은 이미 나와있다.
명정은 자신의 직감을 신뢰하지만 그만큼 신중한 사람이며,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서도 최대한 합리적으로 행동하고자 한다. 그리고 의무를 잊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함선에 들인 모든 이물질은 함장이 직접 확인하고 처우를 결정해야 하므로,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고 그대로 행한다.
원리원칙을 지키는 사람.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사람. 명정이 그런 인물이기에 미정은 명정을 설득–미정이 시도한 것을 설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할 수 없었다. 명정의 판단은 기존의 시스템에 의거한 것이다. 미정은 아무런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명정의 판단에 영향을 줄 수 없었다.
미정이 침착하게, 자신이 목격한 것과 경험한 것, 위험이 닥칠 것이라 판단한 근거를 명정에게 설명할 수 있었다면 전개는 다소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미정도 위험의 원인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지 못했으므로, 설명할 수 있는 게 많지는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 해도 명정이 루바토를 회항시켰을지는, 여전히 장담하기 어렵다. 명정은 의무를 다하는 사람이므로, 신중을 기하되 돌아설 가능성은 낮다.
– “결정해야 할 것은 이것일세. 돌아갈 것인가, 마저 조사를 마칠 것인가.”
명정은 회항하지 않았고, 대신 일어날 지 모르는 위험에 대비하기로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질 수도, 벌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던 명정은 나무를 가장 먼저 발견했다. 겨우 삼십 분 만에, 함선과 함교는 엉망으로 변했다. 나무는 함선에 달라붙었고, 함내 곳곳에서 이상 현상이 발생했다. 이는 공간이 구체성을 상실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공명’, ‘닮고자 하는 성질’, ‘끌어들이려는 의지’라고도 표현되었던 모든 것들이 루바토와 루바토를 둘러싼 우주를 균질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이야기를 조금 단순하게 바꾸어보자. A라는 방 안에 나와 당신이 있다. B라는 방 안에는 고양이와 튤립이 있다. A와 B는 완전히 구분되어 있고, 나와 당신은 B의 존재를 알지 못한다. 당연히 그 안에 있을 고양이와 튤립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모종의 이유로 A와 B가 가지는 구체성이 상실되었다고 상상해보자. A에 있는 나의 눈에 튤립이 보인다. 당신은 고양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 보이고, 들리지 않아야 할 것이 들리므로, 나는 외려 당신을 보기가 어렵다. 당신이 무어라 말하고 있지만 나에겐 잘 들리지 않는다. A를 A이게 했던 모든 특징과 독립성이 사라지고 B에서도 같은 현상이 발생했다. 내 눈앞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발생한 장소가 A인지 B인지도 확신할 수 없어졌다. 내가 서있는 곳은 A일까 B일까. 더 이상 A와 B를 구분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다.
문제는, A와 B의 연결이 소통의 불가능성을 해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여전히 고양이의 말–익숙한 존재라면 어느 정도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나는 고양이와 함께 지내본 적이 없다고 가정하자–을 알아듣지 못한다. 상황이 달라졌다 해서 고양이와 튤립이 서로를 이해할 리는 없다. 우리에게는 우리만의 언어가, 그들에게는 그들만의 언어가 있지 않던가.
루바토에서 일어난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관여하고 보다 커다란 공간에서 벌어졌으며, 복잡한 양상으로 확인되었으나 같은 상황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행히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들도 몇 있었다. 이들이 어떻게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는지는, 적어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다.
눈여겨보아야 하는 건 이들이 무엇을 했는지이다.
비상사태에 함장은 독단으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그러나 명정은 다른 의견을 듣기 위해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이들을 불러모았다. 명정다운 신중함이 발휘된 결과로 보이나, 명정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명정은 사무장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서 충돌하는 의지를 확인했다.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두 의지가 명확해지는 순간, 명정 스스로 무엇을 택해야 하는지도 분명해졌다. 명정은 떠날 수 없다는 사실이 대화를 통해 드러났다.
무엇보다 명정은 떠날 수 없다. 그것이 어떻게 움직일 줄 알고 탈출선에 오르겠는가. 그가 주시하지 않으면, 나무는 움직일 것이다. 탈출하려 한들 나무가 움직인다면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을까. 함선조차도 손 쓸 도리가 없는 상황에, 탈출선은 영향을 받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었을까. 이들의 탈출은 명정이 그 자리에 남음으로써, 나무를 주시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명정의 물음은, 남아야 하나 떠나야 하나가 아니라, 함께 남아줄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명정은 원칙에 충실하며, 신중하다. 명정이 책임져야 할 것은 루바토의 임무만이 아니다. 루바토의 연구원, 승무원들도 명정이 지켜야 할 대상이다.
‘모든 일이 미지수였다.’ 누군가는 나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머물러야 한다. 누군가는 최고 수준의 경계로도 포착할 수 없었던 나무의 정보를 수집해야 한다. 누군가는 탈출하지 못하는 이들을 살펴야 한다. 이는 변수를 줄여나가고 미래를 대비하려면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런데 모든 일이 미지수였다. 군이 제때 도착할 수 있을까? 군이 도착하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일까? 필요한 일이지만 남는다 한들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지?
사무장(그리고 미정)이 보인 반응은 아마도 가장 일반적인 형태의 반응일 것이다. 사무장은 명정과 반대되는 생각을 가지고 있고, 이를 대화를 통해 충분히 보여줌으로써 ‘미지에 대한 공포‘를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그리고, 명정이 어떤 인물인지를 부연한다. 사무장에게는 떠나야할 이유만, 명정에게는 떠나지 말아야할 이유만 가득하다. 그리고 사무장은 안다. 명정이 우직하게 버티다가 승무원들의 목숨을 포기할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실제로도 사무장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했다.
명정이 탈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이주자 출신이었고,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이므로 행성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무시할 수 없었으리라.
‘본디 이방인은 스며들지 못하는 존재라. 어느 곳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정착지를 찾아 헤매야 하는 게 그들의 처지다.’
이때 이방인은 명정이자, N급 행성의 거주민들이 맞닥뜨리게 될지 모르는 미래이며, 함선을 둘러싼 나무이다. 그리고 돌아가야 하지만 돌아갈 수 없었던 아이이기도 했다. 이방인이었을 명정은 떠돌게 될, 떠돌고 있는 이들을 외면할 수 없었다.
– 한편, 통신장교 데바는 탈출하지 못했다.
데바는 탈출하지 못했으나 나무에 가장 근접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살아야 한다, 에 가까운 생각. 이렇게까지 삶에 집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생각을 평소의 그라면 했으리라고 말한다. 상당히 흥미로운 표현이다. 우선 간섭으로 인한 고통이 너무 강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준이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삶에 집착하는 것이 이상하다는 표현이야말로 이상하다. 죽음의 위기에 처했을 때, 살고자 하는 것은 생명으로서 당연한 반응이 아닐까. 그렇다면 데바의 감정은 고통으로 인한 죽음의 위협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리라. 다시 전보의 내용을 떠올려보자. ‘그것을 지켜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선명한 환각이나 환청을 듣는 것을 보고받았다. 이를 ‘동화’라고 칭한다.’
‘살아야 한다’는 집념. 이것이 데바의 생각이 아니라면, 동화를 유발하는 나무가 원인이다. 나무는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고 있다. 그 이유는 나무의 과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아이가 죽을 것을 두려워한 나무는 아이가 돌아가기를, 살아나기를 간절히 염원하지 않았던가.
데바는 탈출하지 못했으나, 경고음을 들었더라도 탈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것이 무엇을 말하고 싶어 하는지, 데바는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의무가 명정을 잡았다면, 탐구심이 데바를 잡았다.
데바는 소리만 아니라 복잡한 감정이 직접 흘려 넣어지는 것 같았다고 말하는데, 명정도 유사한 경험을 한다. ‘그 어느때보다 활발한 머릿속은 그간 잊은 줄로 알았던 기억을 마구 헤집어’낸다.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냉랭하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뺨을 스쳤던 감각’과 함께 어떤 기억이 떠오른다. 명정의 것이 아닌 기억. 데바가 찾아낸 질문의 주인, 나무가 찾는 것이 명정의 기억 속에 떠오른다. ‘그래, 아이가 있었다.’
– 언니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나무와 얽힌 함선, 그곳에서 공간의 구체성이 상실된다. 이 공간의 누군가가 저 공간의 누군가에게 보이고, 저 멀리의 소리가 바로 이곳에서 들린다. 대다수의 승무원들이 괴로워하는 원인이었으나, 예상 못한 효과도 있었다.
‘빛만이 뿌옇게 번지는 눈 앞 어딘가에 언니 데바가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아 있었다.’ ‘어차피 다 죽을 거 뭐하러 이런 짓을 하는지‘ 모르겠다면서도 데비는 일어선다. 언니가 있는 곳으로 가야 한다.
나무와 조우한 결과가 각 인물을 중심으로 하나씩 펼쳐졌다는 점도 흥미롭다. 데바는 청각, 데비는 시각에 간섭이 발생했다. 그에 비해 명정은 간섭보다 동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다.
힘겹게 도달한 함교에서 데바와 데비는 만난다. ‘들리지 않는 사람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의 싸움’은 ‘누군가의 긴 한숨’으로 끝이 났다.
데바와 데비 자매의 역할은 흥미롭다. 무엇보다 둘은 간섭의 효과를 각각 표상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둘의 싸움은, 사실 싸움이 아니다. 루바토가 마주한 현실도 사실 싸움이 아님을, 데바와 데비는 암시한다.
데바는 오로지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만 사로잡혔고, 뒤이어 소리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했다. 데비와 만나기 전까지는 다른 모든 건 중요하지 않았다. 그런 데바에게 데비가 찾아왔다. 생의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위기의 순간에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데바가 데비와 어떻게 싸울 수 있었을까. 설령 화가 났더라도 그건 데비가 위험을 감수했음을 짐작조차 못하던 자신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을까.
데비는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없고’, ‘기도문 읊기’란 ‘아무짝에도 쓸모 없’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유일한 가족인 데바를 만나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정확히는, 떠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데비에게는 데바와 싸울 이유가 없다.
싸움일 수 없는 싸움은 그 끝도 애매하다. 이제는 떠날 수도 없으므로, ‘긴 한숨’과 함께 흐지부지 흩어질 뿐이다.
유사한 상황이 루바토에서도 발견된다. 나무는 루바토와 승무원들에게 해를 끼칠 생각이 없었다. 나무는 그저 찾고 있을 뿐이다. 명정을 중심으로 한 승무원들은 이 사태에 아무런 타개책을 제시하지 못하며, 그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분주하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자들의 싸움, 서로가 서로에게 아무것도 전하지 못하는 상황은 데바와 데비가 보여준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외견상 괴생명체와 조우한 함선의 싸움으로 보이는 이 장면은, 데바와 데비의 싸움이 그랬듯 싸움일 수 없다. 결말마저도 유사하지 않았던가. 그저 그 상황이 지나갔을 뿐이다.
–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파리 하나 없는 마른 가지를 흔드는 것뿐이다.
어쩌면 간섭과 동화는 나무의 오랜 염원이 극적으로 발현된 형태일지 모른다. 아이와 함께였으나 아이와 소통할 수 없었던, 아이의 존재에 관여할 수 없었던 회한 섞인 갈망.
나무는 지켜봐야만 했다. 그리고… 자신의 ‘말‘이 아이에게 전해지지 않음을 알았다. 지금도 알 것이다. 루바토를 끌어안은 것도, 그것 말고는 뭔가를 전할 수단이 없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다만 그것이 함선 안의 인간들에게 고통을 준다는 것까지는 몰랐을 것이다.
고통에 사로잡힌 나무가 일방적으로 소통을 시도할 때, 나무의 시도는 무용한 것이었나? 그는 여전히 불가해한 존재로 남게 될까? 적어도 <슬릿>의 세상에서, 나무의 시도는 반향을 얻었다. 처음의 이유가 무엇이었건 명정은 나무를 응시했고, 데바는 소리를 들었다. 닿으려는 시도는 소통의 가능성을 연다. 다만 방법에 대해서는 고민이 필요하리라. 일방적인 표현은 때로 폭력이 되기도 함을, 루바토의 사태에서도 볼 수 있지 않던가. 나무에게 그럴 기회가 있을지는 낙관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명정과 데바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
물리적으로 구분된 것들을 한데 모으고, 포기하지 않고 말을 걸면 닿을 수 있을까. 이러한 의문에 대한 긍정을 <슬릿>의 후반에서 읽어낼 수 있다.
가장 적극적으로 움직인 데바조차도 정보의 파편을 그러모으는 데 그친다. ‘무엇을 찾고 있는지,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 순간, 데바는 실패하지만 상황을 이해할 새로운 시각이 열린다. 루바토를 습격한 괴생명체는 이제 공포의 형상으로만 여겨질 수 없다. 나무는 머나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무언가를 찾고 있는 방랑자이다. 명정은 그 생명체로부터 ‘보고 들었다.’ ‘그럴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얻어냈다.’
작중의 누구도, 혼자서는 정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없다. 명정이 본 환상, 데바가 수집한 파형. 저마다 미지를 다른 형태로 경험하며, 그렇기에 동일한 현상을 마주하고도 전혀 다른 것을 알아낸다. 파편화된 정보를 각각의 인물들은 취합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독자만이 이러한 사실들로 미루어 나무의 과거를 그려볼 수 있다.
불가해하게 다가오는 현상을 마주했을 때, 실패나 다름없어 보이는 시도들이 모이고 모여 하나의 그림을 완성하는 순간을 <슬릿>은 분명하게 포착했다. 이들의 노력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명정과 데바가 해낸 일을 두고, 동료 승무원들의 안위를 염려해 복귀를 주장했던 사무장의 선택은 잘못되었다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각각의 선택이 어떤 결과를 불러왔는지는 한번 들여다봄 직하다. 명정의 선택은 작지만 분명한 정보를 얻었다. 사무장의 선택은 새로운 미지를 불러왔다. 나무는 도망쳤을까? 도망쳤다면 어디로, 어떻게 벗어났을까?
‘뚜렷한 배척감과 출처모를 거부감’에 충실해 자리를 벗어나기에 급급했다면 결과는 더 많은, 더 어려운 질문들로 돌아올 뿐이다. 여전히 우리는 나무에 대해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다시 기회–조우–가 온다면 누구의 선택이 유효한 이해를 가져올 수 있을까.
그저 휩쓸릴 뿐인 재난과 같았다고 해도, 이해의 가능성을 열어두었다는 점에 의의를 두고 싶다.
– 명정은 자신을 내려다보는 듯한 식물로부터 눈을 돌렸다.
루바토를 구하러 지원 병력이 도달했을 때, 명정은 이제 나무를 걱정한다. ‘도망치라고, 혹은 위험하다고 전해야만 했다. 그게 도리였으나 방법이 없었다.’
명정은 선택했다. 저것이 어디로 갈지도 알 수 없지만, 어떻게 막아내야 할지도 모르지만… 이대로 부서지게 둘 수는 없다. 그래서 ‘눈을 돌렸다.’
‘달아는 났을까. 살아는 있을까.’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모든 게 파편더미에 파묻혀버렸다.’
명정은 자유로워졌으나, 해내지 못한 모든 것들에 좌절한다. 그런데 정말로 모든 게 무용해졌을까?
아니다. 비록 명정은 무력함을, 애통함을 느낄지 모르나 이들이 해낸 것은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 오로지 공포로만 받아들여질 무언가를 다르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이제 명정이 자유를 되찾은 순간으로 돌아가보자. ‘일방적인 관찰‘은 누구의 행위였을까. 나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주시해야 했던 명정? 루바토 안에 자신이 찾는 존재가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나무? 어느 쪽이건 나무가 사라지며 관찰도 끝났다.
명정이 일방적인 관찰로부터 놓여났을 때 자유를 느낀 것은, ‘일방적인 관찰‘이 윤리적인 책임을 지우기 때문이다. 명정은 나무가 정말로 뜻했던 바가 무엇인지 확신할 수 없다. 보고 느낀 것을 토대로 유추해야 했으므로,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함선의 공격에 나무가 노출되게 둘 것인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알 수 없으나 나무가 피하도록 할 것인가? 그러나 이 선택의 이면에는 이런 질문이 숨어있다. 상실을 채우고자 끝없이 헤매는 자를 외면할 것인가? 명정에게 있어 일방적인 관찰은 끊임없는 윤리적 책임의 숙고였다.
‘빌렸던 감각‘에 대해서도 이제는 또 하나의 의미를 상상할 수 있다. 명정이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들은 것은 사태 파악에 있어 유의미하지 않았다. 그가 알게 된 것은 전부 나무가 전한 감정과 기억을 토대로 한다. 인간의 인지 능력에 한계가 있다면 ‘감각을 빌려서‘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작중에선 실패했지만 통합상태판단 역시 온전히 인간의 능력이라고 보긴 어렵다. 내 것이 아닌 감각을 빌려온다는 것은 익숙지 않은 부담, 나아가 두려움의 근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슬릿>에서는 미지를 대할 때는 내 것이 아닌 감각이 새로운 이해를 열어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지금은 거부감과 공포만을 불러일으키는 미지도, 다른 ‘감각’으로는 다르게 다가올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마지막으로 ‘윤리적 의무‘를 생각해보자. 가장 눈길을 끄는 부분이기도 한데, 정말로 명정이 이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저 상황이 끝남과 함께 판단 보류 상태에 들어갔을 뿐이다. <슬릿>이 이토록 여운을 남기는 까닭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공포의 영역을 그대로 남겨두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해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명정은 자유로워졌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워지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저 지금의 부담이 언제일지 모르는 미래로 미뤄졌을 뿐이다. 그렇기에 명정도 ‘할 수 있는 게 눈을 돌리는 일 뿐’이라며 그토록 통탄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는 명정에게 최선을 다했다고 말해주고 싶다. 당신은 공포 앞에서 의무를 다하고자 노력했다고. 공포에 매몰되지 않고 다른 것을 보기 위해 분투했다고. 명정이 지켜낸 자리는 분명 다른 누군가에겐 출발점이 될 것이다.
– 그것은 여전히 낯설기 이를 데 없는 생명체다.
명정의 자유로부터 시작된 고민의 결과는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감상의 주요 흐름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그냥 넘어가기에는 아쉬운 부분을 조금 더 다룬 뒤 끝내고 싶다.
글의 중간, 나무의 형상을 표현한 삽화가 있다. 나무 줄기와 균류, 말라붙은 낙엽. 세세한 것을 뜯어보면 분명 익숙하건만 ‘적어도 소행성보다는 큰‘ 나무는 거부감만을 불러일으키는 미지의 존재다. 불가해한 미지는 공포로 다가왔으며, <슬릿>에서 묘사하는 나무의 모습은 상상을 여러 방향으로 끌고 간다.
이때 삽화는 독자가 상상해야 할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기도 하고, 읽기의 시간을 지연시키기도 한다. 그 자체로 마치 하나의 블랙홀처럼 기능한다. 삽화 전후로 독서의 흐름은 잠시 중단된다. 읽으며 상상했던 것을 수정하기도 하고, 읽은 것과 삽화의 내용을 연관지으며 시간을 들이기도 한다.
글의 어느 지점에 놓이느냐에 따라 삽화에 대한 인상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 <슬릿>의 경우 삽화가 언니를 찾으러 가는 데비의 발걸음, 나무를 멈추게 하는 명정의 주시 사이에 놓이며 자연스럽게 장면을 전환하는 효과가 있었다.
– 머리가 말했다.
<슬릿>의 시작은 머리의 등장이었다.
도입부의 두 문장과 이어지는 단락은 분명하게 구분된다. 이때의 시간 차가 눈에 띈다. 아마 머리는 나가는 길, 혹은 안전한 곳을 찾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번번이 실패하고, ‘여기도 아니야’라고 외쳤으리라.
그러다 주위를 유영하던 함선을 마주하자마자, 머리는 다시 외친다. ‘안돼!’라고. 무엇이 안 된다는 것일까? ‘어? 저거’라는 대사는 무엇을 발견하고 한 말이었을까. 단순히 함선을 발견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그저 함선 뿐이었다면, 머리는 안심했을지 모른다. 드디어 여기서 나갈 수 있다고.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여긴 안 된다고!’였다. 여기는 안된다, 들어오지 말라고 머리는 말했다. 함선에 있는 이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머리에게는 보이는 경계라도 있었을까. 명정에겐 보이지 않지만 머리에게는 보이는 위협이 있었던 걸까.
이 시점의 미정에게 뭔가가 보이지는 않았으리라. 그랬다면 루바토도 뭔가를 발견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렇다면 지금은 보이지 않지만, 곧 다가올 위험을 머리가 알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미정이 한 말을 떠올려보자. ‘네 귀하신 연구원이고 엔지니어고 할 거 없이 다 헤까닥 돌아서는 복도에 좀비처럼 널브러질 텐데 이렇게 여유 부릴 시간이 있냐?’ 미정은 괴이한 생명체 때문에 승무원들이 ‘복도에 좀비처럼 널브러질‘ 거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미정은 블랙홀을 빠져나오며 다음과 같은 것들을 경험했다. ‘명정과 명정의 함선, 괴이한 생명체를 목격’했고, ‘빌어먹을 그 함선에서 들려오는 아수라장의 소리’를 들었다.
이때 의문이 생긴다. 명정이 미정을 발견했을 때, 아직 나무는 확인되지 않았다. 함선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었으며, 승무원들이 쓰러지지도 않았다. 미정의 예고 이후 두 시간 반이 지나고서야 우주 연합 본부로 전보가 전해졌다. 그렇다면 미정이 목격한 ‘그 함선‘이란 무엇을 의미할까? 찾아올 ‘재앙‘의 형태를, 미정은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미정은 어떻게 ‘두 시간’이라고 특정할 수 있었을까?
두 가지를 상상해볼 수 있다. 첫째, 블랙홀 안에서 미정은 다른 함선을 목격했다. 둘째, 미정은 시간을 거슬러왔다.
첫 번째 경우라면, 미정은 지금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괴이한 생명체가 어떤 식으로 함선에 위협이 되었는지, 어떤 형태였으며 어떤 움직임을 보였는지 같은 정보 말이다. 명정을 설득할 때 유용했을 그런 정보들을 미정은 전혀 말하지도, 떠올리지도 못한다. 그리고 미정이 그 아수라장을 어떻게 지나왔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미정도 분명히 말하지 않았던가. ‘나도 몰라. 이제부터는 너희한테 달린 거니까.’
두 번째 경우, 미정이 두 시간 뒤의 루바토를 보았을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다. 미정이 현 시점보다 훨씬 전으로부터 왔다는 것은 이미 밝혀졌다. 과거로부터 온 미정은, 블랙홀 안에서 명정의 시간대로 떨어진 것일까? 그보다 먼 미래에 먼저 도착했던 것은 아닐까? 미정은 나무에게 사로잡힌 함선의 모습을 보았다. 어쩌면, 간섭의 효과로 승무원들이 내지르는 ‘아수라장의 소리’를 들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머리가 말한 것을 떠올려보자. ‘여기도 아니야!’ 이때 ‘여기‘란 공간이 아닌 시간을 의미했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미정은 자신이 출발한 시간대로 돌아가던 중, 루바토가 처한 위험을 도중에 목격했다. 그리고 아주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멀쩡한 함선과 명정을 만났다.
아쉽게도 이후의 일은 모른다. 이제부터는 명정과 다른 사람들에게 달렸다.
한 가지 아쉬움이 남는다면, 이 장면을 기점으로 미정의 존재감은 희미해진다는 점이다.
23세기 사람 미정은 블랙홀 안에 조난당해도, 처음 보는 함선에 끌려와도, 머리만 남아도 재잘재잘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런데 집요한 주시가 시작된 이래로 미정은 말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주연이라도 된 것 같다고 말한 직후다. 주인공처럼 등장한 머리는 그 자리를 명정과 데바, 데비에게 넘겨준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도망치기에 급급하고, 명정에게도 복귀를 종용하던 그는 <슬릿>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인물이다. 그래도 아쉬움은 남는다. 머리만 달랑, 강렬한 인상을 주며 등장한 것과 달리 언제부턴가 찾아보기도 힘들어졌으니까. 물론 이어지는 이야기는 그런 부분까지 신경쓰지 못할 만큼 매혹적이다. 글이 이끄는 대로 속절없이 끌려가다가,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작은 의문이 든다. ‘어라, 미정은?’ 작게 한 구석쯤은 머리를 위해 남겨두어도 괜찮지 않았을까. 미정이 보지 못한 미래로 나아가는 과정이란 사실은, 미정에게도 동등하게 적용되는 상황이었으니까.
– 낯섦에 저항하는 방법
낯섦에 저항하는 방법은 회피하거나 적대하는 것만이 아니다. 낯섦을 이해하는 다른 시각을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음을 <슬릿>은 보여준다. 설령 그 과정이 고통스럽고 지난한 주시를, 내 것이 아닌 감각을 필요로 할지라도, 밀어내지 않으려는 노력은 결코 허사가 아님을 알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