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매라는 원고지 안에서 독자를 깊숙한 공포로 몰아넣는다. 무섭다 못해 겁이 난다.
<페스트>가 디스토피아를 배경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하는 희망과 삶의 존속을 다뤘다면, <돼지는 네 발로 걷는다>는 희망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굶주림과 외로움 속, 현실인지 환상인지 모를 암담한 세상만이 남았다.
공포는 ‘그녀’가 네 발로 기어다닌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부터 시작된다.
주인공 ‘나’는 디스토피아의 도래로 허리를 피지 못해 사족보행을 하는 지금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이족보행을 할 수 있는 자신을 ‘인간’으로 칭하며 은근히 우월감을 가진다. ‘내가 만들어내는 것은 새로운 질서였다.’라는 독백과 ‘나’를 아래로 올려다보며 처한 상황에 비교적 무지한 그녀의 모습을 당연시 여기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에게 먹을 것을 주는 ‘나’만이 현실을 제대로 인지할 수 있고, 우위를 점한다 생각하는 것이다.
독백으로도 ‘그녀’라는 3인칭을 사용하며, 행동을 관찰한다. 두 인물의 사이 또한 애착관계라기보다는 ‘나’의 지루함을 달래줄 잠깐의 유희거리로써 함께 어울리는 아슬아슬한 관계로 보인다. 한쪽이 놓으면 언제든 끊어질 끈처럼.
하지만 그런 자신도 돼지였으며 사실은 모두가 돼지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심정은 어땠을까. 유일한 인간으로서 인간이 세상을 지배하는 유토피아라 믿었던 그곳이, 끝없는 어둠 속에서 같은 종족을 잡아먹기까지 하는 처절한 디스토피아임을 깨닫는 순간이다.
‘나’의 이성이 무너지고 배고픔이 극에 달했을 때의 후반부의 유혈 장면보다는, 점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기본적인 돼지의 모습에 부합해가는 ‘그녀’의 존재 자체가 가장 공포스러웠다. 화산 폭발,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위기와 전세계의 이상 현상, 얼음이 녹으며 무너져가는 생태계까지. 막연하게만 생각했던 이슈들이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려오며 섬뜩한 눈으로 현실을 이제 직시할 때가 됐다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이 작품조차 어쩌면 먼 훗날 주인공이 적기 시작한 기록일지도 모른다.
“오늘은 10월 3일. 개천절이야. 하늘이 열린 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