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홀로서기”인가? 주인공 윤정이 홀로 낳은 아이는 윤정의 의사와 관계없는 역할을 윤정에게 요구하며 윤정이 이해할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한다. 그러나 윤정의 아이가 외계에서 온 체인질링으로서 보여주는 가장 특이한 성질은 아이가 다만 윤정을 도관이나 요람처럼 택했다는 데 있고, 이 사실이 일반적인 부모자식 관계에서 나타나는, 선택의 여지 없는 유대와는 다른 관계를 상정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아이는 자신의 생물학적 발달이 허용하는 한계 안에서 최대한 능란하게 윤정과의 협상을 주도하려 한다. 이처럼 모자간의 관계에 외교적 태도를 개입시키는 모습은 낯설고 소름끼치는 것처럼 보이고, 일반적으로 상상되는 부모자식 관계로부터 윤정을 소외시킨다. 비록 자식과 함께 있는 윤정이 모성애에 대한 관념적 이해에 기대서 자기의 행동을 설명하려는 순간이나 관습적으로 기대되는 어머니의 역할을 수행하는 순간들이 소설 속에 묘사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서툰 역할극에 지나지 않고, 윤정은 아이의 존재로부터 유추되는, 자기가 길들어 있는 것과는 다른 계열의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것이 아이의 존재 그 자체에 대한 거부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윤정은 이 관계를 끊고 현실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자기의 목을 찌른다. „너 애미애비 없이 살 수 있는지 보자!“라는, 모체로서만 성립가능한 저주와 함께. 이질적 존재인 자식의 발생을 거부하며 저주를 남길 때 윤정은 역으로 자식으로부터의 단절을 확인하고, 윤정의 부재 상태를 감당해야 하는 아이는 지상의 세계와 무관한 존재로서, 자기의 진짜 뿌리와도 연결될 길을 영원히 잃어버린 채로 홀로 서 있다.
그런데 이것은 사실 특수한 사건이 아니다. 윤정 또한 윤정의 모친 또한 윤정과 자신 사이의 연결을, 그것도 윤정 쪽에서 가장 “간사”하고 피상적인 형태로 요구하는 연결마저 거부해버린다. 자식의 기괴한 발달 앞에서 “윤정이 해줘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라는 간단한 수긍은, 외계로부터 온 존재로서의 자식과 세계 내 존재로서의 모체 사이에 그 어떤 연관도 거부한다. 더군다나 그 외계 생명체를 비롯되게 한 것이 다름아닌 스스로의 몸 자체라면, 모체는 스스로의 신체마저도 낯선 것으로 경험해야 한다. 윤정이나 그 어머니가 그런 불화를 감당할 수 없는 것은, 그 자신으로서 갖는 동일성 내지는 통일성을 유지하고 “홀로 서”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독자들이 보는 것은, 자식과 무관할 뿐 아니라 자식에게 적대적인 존재로서만 스스로를 확인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증오를 품은 어머니이다. 윤정의 마지막 대사는, 기묘한 아이가 자식인 한에서 최대의 저주이자 위협이 된다. 자식으로서의 윤정이 윤정 모에게 이러한 성질을 물려받았는가 아닌가는 사실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낯선 존재에 대한 책임을 납득하지 못한 채로 떠맡은 개인과, 그 개인의 몸으로부터 나왔음에도 언캐니한 차이를 품은 타자라는 관계의 형식 자체가 불안과 공포를 생산한다. 이 불안과 공포에 대응할 방법은 윤정을 둘러싼 자식-부모 관계에서는 전혀 학습될 수가 없다. 윤정이 윤정 모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 있다면 그것은 단절뿐이고, 상호간의 무관함이 정말 “유산”으로 불리기에 적합한지는 아무래도 이론의 여지가 크다. 윤정이 그나마 집착에 유사한 태도를 보이는 전 남자친구는 윤정이 개인으로서 선택한 관계지만, 여기서도 상호간에 동등한 주체나 하다못해 애착을 품은 대상을 상대한다는 의식은 부재한다. 작품 내 세계에서 인물로 기능하는 존재들은 하나같이 홀로 서 있고, 그 홀로서기의 근간은 스스로에 대한 몰두와 타자에 대한 거부이며, 유의미한 상호관계를 지시하는 존재들은 하나같이 무대장치로서만 허용된다. 이처럼 각자가 스스로의 자아를 감당하는 데 벅차고, 모든 외부가 적대적으로만 다가오는 상황이 특수하지 않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익숙한 현실이 우리와는 전혀 다른 논리 위에 선, 낯선 체인질링들의 세계를 당혹에 빠뜨리고 공포에 질리게 한다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이 호러로서 성립하는 근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