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이라는 장소는 소설 안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한다. 고향을 향한 그리움을 자극하는 매개 또는 바쁜 일상에 지친 사람을 고즈넉하게 품어 주는 공간이 되기도 하고, 가을의 정취와 수확의 충만함을 알려주기도 한다. 도시에서의 힘든 삶을 뒤로 하고 시골에 가 몸과 마음의 휴식을 얻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만큼, 시골은 공백의 시간을 주는 곳이다. 〈리틀 포레스트〉처럼 여유와 낭만이 있는 마을의 정취를 보고 있자면, 절로 피로가 풀리고 당장이라도 이 복잡한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러나, 조금은 안타깝게도, 시골은 종종 이와 완전히 상반된 이미지로 그려지기도 한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제 시골이 조금씩 ‘미지의 공간’으로 변해가고 있기 때문이다. 외부인의 출입이 없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연쇄 살인, 새로운 정보에 익숙하지 않은 노인들을 대상으로 한 큰 규모의 사기,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산 분배로 떠들썩한 곳. 으스스한 공포 영화의 배경으로 시골 마을이 등장할 때 그곳은 분쟁과 반목의 공간이며 언제 무서운 사건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폐쇄적인 장소로서 변모한다.
물론 시골은 도시보다 인구 밀집도가 상대적으로 적고 기술적인 발전이 더뎌 방범에 취약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골에는 기술이 주는 안전을 능가할 만큼, 서로를 신뢰하는 공동체가 있다. 시골은 이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 양면의 얼굴을 지닌다. 누군가에게는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친밀함의 장소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과도한 관심과 불편한 사람들이 똘똘 뭉쳐 외부인을 속여먹을 생각만 하는, 또는 속여먹기 좋은 사람들의 모임이 된다.
실제로 시골에 살아본 사람들이 점점 줄어가고 있기에 시골의 이미지는 콘텐츠의 영향을 점점 많이 받고 있다. 그러나 문화 콘텐츠에서 규정하는 시골의 모습은 극히 제한적이다. 시골 또한 도시만큼 다종다양한 사람이 모여 산다. 조금은 닫혀 있고, 그들만의 신호가 있으며, 덜 발전했을 수 있지만, 사람 사는 모습이 다른 곳과 다르지는 않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을 몇몇 독자는 소설에서 ‘시골’이 배경이 될 때 그 ‘장소’의 기능을 유심히 살핀다. 또 ‘그렇고 그런’ 시골 중 하나가 배경일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정말 사실적인, 또는 완전히 새로운 공간으로서의 시골이 등장할 것인가.
치즈셀러 작가의 단편 〈앞뜰과 뒷동산에〉는 폐쇄적인 공간으로서 미스터리한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생하는 시골을 배경으로 한다. 여느 소설처럼 작은 시골 마을에 찾아온 외부인을 주인공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적당한 삶’의 스펙트럼이 이렇게 넓은 줄은 열아홉 살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보통의 삶을 살아온 그녀가 남편의 사업 때문에 이사하게 된 이 작은 마을은 뭔가 이상하다.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무례하고, 아이를 가진 여자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많으며, 심지어 그녀의 몸과 아기를 거리낌 없는 손길로 불쾌하게 만진다.
옆집과도 대화를 나누는 일이 드문 도시 사람들이 보기에 시골 사람들의 관심은 부담스럽다. 마을과 마을 끝으로 소문이 퍼지는 데에 하루가 걸리지 않는 시골 사람들이 보기에 도시 사람들은 지나치게 경계심이 많다. 마을의 테두리를 경계로 안과 밖을 나누는 사람들이 보기에 외지에서 갑자기 들어온 ‘나’의 가족이 마뜩잖았겠지만, 타인과 스스로 거리를 두고 예의와 범절을 깍듯이 배운 ‘나’가 보기에도 초면인 시골 사람들의 행동은 불쾌하기 그지없다.
하지만 모두가 무례하지만은 않다. 주인공 ‘나’에게 박 씨 아줌마는 그나마 나은 사람이었다. 불쑥 그녀의 가슴을 만지며 아기 젖 먹을 때를 가늠해 보거나 쓸데없게 도를 넘는 오지랖을 피우는 경우가 많아도, 가끔은 무례한 아이들에게서 쌍둥이를 구출하기도 하고 마을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줌마는 쌍둥이 엄마인 ‘나’를 진심으로 걱정한다. 그 마을에는 이상하게도 여자들의 수명이 짧기 때문이다. “내가 자네 이사 왔을 때부터 겁이 더럭 나더라고.” 그리고 박 씨 아줌마는 언니라고 불렀던, 한때 살아있던 아주머니들의 이름을 읊는다.
‘나’는 몰랐다. 암에 걸려 돌아가신 종분 아주머니도, 차 사고로 돌아가신 귀정, 화윤 아주머니도, 친구들을 잃은 슬픔에 술을 진탕 마시고 발을 헛디뎌 돌아가신 윤자 아주머니도, 그리고 마지막 박 씨 아주머니도. 모두 한 가지 이유로 죽은 것이라는 걸. 박 씨 아주머니는 그 아주머니들의 이름을 회령초 앞에서 하나씩 불렀다. 귀신을 부르는 나무라는 그것 앞에서 박 씨 아주머니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이게 다 이 재수 없는 나무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고.
그리고 며칠 뒤, 회령초 나무는 박 씨 아주머니의 목숨을 가져갔다.
어떤 여자들의 목숨
〈앞뜰과 뒷동산에〉는 기존 독자들에게 익숙한 장소로서의 시골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이다. 외지인으로서 견뎌야 하는 마을 사람들의 텃세, 그러다 감정의 골이 파이고 결국 외로움을 느끼는 주인공. 더군다나 서술자 ‘나’는 독박으로 육아하는 쌍둥이의 엄마이기도 하다. 여기서 작가는 두 가지의 선택을 할 수 있다. 하나는 이 주인공을 끝까지 고립시키는 것이다. 완전히 혼자가 된 주인공과 그의 가족은 이 마을에 적응하지 못하고 떠나버릴 수 있다. 다른 선택지는 마을 사람과 ‘나’의 가족을 중개할 수 있는 인물이 등장하는 것이다. 치즈셀러 작가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홀로 쌍둥이를 돌봐야 하는 ‘나’에게 손 내미는 사람을 보내기로 한다. 그가 바로 박 씨 아주머니다.
이 소설은 상투적인 시골 마을을 배경으로 해 초반에서 조금은 예상 가능하고도 안정적인 진행을 택한다. 사업 때문에 시골로 와야 했던 ‘나’의 가족에게 낯선 공간으로서의 시골 이미지는 기존의 추리 소설과 공포 문학 등에 등장했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곧 이 마을의 비밀과 미스터리가 밝혀지며 이야기가 주는 새로운 긴장감이 형성된다. 박 씨 아주머니는 ‘나’와의 친밀감이 어느 정도 형성된 이후, 이 마을의 여자들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러면서 ‘회령초’ 나무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회령초 나무 이야기는 기묘하다. 박 씨 아주머니는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는 전설이 진짜라고 강조한다. 이 나무는 소설 안에서 환상적이고도 좋은 중심 소재가 될 수 있다. 사람이 ‘살아 돌아온다’라는 소문을 믿고 일제강점기에 그 나무를 심은 청년, 하지만 오히려 청년의 죽음을 불러온 나무. 사람을 살리는 것보다는 죽이는 것이 어울리는 이 나무가 이미 명을 달리한 이들의 영혼을 불러온다고 박 씨 아주머니는 아직도 믿고 있다. 독자들은 이 나무가 소설 안에서 큰 역할을 하지 않을까, 하고 예상한다. 안 그래도 마을에는 ‘죽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넘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자의 예상과 조금 다르게, 이후 나무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대목은 거의 없다. 박 씨 아주머니가 그 나무를 굳게 믿고 있는 이유도 특별히 설명되지 않는다. 나무는 일시적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재에서 그치고 만다. 잠시의 등장 후 재사용되지 않는 나무가 조금 더 효과적으로 소설 내부에서 기능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나’는 소설 안에서 탐정처럼 행동한다. 여자들의 죽음에 관한 비밀을 파헤치고, 끝내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고 싶어 한다. 이런 ‘나’의 캐릭터를 고려해볼 때 이 나무가 ‘증인’의 역할을 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나’가 박 씨 아주머니의 말에 속는 셈 치고 회령초 나무에 기대어 쉬고 있는데, 나무에서 영혼의 소리가 들리는 것이다. 온 마을이 합심해 여자들을 죽인 이유, 보험금과 남자들의 탐심에 관한 한탄이 나무에서 신비스럽게 들려온다면 전설의 복선과 ‘나’의 캐릭터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다. 나무를 한순간 쓰고 마는 소재가 아닌 다층의 이야기를 갈라내기 위한 열쇠로 이용해 본다면 더욱 소설의 분위기를 새롭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이 단편에서 한 가지 더 보완되어야 하는 부분이 있다면 플롯의 단조로움이다. 이야기의 초반, ‘나’는 마을에서 여자들이 죽어 나가는 이유가 남편들이 보험금을 노려서가 아닐까, 라고 추측한다. 하지만 독자들은 이를 믿지 않는다. 통념상 추리 소설에는 한 번 이상의 반전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으며 ‘보험금’은 이미 익숙한 살해 동기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정직하게 ‘보험금’을 노린 남편들을 범인으로, 그들의 아내들을 피해자로 고정하는 구도를 취한다. 박 씨 아주머니와 마을 여자들을 죽인 범인을 찾아가는 중후반의 과정을 아래의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보자.
- 보험금을 노리고 남편들이 아내들을 살해했을 것이다.
- 하지만 범인으로 지목된 정육점 할아버지는 아주머니를 죽인 범인이 아닌 듯하다.
- 그러나 ‘나’가 바위 아래에서 아주머니의 두부(頭部)를 발견한다.
- 결국 범인은 보험금을 노린 정육점 할아버지였다.
- 모든 여자는 보험금을 노린 남편들에게 살해당했음이 밝혀진다.
작가는 어쩌면 1과 2, 2와 3 사이의 전환을 소설의 ‘반전’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 보면, 두 번의 반전이 일어난 플롯은 원상으로 복구된다는 것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반전이 두 번 발생하기 전과 후인 1과 5는 정확히 같은 내용이다. 즉, 이 소설에서는 반전이 발생하지 않았다. 만약 1과 2, 2와 3이 반전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둘 중 하나만 일어나야 한다.
먼저 1과 2가 반전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2와 3의 전환이 삭제되고 후반부의 수정이 진행되어야 한다. 즉, 범인이 정육점 할아버지나 여자들의 남편이 아님이 밝혀지면 된다. 흔한 레퍼토리인 ‘보험금’ 이야기가 사라지고 더 신선하고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인물이 범인으로 등장하는 것이다. 새로운 범인이 될 수 있는 인물은 많다. ‘나’의 남편, 제3의 외부인, 또는 탐정인 것처럼 행동하던 ‘나’, 이도 저도 아니면 여자들 스스로가 범인이라면 어떨까. 어떤 결말이든, 독자가 ‘예상할 수 없는 인물’이 범인이 되는 것이 중요하다.
2에서 3으로의 전환이 반전으로 남는 방법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1과 2가 삭제되고 소설의 전반부가 수정되어야 한다. 보험금도, 그것을 노린 남편들도 등장하면 안 된다. 이야기는 전혀 다른 사람을 범인으로 몰고 가야 하며, 마을에서 발견되는 모든 정황과 증거가 가리키는 건 완전히 다른 방향이어야 한다. 그러다가, 할아버지들과 보험금이, 아니 온 마을이 범인이었다는 것이 어느 순간 갑자기 밝혀지면 된다. 비록 보험금이라는 소재가 이미 독자에게 익숙하더라도, 그전의 이야기가 전혀 보험금을 암시하고 있지 않다면, 보통 이상의 반전으로 독자를 놀라게 할 수 있다.
내용을 꼼꼼히 읽었다면 알 수 있다시피 이 소설의 의미를 지키기 위해서는 ‘남성’이 범인인 편이 좋다. 남자들이 범인이 되는 길은 무수히 많다. 이 남자와 저 남자가 결탁하는 이유가 ‘돈’에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현실에서도 여자들은 다양한 이유로, 또는 이유 없이 죽는다. 작가는 이 점을 유념하며 남성들을 좀 더 신선한 범인으로 만들어 기존의 의미를 지키는 동시에 사회적인 메시지를 함께 담는 소설을 쓰기 위해 골몰해야 할 것이다.
‘죽음’은 한 사람의 생명이 지상에서 거둬지는 과정이다. 그가 땅에서 맺은 모든 관계와 시간, 결실과 과정이 더는 이어지지 않은 채 중단되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보다 ‘죽음’은 큰 사건이다. 그렇기에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죽음’이 소설에 등장할 때마다 조금은 무거운 마음으로 사람의 생이 헛되지 않도록 그것을 온전히 활용해야 한다. 이 소설은 마을에서 벌어진 여성들의 연쇄 사망 사건을 다룬다. 그들의 죽음이 가벼이 치부되지 않기 위해서 작가는 어떤 무게의 숙제를 남은 이들에게 지워야 할까. 확실히 벌을 받아야 할 사람과 그들의 범죄를 돕는 사람, 그러나 끝내 진실을 밝히는 사람. 누구 하나 자기 몫을 하지 못한다면, 여성들의 죽음은 그야말로 헛되고 만다.
폐쇄적인 마을과 그 마을에 전해 오는 나무의 전설, 그리고 원인 불명으로 연쇄 죽음을 맞는 여자들. 이 환상적이고도 한편으로는 지극히 사실적인 소재는 이야기의 분위기와 내용에 독자가 충분히 몰입할 수 있도록 한다. 외부에서 이주해 온 ‘나’라는 서술자, 그리고 그가 견뎌야 하는 괴이한 시골 마을에서의 시간은 어떤 소설의 배경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매력을 지닌다. 이미 충분히 기대하고 있는 독자에게 어떤 사건을 던져 줄지 정하는 것은 작가의 몫이다.
이 이야기가 가벼운 유희로 소비되지 않기를 바란다. 여자들의 목숨이 단지 돈과 맞바꿔진 것만은 아닐 수 있도록, 쌍둥이 엄마의 추리가 조금 더 정확한 진실을 향하고, 결말이 여자들의 손을 확실하고도 단단히 잡아줄 수 있도록, 그리고, 이 시골 마을의 사건이 비단 그곳만의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읽는 모두가 깨달을 수 있도록. 작가가, 또는 독자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독자가 함부로 예측하지 않도록 인물은 한발 미리 앞서 길을 걸어야 한다. 인물이 길을 잃지 않도록, 작가는 한발 미리 앞서 길을 닦아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누구도 방향을 잃지 않는 이야기가 완성된다. 작가가 걷는 길이 인물의 길이 되고, 인물이 걷는 길이 독자의 길이 된다. 신비롭지만 사연 많은, 잊히지 않아야 할 시골 마을에 당도한 독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은 누구인가. 외지인을 경계하고 두려워하거나, 그들을 순순히 반기거나, 무시하거나 무례히 대하는 사람들 모두, 반드시 존재할 만한 사람들이다.
어느 한 사람만으로, 어떤 하나의 이유만으로, 일관된 분위기만으로 형성되는 시골 마을은 없기에, 다양성을 겸비했을 이 동네의 속내를 풍성히 상상해 보며, 박 씨 아주머니를 비롯한 여자들의 목숨. 그들의 생이 겹겹이 싸인 이 마을에서 나가기 전, 마지막 한 발을 내디뎌 본다.
비명이 뒤통수를 때린다. 모두가 공모한 죽음이 내지르는 비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