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리뷰는 rynamo 작가의 장편 연재 《귀신 잡느라 연차 씁니다》의 36회차 연재분을 기준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어떤 인간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세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세상과 만물을 주관하는 어떤 힘이 있다고 믿었다. 이 믿음 중 일부는 다시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었고 그로부터 종교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인간은 우주를 모두 이해하기에는 너무 무지하다. 어쩌면 신을 만든 사람들은 이 진리를 이미 알고 있던 것 같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지금도 우리는 지구라는 행성조차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특정 데시벨 범위 이외는 듣지 못하고 육안이 받아들이는 가시광선 바깥의 영역은 아예 보지 못한다. 이렇게 좁은 감각으로 간신히 주변을 이해하며 사는 우리에게 감각 이외의 신비를 전해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하늘과 땅과 사람을 잇는다. 삼라만상의 이치를 인간에게 전하기도 한다. 종교에 따라 조금씩 이름은 다르지만 우리는 그것을 ‘무당’이라고 불러왔다. 무당은 아주 오래된 형태의 제사장이며, 신관이다. 그들은 과학자이기도 했으며 시인이자 철학자였다. 예언은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정확성을 중요시하기에 아주 과학적이어야만 했다. 점성술과 연금술에서 지금의 천문학과 화학의 기틀이 되는 이론이 발견되기도 했으니 이는 아주 틀린 말이 아니다. 물론 복채를 위해 가짜 무당 행세를 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말 그대로 ‘가짜’였으니 논외로 치기로 한다. 지금도 가짜 종교인은 널리고 널렸으며 우리에게는 그들에게 눈을 돌릴 만큼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그렇다면 이 무당은 어떤 사람들인가. 그 전에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나의 직업은 무당입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순간 상대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무당다움이 뭘까? 무당의 이미지는 대체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텔레비전에는 무당과 빙의, 신병, 퇴마와 관련된 오컬트 드라마나 영화가 쏟아진다. 사람들은 그 이미지에 열광하고 호기심을 가진다. 그래서인지 현실에서 무당을 만나도 ‘마법적인 존재’를 보는 듯 대한다. 아니면 ‘미신을 좇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천대한다. 숭배하거나 천대하거나. 모든 대상화된 존재가 마주하는 이중적인 얼굴이다.” 1
보편적으로 무당은 쉽사리 직업으로 여겨지지도 않는다. 대중매체는 종종 무당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다. 그러한 콘텐츠에서 무당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정면으로 산다. 잠깐, 나는 그런 것들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아마 함께 웃었을지도. 무당이란 다 저런 거지, 라고 생각했을지도.
이런 무당의 이미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소설이 있다. 사실 ‘도전’하고 있다고 하기에 이 소설 속 무당은 지극한 소시민이다. 귀신을 보아도, 알아도 그렇다고 말하지 못하는 이 사람은 평범한 회사원이다. 서고에서 들리는 방울 소리가 무서워 들어가지 않았다가 팀장에게 대차게 혼난 이 말단 사원은 귀신을 보고 있으니 분명 무당이다. 그러나 제목마저 가련한 《귀신 잡느라 연차 씁니다》 속 ‘나’는 내일 지구가 망한다는 걸 알아도 오늘 출근해야 하는 처지이기도 하다. 끔찍한 것들을 보면서도 목숨보다 팀장의 명령을 귀하게 여기며 그에 복종해야 하는 직원 세인은 할머니 마사란의 장례식에서 처음 귀신을 본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그 귀신에게 자신을 허락하고 만다.
세인이 귀신을 보는 과정과 이계에 불려가는 모든 과정에는 독자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만한 ‘무당 입문 의례’, 그러니까 홍칼리의 말을 빌리자면 빙의나 신병 같은 것은 보이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 소설은 판타지 신화 소설의 도입부처럼 일반적인 인물이 이계의 존재들을 맞닥뜨리며 시작한다. 이 접촉은 꽤 신비스럽다. 그러나 어느 순간 SF로 탈바꿈한다. 기술이 발달하여 웨어러블 기기가 본격적으로 일상화된 세인의 시대에는 마치 일상이 게임처럼 묘사된다. ‘귀신 잡느라’ 연차를 쓰는 건 회사원이지만 그의 앞에 놓인 모든 퇴마의 과정은 게임과 같다. 스킬이 열리고 기밀이 풀리고, 아이템을 얻는다. 모든 무당이 이런 식으로 귀신을 잡는다면 머지 않아 프로게이머보다 인기 직종이 되겠지만, 이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다.
그리하여 이 환상적이고도 지극히 기술적이며, 신화적인 한편 현실적인 퇴마록의 서두에서 졸지에 무당이 되어 버린 주인공 세인의 이야기를 읽어야만 하는 이유를 몇 가지 살피고자 한다. 물론, 모든 이유의 가장 앞에 오는 건 세인이 연차를 내고서까지 귀신을 잡으러 갔다는 데에 있겠지만. (회사원은 연차를 아무 때나 쓰지 않는다)
1. 게임판타지? 아닌데요 퇴마록인데요
이 소설은 한 인물의 성장 서사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인공이 신묘한 힘을 지녔던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귀신을 보았다는 것부터가 그러하다. 현대적 성장 서사에서 게임 속 판타지는 크게 인기를 얻는다. 꼭 ‘게임’이 직접 요소로 등장하지 않더라도 갇힌 건물에서 탈출하거나 특정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여정 등은 놀이로서의 게임을 포함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오래 사랑받아온 신화나 전설, 민담 속의 모험 서사가 게임 내부에서 차용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주객의 순서에는 맞을 것이다.
《귀신 잡느라 연차 씁니다》는 SF 소재를 활용해 일상으로 게임을 끌어온다. 귀걸이 형태를 한 웨어러블 기기, 홀로그램의 상용화는 이 소설의 배경이 먼 미래임을 보여주는 동시에 가상현실 내지는 증강현실이 통상적으로 쓰이는 사회적 분위기를 내포한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은 모두 ‘실제’가 아니며 이는 우리 일반적으로 눈에 보이지 않는 귀신과 시각적으로 밀접한 연관을 맺는다. 게임은 본래 가상이며 (웨어러블 기기 또는 VR 기기를 착용하더라도) 현실에 무언가를 덧씌운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 디지털 세계에 존재하는 공간과 시간, 인물과 캐릭터이기도 하다. 이 묘한 경계성은 귀신, 더 나아가 ‘귀신 이야기’와 형태 면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물론 귀신이 실제로 존재하는가를 믿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러나 최소한 누군가는 물리적인 힘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영향을 받는다. 그들의 말을 들어보면 모두 거짓이나 환상은 아닌 것 같다. 이런 재미난 이야기를 하나 또는 두 개쯤 실제라고 믿더라도 사는 데에 큰 문제는 되지 않으며 오히려 때때로 약간의 스릴과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이런 스릴과 재미는 우리가 게임을 하면서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말마따나 신격화 되어 있던, 쉽게 평범함을 얻지 못하고 대상화되던 귀신과 퇴마가 게임 속으로 들어오는 순간 진입 장벽은 크게 허물어진다.
《귀신 잡느라 연차 씁니다》 속 ‘퇴마 게임’의 층위는 꽤 다양하다. 큰 틀 안에서 에피소드 형식으로 이어지는 각 소재가 퀘스트(quest) 형식으로 제시되어 독자들 내면의 의문(question)을 끊임없이 불러낸다. 이 미션과 저 미션의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종국에 우리의 주인공은 어떤 성장을 이룰 것인가’보다는 눈앞의 미션을 단발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훨씬 재미있지 않은가.
소설 속 표현을 빌리자면 ”젊은 K-직장인에게 게임은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고 ”다 끝맺지 못한 것을 끝맺게 해주는 것“이 업을 푼다는 의미이다. 젊거나 나이가 많거나 회사에 가거나 가지 않거나 이 소설의 독자는 거의 K-직장인이다. 신자본주의에 속한 모두는 저마다의 작은 직장에 속해 있지 않은가. 직장인에게 업보란 일상과 같으며 연자매 돌리는 심정으로 이것을 힘들여 곱게 빻아간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이들에게 단발적이고 즉각적인 보상을 주는 퀘스트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그러니 우리 한번 가상의 웨어러블 기기를 착용하고 주인공 세인을 따가 퀘스트 창을 켜보자. 그 안에는 귀신들에게 의뢰받은 것들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 전에 생각해볼 것이 있다. 귀신은 인간보다 자유롭다. 물리 법칙에 얽매이지 않고 공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때로는 시간도 초월한다. 인간에게 불가사의한 현상을 만드는 건 예삿일이고, 단순히 등장만으로도 뭇사람을 기절시킬 수 있다. 그런 그들이 왜 인간에게, 그것도 하잘것없는 K-직장인에게 자신의 원한을 풀어달라 애원하는 걸까.
2.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건 바로 주인공 세인에게 ‘귀신을 보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능력 많은 귀신에게 딱 한 가지 불가능한 것이 있다면 보통 사람들과의 소통이다. 물론 그들의 앞에 딱 나타나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하려는 귀신도 있다. 그러나 보통의 사람이 귀신을 본다면 기절하거나 도망친다. 원한이 남아 구천을 떠돌지만,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이가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귀신이다. 그런데 그런 귀신과 대화가 되는 사람이 종종 있기도 하다. 워낙 그런 방면에 타고나 귀신을 봐도 놀라지 않고 그들에게 인간과의 소통이 가능하도록 몸을 매개로 제공하기도 한다. 이렇게 고마울 데가. 귀신으로서는 그들에게 구구절절 무언가를 부탁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들에게는 어떤 사연이 있을까. 영매가 가장 훌륭한 이야기꾼일 수 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귀신에게는 ‘원한’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겹겹이 쌓인 한과 슬픔은 그것이 깃든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퇴마와 구마를 소재로 한 콘텐츠가 대중에게 사랑받는 가장 큰 까닭도 바로 이 ‘원한’에 있다. 구천을 떠도는 귀신들에게는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그들은 억울하게 죽었거나 생전 완성하지 못한 과제가 있으며 그것을 ‘아직 살아있는’ 인간의 몸을 입거나 이용해 해결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귀신들은 종종 본인 문제 해결의 과정에서 인간계에 수상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를 눈치챈 사람들이 구마사나 퇴마사를 부르고 귀신과의 접촉을 통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원한을 해소하는 결말은 익숙하다. 따지고 들어가면 남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것은, 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 이런 유의 스토리텔링에 우리는 왜 열광할까.
그것은 ‘남’의 이야기가 ‘나’의 것으로 공감되는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의 원한은 독립적이지 않다. 그 원한에는 반드시 연관된 사람이 있고, 사건이 있다. 이렇게 관계 안에서 발생한 억울함은 넓은 스펙트럼의 인간상을 포함한 ‘이야기’가 된다. 남의 원한을 해결하는 과정을 보며 독자는 (또는 관객은, 시청자는) 어느새 자신을 그 이야기의 누군가에 대입한다. 대체로 그 자신은 억울한 쪽이며, 귀신의 입장이다. 어, 맞아. 나도 저런 일이 있었는데. 고개를 쭉 빼고 저도 모르게 집중하던 독자는 서사의 고점, 또는 결말에서 무릎을 친다. 그래, 저 놈은 저런 벌을 받았어야 했어. 나에게도 저런 일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통쾌함 내지는 위로가 이야기의 향유자에게 닿을 때, 그것은 비로소 완성된다.
구마와 퇴마, 귀신의 서사는 예로부터 굳은 원한을 품고 있었다. 그 결을 매만질 수 있는 사람에게 언젠가는 닿기 위하여. 그런 의미에서 《귀신 잡느라 연차 씁니다》의 새우니 에피소드(〈너의 방울 소리가 들려〉)는 도입부에 배치되어 독자를 주목시키기에 좋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른 어떤 민담보다 ‘새우니’ 이야기는 생소하지만 참혹하다. 신력이 떨어진 무당이 어린아이를 감금해 목숨만 연명시키다가 새장에 가두어 죽인다. 그럼 그 어린아이의 영혼은 무당에게 영원히 속박되어 점괘를 봐주는 귀신이 된다. 이 잔인하고 끔찍하며 한편으로는 한없이 슬픈 영혼의 전사를 들으며 주인공 세인은 묘한 동질감을 느낀다. 그는 아무도 도와준 이 없이 고독하게 죽어간 새우니를 자신의 어린 시절과 겹쳐 본다. 그리고 독자는 세인에게 자신을 이입한다.
세인이 새우니에게서 느낀 감정은 지독한 외로움이었다. 부모에게 버림받아 무당에게 넘겨진 후, 새장에 들어가 제 발로 죽음을 맞았다. 이 정도의 불행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누군가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홀로 남겨진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나의 억울함을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고, 구원받을 방법이라곤 하나 없으리라 생각하던 때가 모두에게 있다. 새우니 에피소드는 독자들의 고독을 자극한다. 동시에 새우니에게 손을 내미는 세인을 구원자로 인식하게끔 한다. 나에게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생각은 하나의 위로가 된다. 틀림없이 새우니에게 손을 내민 세인도 그로 인해 자신의 과거를 조금은 달랠 수 있지 않았을까.
세인은 귀신의 세계에 얽혀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퀘스트와 미션을 받을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얼마나 더 많은 귀신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서 그에게 다가올까. 그리고 베일에 싸인 뫼호국에서 세인은 어떤 위치를 획득하게 될까. 잠시 잊고 있었지만, 세인은 현실 속 회사와 그 안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인물로 남게 될까. 이런저런 의문이 꼬리를 문다는 것은, 이 소설이 썩 괜찮게 출발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의문을 잘 해결하기만 한다면, 모든 의문의 끝에 궁극적인 하나의 답만 남을 수 있다면, 독자들은 그 여정을 매우 기쁘게 따를 것이다.
맺으며
귀신과 퇴마를 주제로 다양한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미래의 공간을 선택한 이 소설이 어디로 나아갈지 궁금해진다. 아직은 지나온 곳보다 걸어갈 곳이 많은 장편의 도입에 이토록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놀라면서도, 서사의 진행과 문장의 속도감, 사건이 내포하는 메시지를 생각하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지금,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장편의 도입에 서서 작가만 아는 다음 발걸음을 가늠해 본다. 원한과 눈물을 꼼꼼히 찾는 작가의 마음에 슬쩍 기대어 그대들의 슬픔에 공감해본다.
귀신이 보기 싫어 제자리에서 발만 동동거리던 평범한 회사원 세인을 건져 올려 미래의 어엿한 무인(巫人)을 만들기까지 작가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문제(questions)를 해결할까. 그리고 세인은 얼마나 성장해 있을까. 온통 노랫말이 제목인 이 이야기를 읽고 있자면 즐거운 가락이 하늘하늘 날아가는 기분이다. 모쪼록 그 길이 평탄하지 않더라도,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여정이 되기를. 그리하여 숨겨져 있던 모두의 원한이 바람에 날아갈 한 줌의 재처럼 가벼워지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