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는 두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미지의 존재인 ‘고도’를 기다리는 상황을 배경으로 한다.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나누는 두 사람의 대화는 독자에게 흥미로운 의문을 던진다. 언뜻 듣기에 그 대화는 말이 되지 않는 것 같기 때문이다. 또한 “시골길,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1로 시작되는 이 희곡에서 분명하게 제시되는 정보값은 아무것도 없다. 주인공의 이름과 그들이 기다리는 ‘고도’라는 존재 이외에는 장소와 시간, 주변 상황에 관한 묘사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둘은 횡설수설하거나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말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둘은 분명히 자신들이 고도를 기다리고 있음을 인지한다. “늘 마지막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거지”, “기다리는 거지”, “기다리는 거야 버릇이 돼 있으니까”, “기다리는 동안 뭘 하느냐고?” 등으로 ‘기다림’의 행위가 희곡 전반에 암시된다. 소설의 중반쯤 고도에 관한 인물(소년)이 겨우 등장하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이런 대화를 주고받을 뿐이다
블라디미르 : 넌 고도 씨 밑에서 일하고 있냐?
소년 : 네.
블라디미르 : 그래, 무슨 일을 하지?
소년 : 염소를 지켜요.
블라디미르 : 고도 씨는 너한테 잘해주냐?
소년 : 네.
소년의 말에서 유일하게 ‘고도’를 언급하는 부분은 “고도 씨가 오늘 밤엔 못 오고 내일은 꼭 오겠다고 전하랬어요”라는 대목이다. 그 외에는 고도가 소년을 잘 대해주는지, 소년의 가족관계는 어떤지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이렇게 한정된 정보를 주고받음에도 소년과 블라디미르, 에스트라공은 서로를 아주 잘 아는 듯한 눈치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가장 독특해 보이는 특징은 인물의 대화가 긴밀하게 연결되는 것 같으면서도 (심지어 그 안에 많은 정보를 담을 것 같으면서도) 정작 중요한 내용은 모두 피해가고 있다는 데에 있다. 분명히 고도가 올 것 같은 분위기가 형성되지만 그가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결국 고도는 오지 않는다. 이 희곡이 끝날 때까지 고도는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때문에 혹자는 고도가 ‘인간세’에 등장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그를 불멸자나 신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이 파격적인 결말이 공연 당시에는 큰 파장을 몰고 왔다고 한다. 무엇도 완성되지 않는 마무리가 당대의 관객에게 깔끔하지 못하게 여겨졌으리라. 지금도 이러한 맺음을 시원찮게 여기는 독자들이 분명히 있다. “다음 날, 디디와 고고는 고도를 만났고 셋이서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라는 결말을 바라는 이들 말이다.
사선 작가의 단편 〈스모르찬도〉에 등장하는 류보는 이런 사람이다. 그는 이 작품의 결말을 몹시 언짢아한다. 『고도를 기다리며』가 희곡인지 소설인지, 그 안에 나오는 사람이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인지 고고와 디디2인지 그에게는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류보는 베케트의 인물들과 조금 닮아 있다. 작가가 ‘부조리극’을 연출하고자 시도했다면 그에도 제법 어울리는 사람이다. “하루에 적어도 세 번 거짓말하지 않으면 혀에 가시가 돋”거나 “거짓말은 악용되어서는 안 된다”라고 늘상 주장하는 그는 사사건건 가볍게 부딪히는 모리와 함께 길을 가고 있다. 그들은 “의미 지연 현상”을 탐색하기 위해 숲을 찾았다. 베케트의 희곡에서 고도가 등장하지 않은 것처럼, 그들의 세상에도 의미 지연 현상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잖아. 고도의 도착이 영원히 지연된 거니까”
류보의 말대로 고도가 나타나는 사건은 희곡 안에서 영원히 지연되어 있다. 작가가 결심한 이상 아마 고도는 등장하지 않을 것이다. 영원 같은 시간을 기다리더라도 고도는 이미 나타나지 않기로 작정했기 때문이다. 〈스모르찬도〉의 초반 구성은 류보와 모리의 대화로 이루어진다. 이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미리 읽은 독자가 있다면 낯설지 않은 구성이다. 장소와 시간에 대한 묘사를 최소화한 두 주인공의 대화 구성은 마치 이 소설을 희곡처럼 보이게 한다. “산은 무슨. 여기는 언덕도 아니에요”라는 말을 통해 둘이 있는 장소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있던 언덕과 비슷한 이미지를 형성한다. 블라디미르는 “우리가 있는 곳이 언덕 위니까 우린 결국 쟁반 위에 올려진 꼴이지”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류보와 모리의 기이한 대화는 크게 ‘거짓말’과 ‘바람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거짓말’과 ‘바람벽’은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정보를 준다. 둘 이외의 인간이라고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이 소설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대화를 보며 독자는 거짓말과 의미 지연의 세상에 빠져든다. 마치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듯 생생하고 속도감 있는 대화는 두 사람이 어떤 진실도 말하고 있지 않다는 듯 이어지지만, 한편 생각해보면 둘의 말이 모두 사실이지 않으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 안에서 하나 확실한 건 이들이 사는 세계에 ‘의미 지연’이라는 현상이 발생하는 장소가 있으며 그곳은 확대되고 있다는 점이다. 바람벽 너머에는 의미가 지연되는 커다란 숲이 있다. 그들은 어떤 신호를 감지해 이곳에 왔지만, 그 신호는 유령 같은 사람들의 목소리처럼 들린다.
류보는 의미 지연이 한 괴물 때문이라고 한다. “숲 위의 허공을 넘나드는 전파에 담긴 수많은 정보와 숲을 횡단하고 개발하려는 인간들의 목소리”를 들은 그 괴물은 정보를 먹어치우기 시작한다. 이 괴물은 둘의 대화에서 유일하게 뚜렷한 이미지와 사실성을 획득한다. 종교 재판과 거짓말에 대한 난상들은 그것 자체가 거짓말이리라는 느낌으로 흘러가지만 이 괴물의 형상만은 머리에서 쉽게 떠나지 않는다. 바람벽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실상은 밝혀지지 않았음에도 ‘괴물’이 있지 않을까 하는 추측은 사실처럼 느껴진다. 세계의 의미 지연이 하나의 괴물을 통해 시작되었으리라는 류보의 말장난 역시 이번에는 진지하게 들린다. 둘은 의미 지연 현상을 찾기 위해 계속 나아가고 어느 순간부터 둘의 대화는 끝난다.
그 대화와 모리의 현재 상황 사이에는 커다란 의미 단층이 존재한다. 과거와 현재를 나누는 경계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등장한다. 독자는 작가가 양자적인 시간을 다루고자 했으리라는 추측을 충분히 할 수 있다. 의미 지연 현상은 시간의 속도를 다루는 것이기에 물리학도인 모리와 류보가 등장한 것도 적절한 설정이다. 이후 이어지는 모리의 현재 상황은 류보와 대화를 나눈 때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후다. 류보와 함께 했던 시간을 회상하며 모리는 고양이에게 말을 건다. 얼마나 길게 모리가 살아남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류보와의 대화로부터 일기장을 몇 년간 돌아보지 않을 만큼의 충분한 시간이 흐른 뒤다. 여기에서 모리는 류보와의 시간을 회상하다가 총을 꺼내 턱에 쏜다.
이후로 모리의 입을 통해 꽤 긴 시간 진술되는 과거의 이야기는 ‘의미 지연’이 전쟁과 관련있으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류보의 ‘괴물 이론’이 맞아 떨어진다는 듯 괴물처럼 변한 인간들은 서로를 죽이고 죽는다. 이 회상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고양이는 모리의 살점을 뜯고 제 갈길을 간다. 어떤 거대하고 참혹한 일이 인간세에 벌어지든 자기 갈 길을 가는 시간과 고양이의 초연한 움직임은 어딘지 닮은 데가 있다. 작가는 모리를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거짓말을 하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다는 류보가 ‘괴물’을 말할 때는 짐짓 사실적인 말투를 취한 데서 그 답을 어느 정도 찾을 수 있다. ‘괴물’은 인간이며 그 인간이 방사한 수많은 정보와 폭력적인 목소리가 그것을 만들었다. 인간은 결국 전쟁을 하기에 이르렀으며 전쟁을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음에도 그것 또한 의미 지연 속에서 간헐적으로 들리는 신호가 되었다.
하지만 이런 장면과 의미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 이유는 양자화된 시간 때문이다. 어떤 과학자의 실험처럼 그 시간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일이 다른 이에게는 미래의 사건이 될 수 있으며 시간과 공간이란 지연될 수도, 예상보다 빠르게 찾아올 수도 있다. 사선 작가는 이 시간의 흐름을 공간으로 적절히 옮겨와 ‘의미 지연’ 현상을 만들었으며 그 안에서 어떤 의미를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했다. 부조리극이라는 장르 또한 이 소설에 가미가 되었지만, 이 모든 상황 맥락이 하나로 모이는 접점은 어디일까. 궁극적인 메시지 한 줄이 이 소설에 남아야 한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아예 이 세상 전체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그래요?”
서두에 언급한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베케트는 중요한 어떤 것의 정보값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희곡 속 인물과 시간, 배경은 흔들리지 않고 독자에게 다가왔다. 주인공인 ‘그들’이 실제로는 누구를 의미하는지 모르겠으나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다. 그들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그들은 언덕에 서 있다’. 그들이 어떤 시간을 보내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 이야기 안에서 ‘정보값이 없는 것’과 ‘모호한 서술’은 명백히 구분되어야 한다는 듯 베케트는 어떤 불분명한 서술도 없이 정보값 없는 대화를 이어나간다. 〈스모르찬도〉 역시 이런 서술을 시도한 것처럼 보인다. 소설의 모든 상황이 효과적으로 몽환적이고 서정적인 이미지를 획득하기는 했으나 그 배경과 농담과 거짓말이 소설 안에서 정확히 어느 위치에 있는지, 그것을 통해 독자는 무엇을 얻어야 하는지가 흔들리고 있다. 분명 주인공과 가장 친한 사람이 죽었고, 그로부터 시간이 흘렀으며 ‘시간 지연’이라는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 단편적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그것이 형성하는 하나의 커다란 맥락을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그 이유는 짧은 분량 안에 다양한 이미지와 심상, 시간대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양자화된 시간’이라는 설정이 있기는 하지만 모리가 통과하는 시간, 그가 회상하는 시간은 하나의 큰 틀로 명확히 정리되지 않는다. 심지어 주인공인 모리는 류보를 떠올리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소설 안에서 누군가의 죽음은 그 자체로 큰 사건이다. 하물며 주인공이 죽은 이 장면이 표징하는 의미는 분명하고 확실해야 한다. 그러나 소설을 읽은 후 독자의 마음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작가는 모리의 죽음을 통해 무슨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걸까. 독자들은 정확히 무엇이 모리의 죽음을 촉발했는지 불확실한 감정으로 추측할 수밖에 없다. 어떤 강렬하고 신비한 사건과 현상이 연달아 이어지는 것과 그에 따른 의미 내지는 깨달음이 형성되는 것은 조금 다른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 속 장면들이 완전히 단편적이고 분절되어 있느냐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개별의 장면은 독자에게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고 읽는 데에 재미를 준다. 〈스모르찬도〉는 인물 특유의 말장난과 결합되는 환상적인 설정이 분명히 더 큰 빛을 발할 수 있는 소설이다. 작가가 소설의 서두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언급한 것은 영리한 선택이었다. 그 희곡에서 이 소설의 영감을 받았는지는 분명히 알 수 없지만 『고도를 기다리며』와 〈스모르찬도〉는 분명한 접점이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부조리’와 ‘부조화’는 다른 단어다. 극단적인 표현이 될 수는 있겠지만 이 소설은 부조리로 향하는 부조화다. 완전한 부조리가 되기 위해서는 조화롭지 못한 요소를 끊어내야 한다. 이 소설에는 장면이 넘치도록 갖춰져 있다. 작가는 소설을 좀 더 느슨하게 구성하는 동시에 개별의 장면을 관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의미 요소만 만들면 된다. 그 의미는 개별 장면을 하나의 시간선에 정리할 수 있어야 하며, 좀 더 명확한 사건들 사이를 독자가 넘나들게 하는 통로 역할을 해야 한다. 소설의 밀도를 분량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의미는 어디에서 뽑아낼 수 있을까. 작가와 독자는 가장 처음, 류보와 모리의 대화를 주목해야 한다. 여기서 둘은 그들이 속한 세계를 통찰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의미를 형성한다. 여기서 가장 직관적이고 ‘의미’ 있는 말을 꼽아보자면 “아예 이 세상 전체가 거짓말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그래요?”라는 모리의 말이다. 둘은 ‘거짓말’을 주제로 대화하고 있으며 이 세상은 ‘거짓말’처럼 지연되고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극은 어느 정도 이 세상이 거짓말이라는 가정 하에 진행되는 면도 있으니 ‘거짓말’이라는 주제로 이 소설을 크게 묶어보면 어떨까.
류보가 살아있던 것도, 그들이 함께 했던 것도, 한때 나누었던 대화도, 그들이 연구하던 무언가도 전부 전쟁을 통해 거짓말처럼 사라져버렸다면. 의미 지연 현상이 그 모든 걸 거짓말처럼 흐리게 만들었다면. 숲을 통과해 나오는 류보의 목소리를 들으며 모리는 형용할 수 없는 허무함에 빠지지 않았을까. 그리하여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물론 이것은 독자로서 의미를 형성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상상한 하나의 가정일 뿐이다. 작가에게는 이 소설을 구상하는 데에 영감을 준 메시지가 분명히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서는 그 ‘메시지’를 소설 안에 좀 더 과감하게, 마음껏 드러내도 될 듯하다. 하나의 인물과 사건이 매끄럽게 연결되기 위해서는 작가의 머리에만 자리잡은 ‘어떤 이미지’가 독자에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환상적인 세계와 의미 지연 현상, 류보와 모리가 비로소 하나의 ‘의미’로 연결되어 지연되지 않은 채 독자에게 닿을 수 있지 않을까.
맺으며
좋은 소설은 여운을 남기고 여운은 활자를 남긴다. 속절없이 길어지는 글을 마무리하며 아직도 더 말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스모르찬도〉가 가진 ‘힘’이다. 이 소설은 ‘거짓말’에 대한 작가의 독특한 관점과 ‘의미 지연’이라는 현상을 창조해낸 신선함만으로도 독자를 끝까지 이끄는 힘을 보여주었다. 사무엘 베케트는 부조리극이 어렵게 비비 꼬아 놓은 문장이 아닌 간단하고 명쾌한 상황 설정과 어떤 결말의 지연만으로도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속도감 있는 문장의 희곡으로 보여주었다. 〈스모르찬도〉 역시 부조리극이라는 커다란 장르 안에 좀 더 편안히 몸을 누인다면 충분히 하나의 힘을 가질 수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은 희곡 하나의 재창작으로도, 그 자체의 작품성으로도 인정 받을 수 있다. 한 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도달해야 하지만 아직 오지 않은 어떤 ‘의미’가 이제는 독자들에게 와닿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글을 맺어야 하는 이 시점에서 류보가 『고도를 기다리며』의 결말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을까, 라는 의문을 갖게 된다. 그것이 좋건 싫건 그는 의미 지연을 연구하고자 동료와 함께 길을 떠났고 의미 지연이 지배하는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류보는 ‘의미 지연’만이 가득한 세상에서 읽은 하나의 희곡에서조차 무엇이 ‘지연’되고 있음이 불편했던 게 아니었을까. 베케트의 희곡에서부터 뻗어 나온 이 소설은 독자에게 다양한 상상을 가능케 한다. 그것이 부조리가 가진 힘이며 소설 속 세상을 움직이는 ‘의미’의 힘이라라.
비록 그것이 도착하는 데에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염없이 기다리게 된다.
그래야만 언젠가 도착할 의미들의 목소리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