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년 간의 팬데믹은 우리에게 질병과 바이러스의 유행에서 자유로울 수 없음을 깨우쳐 주었다. 잠깐 유행 후 사라질 줄 알았던 하나의 바이러스는 수십 수백 갈래로 분화해 전세계에 퍼졌고 지금까지도 인간을 위협하고 있다. 범지구적으로 영향을 미친 신종 돌림병은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이전에 겪지 못한 새로운 질병이 나타나는 주기가 짧아지고 있으며 치명률이 높아지는 한편, 유행하는 기간 역시 길어지고 있다.
질병의 유행과 같은 하나의 사회적 사건은 사람들의 머리에 각인을 남긴다. 그것은 강렬할수록, 오랜 기간 이어질수록 더 많은 이에게 길게 기억된다. 기억은 기록이 되기에 사건이 문학으로 남는 것은 필연적이다. 팬데믹의 장기화에 따라 바이러스, 또는 질병의 유행을 다룬 소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누군가는 질병으로 고통을 받지만 그 아픔 또한 기억되어야 하는 것이기에 작가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코로나를 기록한다. 무한히 많은 장르에서 쏟아지는 팬데믹 소설을 바라보는 독자의 시선 또한 다양하다. 그렇기에 크고 작은 고통이 진행형인 지금, 가공의 세계를 설정해 질병을 다루는 데에는 이전과 다른 감수성이 필요하다. 이런 문학의 창작을 긍정적으로 보든, 비판적으로 보든 한 가지 확실한 건 질병에 관한 소설이 그치지 않고 향후 수 년간 활발히 창작될 것이라는 점이다.
전술한 상황 속에 장아미 작가의 단편이 〈푸른 신명(神命)〉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나왔다. 우리는 이 소설의 등장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그저 다른 팬데믹 서사와 같은 위치에 이 단편을 두고 ‘예상 가능하다’는 시선으로 읽어야 할까. 그렇지는 않다. 사실 그런 행동은 매우 위험하다. 팬데믹 소설뿐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사회적 유행을 담은 소설이 창작되어 나올 때 독자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특정 테마를 다룬 스토리텔링의 범람 속에서 하나의 경향으로 작품을 일반화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섣불리 ‘다 알고 있다는 듯’ 팬데믹 소설을 대하면 안 된다. 그 안에서도 작가의 의도에 따라 세밀하게 갈라지는 이야기의 유형이 있다.
장아미 작가는 세분화된 팬데믹 소설에서 특수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주제를 발빠르게 파악했다. ‘자연과 인간의 대립’이 바로 그것이다. ‘자연을 파괴하는 인간’이라는 주제를 비롯한 소위 자연주의는 인간의 잘못으로 인한 세계의 파국을 늘 경고해 왔다. 바이러스의 유행을 기해 일회용품의 사용이 폭발적으로 늘고 환경 오염이 극에 달할 것이라는 전망의 속에서 환경 단체와 운동가들이 분투하고 있다. 이는 언제나 경고되어 왔던 바로 그 상황이다. 지금 우리는 종말의 기로에 서 있다. 하지만 이런 주제 역시 과거로부터 많이 다루어지지 않았는가. 작가는 여기에서 새로움을 꾀한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과거로 설정한 것이다. 바로 지금, 현실을 다룬 이야기는 독자들이 받아들이기에 자극적이고 직관적일 수 있으나 과거에 현재를 빗대는 작업은 이 자극성을 조금 중화한다.
그리하여 비유적이고 상징적이며 암시적인 하나의 소설이 탄생했다. 〈푸른 신명〉은 어느 팬데믹 소설과도 동일하지 않다. 여기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작가의 세심한 설정이다. 장아미 작가는 질병을 단순히 인간의 이기심으로 치환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는다. 질병이 ‘이기심’의 결과물이 될 때 수많은 감염자의 고통은 무시되기 쉽다. 작가는 팬데믹 소설에서 가장 자주 발생하는 의미의 오류를 능숙하게 피해간다. 그러니 우리는 조금 특수한 시선으로, 그러나 약간은 편안한 마음으로 이 단편에 귀기울일 준비만 하면 된다.
인간의 이기심과 질병마저 푸르게 감싸는 하나의 신명이 정체불명의 산에서 우리를 부르고 있다.
아픔으로부터의 도피
“그 병에는 이름이 붙여지지 않았다”.
〈푸른 신명〉의 전반부는 돌림병이 도는 마을에서 벗어나는 경아와 그의 오라버니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무명의 병에 죽어간 수많은 사람, 그 안에 속해버린 경아의 아버지와 어머니. 대피하지 않으면 위험을 면할 수 없는 마을에서 오라버니는 경아와 도망치기로 작정한다. 마을이 황폐해지고 삶의 터전이던 집은 목숨을 위협하는 장소가 되었다. 어느 곳도 안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들리는 것은 외마디 비명이다. “내 몸에서 나가! 나가라고!” 이 병에 걸리면 무언가가 신체를 점령하는 듯하다. 사람들은 몸안에 똬리를 튼 그것을 두려워한다. 여기에서 질병은 인간을 위협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한 것처럼 보인다. 산으로 경아와 오라버니를 내쫓는 듯한 병의 유행에 안전함은 어디에도 없다.
독자의 눈에 띄는 것은 경아의 아버지가 저지른 실수다. 어머니의 시신을 불태워야 한다고 주장한 오라버니의 의견은 극단적이었지만, 냉정하게 판단한다면 그렇게 했어야 한다. 격리 시설이 없었을 과거에는 병원체가 들끓는 감염자의 시체를 태우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방역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경아의 아버지는 인륜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며 오라버니의 말을 듣지 않는다. 결국 질병 유행의 초기대처에 미흡했던 아버지로 인해 무고한 분이가 죽는다. 소설 속 돌림병은 분이에게서 시작된다. 하지만 병이 돌게 된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분이가 아닌 경아의 아버지에게 있다. 아버지도 병에 걸려 돌아가시는 비극을 맞은 후에야 경아의 오라버니는 산으로 떠날 채비를 한다. 오라버니는 여기까지 질병 대응에 능하고 공과 사의 구분이 뚜렷하며 자신의 입장을 굽히지 않는 강인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질병이 마을을 휩쓴 후, 그는 자신의 추진력으로 ‘위험하다고 소문난’ 산에 사람들을 데리고 갈 계획을 짠다.
〈푸른 신명〉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오라버니’다. 그가 소설 안에서 가장 추진력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 추진력으로 오라버니는 잠시 경아를 보호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경아와 가족을 감싸던 오라버니는 돌연 ‘산’이라는 장소에 몰두하면서부터 가장 ‘위험한’ 인물로 변모한다. 돌림병에서 벗어나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행위는 노인 범연을 통해 충분히 경고된다. “이 숲에 어떤 괴담이설이 깃들어 있는지” 말하는 범연을 무시한 채 오라버니는 산으로의 이동을 감행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독자는 경고를 무시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쉽게 예상한다.)
오라버니의 이주로 산은 훼손된다. 흥미롭게도 오라버니는 숲이 “넉넉하고 너그럽”다고 주장한다. 숲은 넉넉하고 너그럽다. 이런 주장은 언뜻 자연친화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오라버니의 주장은 명백히 자연에 반(反)하는 것이다. 숲은 너그럽기 때문에 무한정 개발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다. 그의 말은 자연을 이용하기 위한 변명 이상이 될 수 없다. ‘숲은 너그러우니 다소의 훼손은 금세 다시 회복될 것이다’. 이런 주장의 결과를 우리는 이미 현실로 보지 않았는가. 자연은 한없이 너그럽지 않다. 자연 또한 특수한 성정을 가지고 있어서 수용 한계를 넘으면 부작용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파괴를 용인하기 위한 오라버니의 합리화에서 다시 한번 죽음이 시작된다.
인간다움의 허상에 잡혀
첫 번째로 발생한 죽음은 물리적이다. 오라버니는 산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사람을 죽이고도 아무렇지 않는다. 그러나 자연의 신명은 자신의 영역 안에서 죽은 자의 목숨을 기억한다. 시간이 지난 어느 날부턴가 산으로 이주한 사람들이 신명에 사로잡힌다. 이 사로잡힘 앞에 물리적인 죽음이 존재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리라. 그들의 몸은 기괴하게 변형되고 부패한다. 작가는 자연물의 이미지를 기괴하게 비틀어 인간 신체에 주입한다. 독자는 여기에서 ‘인간의 몸이 무언가에 사로잡힘’을 보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앞서 마을에 한차례 돌았던 의문의 병. 그것에 걸린 사람들 또한 몸 안의 존재에게 나가라고 소리치지 않았던가. ‘그 유행병’이 신명의 연장에 있다는 것을 작가는 신체 강탈 모티프로 암시한다.
소설의 후반부에서는 서술자였지만 이렇다 할 존재감이 없던 ‘경아’가 갑자기 부각된다. 여기까지 경아는 서술자의 역할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의 인물성은 서서히 구축되고 있었다. 작가는 ‘경아’라는 인물이 기능할 최적의 상황을 살피다가 거기에 이르러 그녀를 효과적으로 드러낸다. 경아는 눈에 띄지 않게, 그러나 분명히 다가오는 신체의 변화를 깨닫고 있었다. 산에 들어오고부터 그녀에게는 꿈이 나타나고 신명이 들린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안경을 쓰지 않아도 시력이 눈에 띄게 좋아졌다. 경아는 기괴하게 신체 변형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며 그들이 신명에 사로잡혔다는 것을 단번에 알아챈다. 오라버니는 그들을 보지 못하도록 경아의 눈을 ‘가렸지만’, 경아는 그 손을 뿌리치며 눈을 ‘부릅뜨고’ 말한다. “봐야 해요. 내 눈으로 꼭 봐야 한다고요”.
전반부에서 강조되었던 인간과 질병의 대립, 병으로부터 도망치고자 산으로 향한 사람들의 이미지에서 이 소설이 끝났다면, 산으로 간 사람들이 그곳에 무사히 정착하고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자칫 질병이 인간의 과오 내지는 실수의 결과물로 그려질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는 서술자 ‘경아’의 입을 빌려 이 ‘병’은 사실 ‘신명’임을 강조한다. 신명은 자연이며 자연은 인간을 포용하고자 했다. 그러나 스스로 파괴를 합리화하는 인간이 신명을 거역했다. 여기서 자연은 인간을 절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을 하나하나 포섭한다. 병은 인간을 대적하는 ‘적대자’가 아닌, 그마저 포용하는 너른 마음을 보여준다. 오라버니의 말이 일면 맞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연의 포용은, 신명이 주는 안식은 인간의 생각과는 조금 다르다. 이미 많이 파괴된 자연은 인간을 부드럽게 다루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종국에는 경아와 오라버니가 남으며 그중 경아가 신명에 잡힌다. 경아에게 오라버니는 “인간답게” 살고 싶었을 뿐이라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오라버니는 ‘인간답게’ 살았다. 한없이 오래 자연을 파괴한 인간의 모습 그대로. 경아는 ‘잡아먹힌’ 것이 자연과 인간 중 누구였을지 고민한다. 하지만 경아는, 그리고 독자 모두는 알고 있다. 사로잡힌 것은 자연이 아닌 인간이다. 오라버니의 말대로 자연은 넉넉하며 너그럽다. 그것에게는 품을 공간이 많다. 신명에게 인간을 자연으로 포섭하는 건 간단했다.
“형용할 길 없는 환락과 고통 속에서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라버니 역시 이곳을 떠날 수 없을 것임을. 그의 다리는 뿌리로 바뀌어 대지에 단단하게 붙박일 것임을. 비명을 지르고자 벌어진 입속에서는 한 줄기 바람이 새어 나올 것임을.”
경아의 고백에서 대지와 연결될 인간의 모습은 그들이 베어버린 나무의 모습과 닮았다. 그렇게 다시, 자연은 인간과 연결되리라.
마치며 – 그러나, 회복
김한민 작가는 자신의 책 『아무튼, 비건』에서 영화 «아바타»의 대사 “Are you connected, too?”를 인용하며 단절된 관계성의 회복을 역설한다. 이 대목은 현재의 우리가 무엇을 끊어내고 있는지 곱씹게 한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과 단절되어 있을까. 지금 무너지고 있는 이 세상에, 범람하고 있는 고통에, 유행하고 있는 질병에 우리는 얼마나 등을 돌리고 있을까. 그것과 우리가 완전히 상관없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까. 질병이 인간의 잘못으로 치환될 때, 지금의 고통은 자연의 복수이며 인간이 감내해야 할 당연함이 된다. 이런 극단적인 시선은 전술했듯 위험하며 올바르지도 않다. 세상에 당연한 고통은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정말 이 고통의 유행에 우리의 잘못이 조금도 없느냐는 것이다.
모든 고통을 인과로 바라보는 것은 잘못이지만 모든 고통에서 원인을 제거하고 등을 돌리는 것도 옳은 행동이 아니다. 이 당연할 수 없는 고통이 너무도 아파서 피하게 되지만, 그 도피의 끝에는 과연 치유가 있을까. 오히려 바로 지금이 고통을 직면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른다. 바로 그때 우리는 그 안에서 들려오는 푸른 신명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단순히 잘잘못을 따지는 처벌이 아닌, 진실을 마주하라는 목소리를 들을 것이다. 인간다움이 따스하고 포근하다는 이미지는 이제 거짓이 되어간다. 인간’미’의 아름다움은 어디에서 출발했을까. 적어도 지금 우리는 그것을 상실하고 있다.
그러니 ‘인간다움’이 폭력의 형용으로 굳어지지 않도록, 사람이 다시금 온정을 되찾을 수 있도록 가장 먼저 이루어져야 하는 건 신명의 회복이다. 신명은 자연이며 고통을 마주할 때 들리는 소리다. 아마도 신명의 푸름은 우리의 본성을 회복시키리라. 그리고 그때 비로소 ‘인간다움’은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