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둥이의 종류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기본적으로 하나의 수정란이 나뉘어 태어나는 일란성과 각각 다른 수정란을 통해 발생하는 이란성, 그리고 신체의 일부가 완전히 분리되지 않은 채 태어나는 샴 쌍둥이와 난자 하나에 두 개의 정자가 수정되는 반일란성쌍둥이(semi-identical twins)의 사례도 있다. (반일란성쌍둥이는 성별이 모호한 경우와 키메라(일부 세포의 유전자형이 다른 개체)인 경우가 보고되기도 했다) 성과 나이를 막론하고 세계에는 수많은 쌍둥이가 있다. 그리고 그들은 언제나 특별한 취급을 받아 왔다. 터울 없이 한 해에, 보통은 같은 날에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은 그들에게 주목한다. 모습이 같은 일란성 쌍둥이든, 다른 이란성 쌍둥이든, 평생 타인의 호기심 어린 눈빛과 질문을 감내한다. 같은 학교에 진학한다면 유명인사가 되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등장하면 화제를 모은다. 일반적인 자매 형제와 달리 쌍둥이에게는 어떤 특별한 기운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심리, 정신적으로 쌍둥이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은 많은 세기 동안 이어졌다. 그들에게 일종의 불가사의한 교감이 있으리라는 추측도 여전히 더러 존재한다.
하지은 작가의 장편 연재소설 《언제나 밤인 세계》는 이렇게 다양한 쌍둥이 중 ‘샴쌍둥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판타지 소설이다. 쌍둥이 특유의 신비감을 극대화한 이 작품은 하반신이 붙어 태어난 남매 에녹과 아길라의 이야기다. 쌍둥이를 임신한 여성은 평범한 임신과 출산 이상의 고통을 겪는다. 기술이 부족했던 과거에는 산모의 생존을 위해 한 아이만 살리는 등의 불가피하고도 긴급한 수술이 행해지기도 했다. 뱃속에서 영양의 불균형으로 한 아이가 사망하거나 다른 형제의 몸 또는 모체에 흡수되는 경우도 더러 있다고 하니 건강한 쌍생아가 출생하는 것은 현대의학의 영역에서도 상당히 어려운 영역임에는 분명하다.
하지은 작가는 《언제나 밤인 세계》에서 이러한 고통을 견디고 태어난 두 아이의 시작을 잔인하도록 비틀어 놓는다. 두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이며, 필연적으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증오할 수밖에 없었다. 에녹과 아길라 쌍둥이의 분리수술은 성공적이었다. 지나치게 완벽했던 그 수술은 한 아이, 또는 두 아이 모두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고 말았다.
에녹과 아길라, 하나뿐인 하반신을 운명에 따라 차지한 사람은 남동생 에녹이었다.
1. 욕망과 성취의 불균형1
인간은 필연적으로 다양한 상황에서 ‘불균형’을 감지한다. 나와 타인의 , 나와 다수 집단의, 나와 사회의 ‘신체적’, ‘정신적’, ‘경제적’ 기준이 완벽히 일치하지 않을 때 ‘균형’이 붕괴하는 감각이 느껴진다. 스스로 감당하기 벅찬 순간을 누군가, 어쩌면 다수의 사람이 자연스럽게 통과하고 이겨내는 것을 보며, 나에게만 생기는 ‘불안’과 ‘소외’는 불균형으로 변화된다. 소설과 영화를 비롯해 다양한 스토리텔링은 불균형 위에 선 주인공의 심리를 내외적 갈등으로 드러내며 주동인물과 완전히 분리된, 완전히 다른 상황에 놓인, 대체로 ‘차별받지 않는’ 반동인물을 설정하곤 한다. 차별적 상황의 앞에는 피해자와 가해자가 있고 (비록 그 둘의 경계가 모호하더라도) 둘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나’와 ‘남’의 차이에서 발생하는 건 끊임없는 욕망이다.
그런데 《언제나 밤인 세계》 속 에녹과 아길라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완전한 증오(동시에 완전한 사랑)를 느끼고 있음에도 서로가 ‘타인’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과거에 한몸이었다. 그래서인지 아길라는 에녹에게 복수심만을 불태우지 않는다. 외려 그것은 왜곡된 사랑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와 가장 닮은 적, 증오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에녹.” -62화 중
작가는 아길라와 에녹의 관계를 한 단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샴 쌍둥이’라는 설정을 추가한다. 하반신이 있는 남동생과 없는 누이는 그 자체만으로 욕망의 불균형을 낳는다. 하지만 그들이 샴쌍둥이라면 아길라의 증오심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 하반신’은 아길라에게 올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소유할 가능성이 0퍼센트인 것과 50퍼센트인 것에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세상에는 아주 적은 확률에도 목숨을 거는 도박사들이 있다. 그들에게 절반의 확률은 대단히 높은 것이리라. 도박사 아길라는 그 끈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가 0퍼센트라고 믿는 그녀의 하반신의 확률을 100으로 만들기 위한 연구에 돌입한다. 여기서 강조되는 건 아길라의 ‘능력’이다.
아길라가 에녹을 볼 때 느끼는 ‘불균형’의 감각은 자신의 능력없음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것이었던 확률에 매달린다. 아길라의 세상에서 균형이 파괴된 건 신체가 아닌 ‘확률’이다. 오히려 아길라는 평균 이상의 능력을 보인다. 그녀는 컬트적인 미신부터 학문으로서의 의술에까지 다방면의 지식을 섭렵한다. 에녹의 실력 또한 출중했지만, 아길라는 모두의 무관심 속에서 자신의 집착을 실현하기 위해 잔혹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지식을 실험한다.
“당신은 모를걸요? 내가 이 몸으로도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지.”-6화 중
그 과정에서 아길라는 어머니의 눈을 멀게 하고 아버지에게 흉터를 입힌다. 그리고 끝내 에녹과 자신의 몸을 바꾸는 데에 성공한다. 아길라의 모든 행동은 탐욕스러운 방식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에녹은 한없이 순종적이다. 그러나 이토록 전형적인 두 인물이 신선해 보이기까지 하는 이유는 에녹과 아길라가 서로를 온전히 증오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둘의 행동은 증오가 아닌 백 퍼센트의 사랑에서 기인한다. 아길라가 에녹을 단순한 증오심으로 대했다면 그녀의 복잡한 심리를 묘사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에녹이 누이를 단순히 두려워했다면 후반부의 입체적이고도 주도적인 초점 인물의 변화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둘은 서로의 공간을 하나의 감정으로만 채우지 않는다. 우리가 대부분의 사람을 다층적으로 대하듯이, 그리고 형제와 자매를 애증하듯이.
이 복잡한 감정은 이후 아길라가 에녹을 ‘미로’에 가두는 장면에서 심화된다. 라비린토스 속에 갇힌 미노타우로스를 연상케 하는 미로 감옥은 그 안에 갇힌 존재가 ‘괴물’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 독자가 감지하는 건 에녹의 순수한 무력함이다. 소년은 누이에게 자신의 몸을 빼앗겼지만, 그녀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 미로에서 에녹은 누이의 복잡한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그것은 아길라가 에녹을 ‘위해’ 준비한 공간이었다.
“이 미로를 사랑했었다. 끝이 없는 듯 느껴져서. 모든 곳에 길이 있는 듯 느껴져서. (…) 휠체어를 놓고 쉬기를 바랐던 동굴침실, 가끔은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길 바랐던 돌로 된 식탁,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비가 오는 소리나 바람 부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틈까지. / 동생을 위해 준비해둔 것은 이렇게나 많았다.” -39화 중
아길라였던 몸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가 에녹에게 할 수 있는 마지막 배려는 이토록 복잡한 마음이었다.
2. 그러나 아직도 너에게 묻는 건
이 소설의 전반부는 아길라와 에녹의 개인적인 감정 교류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그 교감은 어떤 신체, 정신적 폭력과 기괴한 요술을 보여주기도 했지만 윌스턴 가(家)를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후반부에서 모리세이의 등장으로 인해 아길라와 에녹의 활동 영역은 넓어진다. 아길라는 교수를 사랑한다. 자신이 에녹에게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 둘은 동시에 윌스턴 가를 떠난다. 아길라는 그것을 원치 않았다.
이후 모리세이는 아길라의 몸을 입은 에녹과 이곳저곳을 배회한다. 그중 한 마을에서 두 사람이 지내는 에피소드는 어떤 기묘하고 낯선 존재를 형상화한다. 모리세이는 ‘아이들’이라고 부르고 마을사람들은 ‘괴물’이라고 부르는 ‘그것’은 잡아먹으면 모든 것을 고쳐준다. 으스러진 팔을 감쪽같이 고치고 수명을 연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을 꾸준히 먹지 않으면 참혹한 외관으로 끔찍하게 최후를 맞는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깨닫지 채, 마을에서 에녹은 아길라가 받았던 ‘가능성’의 시험을 마주한다. ‘그것’을 먹으면 아길라의 육체에 없는 하반신을 되찾을 수 있다. ‘어떠니, 네 생각은?’이라고 묻는 노아의 질문에 에녹이 내놓은 대답은 확률에 목숨을 걸던 아길라와는 사뭇 다르다.
“그렇지만 (…) 누군가가 희생해야 하는 일이라면 싫어요. 교수님은 그걸 아이들이라고 불렀다면서요.” -48화 중
에녹은 자신이 영원히 아길라의 몸으로 살아가야 할 수도 있음에도 망설이지 않고 답한다. 누구의 희생도 감수하지 않겠다는 에녹의 신념은 소설 초반에 강렬히 묘사되던 아길라의 행동과 다르다. 그러나 아길라는 나쁘고 에녹은 착하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아길라도, 에녹도 자신이 처한 상황과 여건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다. 에녹은 남의 고통을 감내할 수 없는 성정을 타고났다. 작가는 에녹과 아길라를 같은 시선으로 본다. 누군가가 선하고 악하다는 판단 이전에 독자가 이해해야 하는 건 에녹과 아길라의 생존 방식이다. 아길라의 강인함은 에녹의 여린 마음과 달리 남에게 쉽게 상처를 내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녀의 사랑 역시 모리세이의 상처에 고통을 가하며 드러난다. 하지만 에녹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살아있음’ 자체를 받아들인다. 아길라는 쟁취를 통해 살아남지만, 에녹은 ‘살아있음으로써’ 생존한다.
소설의 마지막 반전은 에녹과 아길라의 몸이 다시 한번 바뀌며 밝혀진다. 이 대목이 충격적인 이유는 지금까지 독자가 생각했던 에녹과 아길라의 성격이 본디 완전히 달랐어야 했다는 과거의 예언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에녹은 아길라를 죽이고 태어날 운명이었다. ‘형제살해’라는 자극적인 단어가 주는 섬뜩함처럼, 폭력성은 에녹에게 해당하는 단어였다. 이 필연적 죽음에 에녹의 성정은 일찌감치 동의하지 않았다. 그는 누이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사람들은 아길라가 운명을 거스르고 태어난 무서운 아이라고 말했지만, 실상 자기 운명을 파괴한 건 에녹이었다.
그 필연적 애증을 에녹은 사랑으로 거스른다. 그리고 끝내 아길라 역시 에녹에게 비뚤어진 사랑과 증오를 거둔다. 둘의 관계는, 그리고 이 소설은 죽음의 위기로 시작되었으나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그것이 둘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마치며
‘운명’에게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힘이 있을까. 언제나 밤이었어야만 했던, 증오와 살해로 삶을 시작해야만 했던 한 사내아이. 그리고 삶을 시작할 수조차 없던 그의 누이는 모든 운명과 필연을 넘어서 그들의 삶을 새로이 빚어냈다. 그 과정에 상처와 아픔과 고통이 있었다 해도, 영원히 없을 뻔했던 사랑이 피어났다. 하지은 작가의 《언제나 밤인 세계》는 ‘운명이란 무엇인가’를 고찰하는 소설이다. 운명을 거스르는 데에 애증으로 합의한 두 남매를 통해 독자는 샴 쌍둥이에게 덧씌워진 샤머니즘적인 신비로움이 아니라, 그들의 내면과 실존하는 욕구를 마주한다. 은유적으로 밤이었던 세계가 순식간에 낮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그곳에 새벽녘의 어슴푸레한 빛이 번지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까.
모쪼록 에녹의 선택도 아길라의 선택도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이 소설의 결말은 분명히 보여주었다. 가장 극단의 증오와 가장 극단의 포용은 사랑의 빛을 만들었다. 에녹과 아길라가 언제나 밤인 세계에서 살아야만 한다는 운명의 속삭임은 일말의 사랑으로 부정된다. 우리의 증오가 필연이라면 그것을 깨는 것은 사랑이리라. 아길라는 자신이 할 수 있던 최선으로, 끝까지 에녹을 위했다. “사랑받고자 했던 소녀, 기적과도 같은 애정에 대해 말했던 소녀”를 보내주기에는 입맞춤이 적절했다는 것을 모리세이도 알았던 모양이다.
그것이 사랑을 완성하는 가장 적절한 이별이었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