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을 뛰어넘는 사랑은 가능할까. 가능하다고 믿고 싶지만, 매일 누가 누구를 죽였다는 뉴스를 듣고 사는 인간종의 한 사람으로서 종을 뛰어넘는 사랑은 고사하고 인간종 안에서의 사랑도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같은 인간조차 사랑하기 힘든 세상에서 종이 다른 동물이나 식물에게 아낌없는 사랑을 주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인간이 아닌 동물이나 식물이 인간을 사랑하는 경우도 있을까.
<휘파람을 불면>은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에 도전하는 ‘나’의 이야기를 그린 소설이다. 소설의 도입부에는 ‘나’와 ‘당신’으로 지칭되는 두 화자의 대화가 나온다. 두 ‘사람’의 ‘평범한’ 대화 같지만, 소총이나 짐승, 포식자, 호환마마 같은 단어들을 보고 있노라면 평범한 대화가 아님을 알 수 있고, “하긴 너는 대호도 아니지, 당신이 중얼거린다. 고작 조그만 호랑이지.”라는 문장에 이르러서는 ‘나’가 사람이 아니라 호랑이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소설은 호랑이와 인간의 종을 뛰어 넘은 사랑 이야기인가.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되겠지만, 그 과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나’로 지칭되는 ‘산군’은 원래 호랑이인데 큰 호랑이로 성장하기 전에 인간으로 진화했다. ‘당신’으로 지칭되는 이준영은 산군에게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는데, 이 일의 내용은 국가가 처벌하지 않는 악인들을 사적으로 처단하는 것이다.
산군은 이준영의 제안을 거절하는데, 이는 산군 자신이 규정하는 자기 정체성과 관련이 있다. 쉽게 말해, 산군은 스스로 더 이상 호랑이가 아니라고 믿는다. 호랑이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살생 본능을 억누른다. 이준영은 그의 본능을 자극하며 도발한다. 고양잇과 동물들이 좋아하는 장난감을 들이밀거나 꼬리가 보인다는 농담을 하며 산군이 스스로 믿는 것처럼 완전한 인간으로 진화하지는 못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하려고 애쓴다.
이후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함께 일하자고 제안하는 이준영과 거절하는 산군의 갈등(밀당?)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결말에 이르면 산군이 어떤 선택을 하게 되는데, 겉보기에는 그가 자신의 본능을 따름으로써 인간 되기를 포기하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그 사정을 들여다보면 이준영의 설득에 넘어가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이준영의 안위를 걱정해서라는 점에서, 오히려 산군의 선택은 그가 이제 완전히 인간이 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선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사랑하지 않고 사는 인간도 많은데,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그가 ‘인간답다’고 말하는 건 잘못이려나. 인간이 동물보다 나은 것도 아닌데, 이제 완전히 인간이 되었다고 말하는 건 인간의 오만이려나. 그러나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는 산군에게서 인간과 비슷한 면을 보지 않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종의 차이, 과거의 원한조차 뛰어넘는 과감성, 개방성은 인간이 오히려 배워야 할지도.
복수를 위해 어둡고 잔인한 폭력의 세계로 접어드는 남자의 이야기를 그렸다는 점에서 누아르 영화의 느낌도 난다. 일본 속담 중에 너무 바빠서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다’라는 말이 있는데, 구제불능인 인간이 너무 많아서 ‘호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어’진 이준영의 시점도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