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을 마시는 새〉에는 네 가지 선민종족이 등장합니다. 인간, 도깨비, 레콘, 나가. 이들은 각각 신의 보살핌을 받고 있으며 그 신들은 또 세계를 구성하는 원소의 한 속성씩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신들은 자신의 종족을 위한 선물을 마련해 주었고, 그것은 그 종족의 성질을 대표하는 것으로 상징되기도 합니다. 글이 쓰인 지도 오래되었고, 오디오 북이 나온 지도 꽤 되었는지라 상당히 뜬금없는 시점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작품에 대한 연구는 즐겁습니다. 다만 워낙 좋아하는 작품이기에 오히려 조심스럽고 또 그 세계에 대한 얄팍한 이해가 드러날까 봐 염려되지만, 소박한 감상을 적으려 합니다. 주제는 네 가지 선민종족의 장례 문화입니다. 작품을 감상한 지 약간 오래되어 본문에 나왔던 내용과는 다르게 기억하고 글을 쓰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 부탁드립니다.
장례식은 엄숙하고 거룩합니다. 이 세상을 더 이상 걸어갈 수 없게 된 존재에게 그동안 걸어왔던 노고와 수고를 치하하며 곁에 있어 줘서 고마웠다고, 이제 편히 쉬라고 말합니다. 죽은 이는 무엇도 감각할 수 없고 인지할 수 없기에 실은 장례 문화라는 것은 떠난 이를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남겨진 자들을 위한 것이 되겠습니다. 항상 곁에 있던 자가 더는 함께하지 않는다는 공허함과 부재에 대한 슬픔을 다스리기 위하여, 그리고 나 또한 언젠가 이렇게 사라지리라는 두려움을 다스리기 위하여. 죽은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그 사회가, 그 문화가 사람을, 존재를, 상실을 어떻게 생각하고 또 대처하고 다스리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와 가장 가까운 인간의 경우, 무난하게 매장이라는 장례 풍습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작품 후반에 사형을 집행하게 된 괄하이드 규리하는 전시에 매장을 하는 수고로움이나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하여 나뭇가지와 나뭇잎으로 시체를 덮으라 명령합니다. 관계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판사이의 육 형제 탑이 통째로 수몰되었을 때 작중에서는 그 끔찍함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꺼려합니다. 인간은 제대로 된 장례, 매장을 치러 주지 못했을 경우 두려움, 죄책감,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는 부채감을 느끼는 것 같습니다.
다른 종족들과 달리 죽음에 대해 민감하고, 또 죽음에 대한 반응이 클 수밖에 없는 인간은 시체에서 오는 죽음의 냄새를 또한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누구도 볼 수 없게 깊은 땅속에 매장하는 것이지요. 전사로 타고난 레콘, 죽음을 극복한 나가, 두 번 죽는 도깨비와는 달리 인간은 모두가 전사로 타고나지도 않고, 죽음을 극복하지도 못했고, 한 번의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납니다. 다음 기회라는 것은 없습니다. 자신이 저질러 왔던 잘못을 반성할 수도, 고칠 수도, 후회하고 나아갈 수도 없습니다. 모든 것이 끝나 버리는 죽음, 에 대한 인간의 감상은 각별할 수밖에 없습니다.
때문에 인간은 시체를, 죽음을 보이지 않는 곳에 파묻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 표지를 세웁니다. 무덤, 비석, 봉분. 땅속에 묻어 버렸는데 왜 그렇게 표시하는 걸까요. 인간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사후세계에 대해 경외하면서도 두려워합니다. 살아 있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죽은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죽었으니까요. 만약 사후세계가 존재하고 죽은 자들에게 눈이 있다면, 그들은 이승에 남은 자신의 육에 관심을 보일지도 모릅니다. 죽은 자는 산 자보다 많은 것을 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들의 영을 구속하는 육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도깨비의 어르신을 보면, 벽을 통과하거나 얼굴을 크게 부풀리거나 먼 거리를 빠르게 이동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영은 이승에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보이지 않기에 어쩌면 더 많은 것들을 해낼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고 막연한 추측뿐이기에 공포가 더욱 더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여 가장 끔찍한 쪽으로 생각의 가지를 뻗어나가는 겁니다.
돌아와서, 인간은 망자를 두려워합니다. 망자가 자신의 육이 형편없이 다루어지는 것을 보고 분노하여 재앙이나 저주를 내리지 않도록 ‘우리가 당신을 잘 모시고 있다’라는 뜻으로 무덤과 비석을 만듭니다. 특별히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위해서 위령탑을 세우기도 합니다.
인간의 신이 가지고 있는 속성이 바람, 즉 변화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죽음은 무한한 정체, 불지 않는 바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혹은 궁극적인 변화의 마지막 단계일 수도 있겠습니다. 사후세계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기에 우리는 죽음 이후가 축복일지 저주일지 알 수 없습니다. 인간은 바람이기에, 인간이 아니게 된 시체, 죽은 자를 바람 불지 않는 땅속으로 넣습니다. 바람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시체는 천천히 썩어가겠지요.
도깨비들의 장례 문화는 어떨까요. 불을 숨 쉬듯이 능숙하게 다루는 그들의 장례식은, 사실 꽤 유쾌한 잔치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영이 육을 벗어나 어르신이 되었으니까요. 죽음의 순간을 벗어나 다시 한번 삶을 허락받은 그들은 장례식이라는 문화 자체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작중에서 비형의 아버지도 자신의 죽음을 알리며 장례식보다는 씨름판 걱정을 먼저 했지요. 그들에게 죽음은 또 다른 생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그들의 장례식은 능력과 속성에 맞게 화장이 아닐까 합니다. 껍데기만 남게 된 도깨비의 육신은, 어쩌면 영이 빠져나가는 순간 자연 발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곳곳에서 화재로 건물이 무너지거나 재산이 피해를 입었겠지요. 곡물을 주로 먹고 농사를 지어야 하니 밭에서 화재가 나면 큰일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육이 자연 발화하지 않는다고 여깁시다. 화장을 위해 많은 땔감이 필요하지도 않을 겁니다. 도깨비는 물속에서도 불을 피울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불을 자유자재로 다루니까요. 여러 가지를 종합하였을 때, 도깨비의 장례식은 가까운 지인이나 친척들이 모이거나 혹은 그렇게 사람을 모을 필요도 없이 간단히 헌 옷 처분하는 정도의 느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도깨비의 속성은 불이고, 그들의 신이 준 선물도 불입니다. 불에는 다양한 의미가 있지만 도깨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불의 의미는 상승, 온기, 거기에서 파생되는 낙천이 아닐까 합니다. 어두운 곳에서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느끼고, 불안해 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도깨비는 손가락만 튕겨도 불을 쉽게 밝힐 수 있지요. 나비 모양 불꽃을 만들어 약간의 여흥을 즐길 수도 있습니다. 육이 없어도 도깨비의 불은 꺼지지 않습니다. 다정하고 상냥한 그들은 물론 그 무엇보다 끔찍한 재앙을 초래하기도 합니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이 재앙을 꺼리고 마찰과 폭력, 갈등을 피하기에 도깨비의 불은 소박하고 따스합니다.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일입니다. 〈피를 마시는 새〉에서도 언급되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들은 자신의 죽음은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다른 종족의 죽음에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두려워합니다. 그들은 마찰과 분쟁, 폭력과 갈등을 피하기 위해서 자기희생도 서슴치 않습니다. 자신은 죽어도 죽는 게 아니니까 죽어도 괜찮다 말하는 비형의 모습은 작중에 자주 나타났습니다. 불의 속성과 연관 지으면, ‘자신을 죽이는 신’이라는 이름답게 불은 자기 안의 연료를 소모하여 불탑니다. 연료 없이 타오르는 도깨비불은 다른 연료를 필요로 하는 대신 자기 자신을 소모하는 것 같습니다. 다정함. 상냥함. 배려심. 이타심. 사려 깊지는 못하지만, 투박해서 더욱 정겨운 도깨비의 다정함이 사라진 시우쇠는 그 어떤 도깨비보다 맹렬하게 불탑니다. 도깨비불의 연료는 다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불은 변화와 혁신, 혁명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도깨비불은 무언가를 태워 변질시키는 불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변화를 더 잘 드러내는 바람이 인간에게 주어졌으니까요. 생각해보면, 바람은 불을 더욱 거세게 피워 올리기도 하지만 반대로 지나치게 거센 바람은 불을 꺼뜨리기도 합니다. 어떤 변화는 도깨비를 일깨우겠지만, 지나치게 급박한 변화, 강요는 그들을 죽입니다. 피라미드에서 비형은 태도에 변화를 강요받습니다. 죽을 위기에 처한 동료들을 위하여 비형은 불을 피워 올리려 하지만, 그 순간 울고 있는 두억시니와 눈이 마주치고 끝내 두억시니를 태우지 못합니다. 그리고 비형은 이미 죽은 두억시니들을 밟고 나아가야 하는 발에 불을 붙입니다. 그 불은 시체, 죽음, 정체, 찌꺼기, 불순물, 앙금을 태웁니다. 불에는 정화의 의미도 있지요. 비형은 그 순간 변하지는 못했지만, 죽은 두억시니들을 위한 애도로 불을 붙입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도깨비들의 장례 문화가 화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신들의 죽음에 대해서는 사소한 헤프닝 정도로 여기는 도깨비이지만, 다른 존재의 죽음, 그러니까 소멸과 정체, 상실에 대해 눈물을 흘리는 도깨비는 두억시니의 명복을 위해 마침내 편하기를 바라며 그들의 방식으로 약식 장례를 치러 주었던 것 같습니다.
나가의 장례 문화는 그들이 나무를 사랑하고 또 나무 장례식을 치러 줄 정도로 아끼기에, 당연히 수목장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가 사회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크고 아름답게 성장할 나무의 밑거름이 되는 것을 큰 기쁨으로 여길 것 같습니다. 어떤 방식일지 상상하는 것은 즐거웠는데요. 가문에서 특별히 관리하거나 키우는 나무가 몇 그루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가는 나무가 자연 그대로, 손질되거나 가지치기 당하지 않고 그저 자라고 싶은 대로 자라는 것이 미덕이라고 여기지만, 그래도 곧게 자란 나무는 목판이나 건축자재 등 사회를 유지하는 데 쓸모가 있고 잘 보존된 나무는 또한 지체 높은 가문의 명예를 높여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네요. 가족 대대로 나무 밑에 묻히거나 뿌리 위에 놓이는 것이 가장 축복된 죽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혹은 사람이 죽을 때마다 나무를 한 그루씩 심는 것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위에서 말한 괄하이드 규리하가 사형을 집행했을 때, 그런 구절이 나옵니다. 인간이라면 끔찍한 시체가 나뭇가지와 나뭇잎에 숨겨졌다고 말하겠지만, 나가라면 어떻게 볼 것인가. 심장을 적출하고 죽음을 극복한 나가이기에 죽음이라는 사건 자체가 그들에게 자주 일어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출가외인이기 때문에 여자들의 장례식만이 나가의 문화였겠지요. 껴묻거리를 함께 넣어 주려나, 싶었지만 그것마저도 나무의 성장에 방해가 될까 염려할 것 같습니다. 해부학에 특별한 기술이 있는 나가들이니, 어쩌면 시신이 더욱 좋은 비료(…….)가 될 수 있도록 처리하여 나무를 위한 장례를 치러 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과정이 장례식일지도 모르겠군요…….
나가가 가진 성질은 물이고, 물은 변화무쌍합니다. 어느 용기에 담느냐에 따라 모양이 변하고, 물에 독을 타면 독수가, 설탕을 타면 단물이, 피를 타면 붉어집니다. 색과 모양이 일정하지 않은 물은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눈물을 마시는 새〉에서 변화의 불씨를 당긴 것은 나가였지요. 그들은 이성적이고 침착하며 냉정합니다. 변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취하는 것이 이득일지 철저히 계산하고 행동합니다. 물은 다정한 듯 보이지만 때로 냉혹합니다. 인어가 아닌 이상 물속에서 살 수는 없습니다. 나가들은 온도를 보기에 강을, 물을, 바다를 움직이는 검은색으로 봅니다. 레콘은 물에 빠지면 그 무게 때문에 가라앉아 죽지만 나가는 체온을 빼앗겨 죽습니다. 지나치게 차가운 물은 얼음이 되고, 지나치게 가열된 물은 수증기가 됩니다. 정체된 물은 썩습니다. 썩은 물은 독입니다. 불은 정체되면 사그라들고, 바람은 정체되면 사라지지만 물은 자신의 존재를 없애지 않습니다. 때문에 나가는 다른 세 선민종족에 대항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변화하지 못하고 썩어가던 물은 활로를 찾아 전쟁을 일으킵니다. 그 전쟁에서 많은 나가가 죽고, 다른 종족들의 피가 흘렀지만 그것은 변화였습니다. 죽은 나가의 수만큼 나무가 심어졌을까요?
물과 나무, 불과 나무의 관계를 생각하면 재미있습니다. 물은 나무를 살리기도 하지만, 죽이기도 합니다. 불은 나무를 연료로 삼아 태웁니다. 하지만 도깨비의 불은 연료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나무는 생명이고, 삶의 의지입니다. 존재하기 위하여 싹을 틔우고 가지를 뻗는 나무를 나가는 지극정성으로 돌봅니다. 동시에 불은, 태양은 나무에게 빛을 제공합니다. 불타는 태양이 없으면 나무는 자랄 수 없습니다. 스스로를 태워 빛나는 불인 태양은 나무를 자라게 합니다. 무엇도 일방향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상호 관계로 맺어져 있으며, 물은 불을 죽이지만 도깨비의 불은 물속에서도 타오른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깨비들에게는 죄인이 없겠지만, 만약 죄인이 있다 한들 그들의 벌은 추방으로 그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형제도는 의미가 없지요. 도깨비들은 죽음 뒤에도 사니까요. 나가들은 어떨까요. 나가의 처형은 인간과 비슷할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나가의 사형이 수장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무에게 비료도 되지 못하고, 서서히 체온과 숨을 잃으며 죽어가도록 만드는 사형이 그들의 처벌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콘의 장례식이 가장 난제였는데요. 가족 단위 이상의 사회를 꾸리지 않는 레콘은 전사의 삶을 살다가 적의 칼날 아래에서 명예롭게 스러지는 것이 최고의 장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즉, 장례식이라는 문화 자체가 없지 않을까…… 싶네요. 나이가 많은 레콘은 쇠약함이 아닌 그만큼의 전투 경험과 생존 전략을 가진 노련한 전사로 여겨집니다. 무기를 들 수 없게 되었을 때가 그들에게는 죽음의 선포이겠지요. 더는 전사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니까요. 그런 레콘은 어떻게 되는 걸까요. 코끼리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향해 홀로 죽음을 맞이할까요. 어렵지 않게 그런 그림을 그릴 수 있겠습니다.
레콘의 가장 명예로운 죽음은 조장(鳥葬)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냥꾼들은 자신이 이러한 사냥감까지 잡을 수 있다는 위협과 과시를 위해 적의 시체를 나뭇가지 위에 걸어 놓거나 잘 보이는 곳에 던져 놓습니다. 다른 종족들에게는 다소 끔찍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레콘 자신은 자신이 대단한 사냥감, 전사, 전투 상대로 여겨졌다는 것에 명예를 느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레콘이 레콘의 장례식을 치러 준다면 그런 방식으로 자신과 무기를 겨뤘던 자가 ‘대단한 자’였다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 명예라고 생각할 것 같습니다.
레콘이 가진 무기는 별철이고, 그들의 신은 땅, 흙의 속성을 가지고 있지요. 땅은 잘 변하지 않지만, 한 번 변하면 그 위력은 다른 속성들의 변화보다 대담무쌍하고 거대하며 막강한 영향력을 가집니다. 지진이 한 번 일어나면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무너뜨리지요. 바람에도, 물에도, 불에도 쉬이 변하지 않는 그들은 또 다른 땅과의 마찰로 인하여 변합니다. 레콘이 그들의 신을 지극히 모시고 신경 썼더라면 매장 풍습이 자리 잡았을 수도 있겠으나, 신전이 어디에 있는지도 크게 개의치 않는 그들이었고 필요하다면 신과도 철의 대화를 나눌 그들인지라. 신의 품으로 돌아가는 것 또한 영광이겠지만 아무래도 그들에게는 전사의 명예가 더욱 중요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마 레콘의 장례식을 치러 주는 것은 도깨비나 인간이었겠지요.
간단하게 네 종족의 장례 문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각 종족이 가지고 있는 속성과 그 관계에 대해서는 따로 글을 빼서 써야겠지만, 쓰는 김에 간략하게나마 약간씩 넣어 보았습니다. 충분히 생각이 갈무리된다면 또 다른 감상으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