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가 주인공에게 동기화되기까지 1분도 안 걸리는 매우 강렬한 도입부를 지닌 이야기입니다. 주인공이 직접 서술하는 형식으로 묘사된 상황은 한국인 독자에게 익숙하고, 그렇기 때문에 이야기로서도 매력적이에요. 시작과 동시에 몰입하게 되죠. 인상적이었던 한 문단을 그대로 옮겨보겠습니다.
삶에서 부모자식 인연이 끊어지는 순간은 생각보다 허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강동에서 인천 남동공단까지 4년을 오가며 모은 월급, 부모님이 관리해준다고 하기에 통장을 맡겼는데 그것이 남동생의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비, 토익학원비, 용돈으로 쓰였다는 것을 일을 그만두고서야 알아버린 것이다. 인터넷에 구구절절 눈물 뚝뚝 흘리면서 글을 썼는데, 바보 같은 짓이라는 다섯 글자를 15줄로 늘여 쓴 냉소적인 댓글 보고 정신을 차렸다.
한국에서 30년 이상 평범하게 살아온 ―특히 여성― 독자라면 이런 도입부를 읽고 다음 내용을 보지 않기는 어렵겠죠. 주인공은 아마도 살면서 가족에게 가장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고, 그 피해는 하나의 사건이라기보다 삶에 고정적으로 주어진 조건이나 환경에 가까웠을 겁니다. 주인공은 장녀이고, ‘첫딸은 살림 밑천’이라는 한국식 타산의 익숙한 희생양입니다. 그것만으로도 이 단편을 끝까지 읽을 이유는 충분하죠.
전 도입부에 간결하면서도 확실하게 판을 벌려놓고 들어가는 이런 이야기를 특히 좋아합니다. 그러니까 이 리뷰는 그런 호감을 바탕에 깔고 쓰였다는 점을 감안해서 읽어주셔도 좋겠습니다.
주인공의 부모와 남동생은 아예 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독자는 이들에게 일말의 기대치도 없어요. 독자가 궁금해하는 것은 오로지 주인공이 이런 열악한 여건에서 무슨 일을 겪고 어떻게 대처하는가입니다. 그 호기심은 주인공이 가족과 연을 끊기 전, 남동생 ‘민재식’이 가족 식사 자리에 여자 친구를 데려온 날 처음 충족되죠. 이날 주인공은 인류애적 차원에서 재식의 실체를 가볍게 폭로합니다.
주인공은 인간 남성과는 연애하지 않습니다. 대신 성인용품인 실리콘 인형에 ‘뵤롱이’라는 이름을 짓고 관계를 갖죠. 주인공이 뵤롱이에게 느끼는 감정은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 입장에선 이해하기 쉽지 않겠지만, 이해의 난이도로만 보자면 재식의 부모가 재식에게 보이는 사랑이 더 불가사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이 이야기가 전제하는 세계에서 제 피붙이―특히 아들―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은 그리 아름답거나 숭고한 것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후반부에서는 ‘W-Ark’라는 연구소 형태의 정자은행이 나오면서 이야기의 톤이 약간 달라집니다. 주인공은 3개월째 연락이 두절된 재식의 행방을 추적하여 W-Ark로 향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캡슐 속 투명 용액에 잠들어 있는 재식을 확인합니다. 투자에 실패하여 오갈 데 없게 된 재식의 채무를 W-Ark가 대신 해결해주는 조건으로 그의 신체를 넘겨받은 겁니다. 재식의 신체를 취하기 위해 회사가 지급한 액수를 들은 주인공은 다시금 의아해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동생―또는 그의 정자―에겐 그 액수만큼의 존재 가치가 없기 때문이죠. 적어도 이 이야기 속에서 당연하고 합리적인 결론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사랑의 형태’는 사랑에 관한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시사하는 듯합니다. 대체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사랑이 아닌가 하는 것이죠. 앞서 말했다시피 이 이야기에서 사랑은 그렇게 무결한 가치가 아닙니다. 재식의 부모가 재식에게 보였던 사랑은 어쩌면 W-Ark가 필요에 따라 재식의 신체를 받아들인 결정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불쾌함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종국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어떤 이해타산과 윤리, 필요와 당위, 그밖에 온갖 현실적 명분과 변명들의 마구잡이식 결합이 바로 우리가 아는 사랑의 본모습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이야기의 시작과 끝이 일종의 허무주의로 귀결되는 것도 제게는 매우 설득력 있게 느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