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속성에 관해 알려진 과학적 사실들의 간섭에서 잠시 벗어나 순전히 개인적 차원에서 말해보자면― 한 사람의 시간은 그 자신의 기억과 감정으로 이루어집니다. 삶을 진실하게 살아간다는 건 매 순간 자신의 감정에 주의를 기울이며 세상과 곧게 상호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시간은 정말로 그 사람만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특정한 시간이 한 사람의 매우 순도 높은 기억과 감정으로 채워지더라도 그것은 필연적으로 타인의 시간에 겹쳐 놓이게 될 겁니다. 시간의 밀도가 높다는 건 ―역시 순전히 개인의 주관적 영역에서― 그 시간에 얽힌 감정의 농도가 짙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토록 강렬한 감정은 타인에게 곧잘 전이되곤 하죠. 한 사람의 감정은 다른 사람의 감정과 공명하면서 더 짙어지기 마련이니까요. 우리가 긴 인생의 연속선 위에서 어떤 시간을 다른 시간보다 더 많이, 그리고 더 의미 있게 느끼는 것은 그 안에 매인 감정이 아직도 우리에게 어떤 울림을 주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우리의 시간을 누군가 흔적도 없이 앗아가려 한다면 어떨까요. 심지어 그것이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에 걸쳐 공유한 시간이라면요. 생각할 것도 없이 인생을 건 싸움이 시작되어야겠죠. 이 이야기의 주인공 ‘유슬’은 세상에 하나뿐인 딸들과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분투합니다. ‘하나뿐인 딸들’이라는 표현은 남편 ‘재호’의 타임리프 능력에 의해 가능해지고요. 이렇듯 「콜러스 신드롬」은 시간 여행 테마를 흥미롭게 다루면서 동시에 관계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시간’ 그 자체를 사색하게 만드는 작품입니다. 읽어 내려가는 동안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원더풀 라이프>(2001), 미셸 공드리의 <이터널 선샤인>(2005) 같은 작품들이 떠오르는 건 아마 그래서겠죠. 소재부터 서사를 전개하는 방식, 결말의 뉘앙스까지 완전히 결이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요.
유슬은 타임리퍼인 남편 재호에게 이미 열여섯 번이나 시간을 빼앗겼습니다. 단 이전까지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죠. 이 세계에서 뚜렷한 의도와 기억을 가지고 과거로 이동할 수 있는 건 타임리퍼 본인 뿐입니다. 재호가 거듭 타임리프를 시도하는 이유는 자신의 첫 번째 딸 ‘윤하’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예요. 물론 그 딸을 버리고 처음 시간을 되돌렸던 사람도 재호 자신이었죠. 두 번째 인생에서 싱글 라이프를 살아가던 재호는 그리움을 이기지 못해 윤하를 되찾기로 결심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깁니다. 시간을 돌려 유슬과 다시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윤하가 태어나지 않는 겁니다. 첫 번째 인생에서의 기억을 살려 변수를 통제하며 십수 번이나 같은 일을 반복해도 그때마다 다른 아이가 태어납니다. 재호는 윤하가 아닌 딸들의 이름을 모두 ‘현아’로 짓습니다. 그러고는 바로 다음날 시간을 되돌리죠.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에서 가장 오싹한 지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던 중 ‘열일곱 번째 유슬’이 남편의 노트를 보고 시간 여행에 얽힌 사연과 목적을 모조리 알게 됩니다. 그동안 남편에게서 느꼈던 묘한 신비감, 현아가 태어나자마자 불이 꺼지듯 확연히 달라져버린 모습, 그리고 또다시 시간 여행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유슬의 머릿속에서 모든 게 맞아떨어지죠. 다만 이번 삶에서는 무슨 이유인지 재호가 출산 다음날 곧바로 과거로 돌아가지 못한 겁니다. 무리하게 반복된 시도의 부작용일까요. 어찌 됐든 이제 유슬에게 중요한 건 자신과 딸의 시간을 무사히 지켜내는 일뿐입니다.
유슬은 친구 ‘혜인’, 후배 ‘수하’와 함께 재호를 저지하기 위한 계획을 세웁니다. (혜인과 수하는 저마다 유슬을 도울 동기와 유인이 명확합니다. 이 작품을 끝까지 읽고 나서 다시 한번 읽는다면 작가가 이야기의 개연성을 얼마나 능숙하게 직조하는지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재독을 강력히 권합니다.) 이후에 일어날 일은 재호도 처음 겪는 일일 테니 치밀한 계획으로 그동안 빼앗긴 시간의 복수를 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죠. 유슬은 재호의 머릿속에 윤하의 기억을 증폭시켜 끝없이 괴로워하도록 20시간짜리 타임루프를 설계합니다. 끝없이 반복되는 하루 속에서 윤하를 향한 그리움에 몸부림치게 하는 겁니다. 기발하고 합당한 형벌임에도 어딘지 모르게 꺼림칙한 이유는 이 복수에 윤하가 동원되기 때문일 거예요. 복수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지만, 죄 없는 3자에게 해를 가함으로써 완성되어서는 안 되니까요. 그리고 그건 복수의 방법론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겠지요.
결말부에서는 유슬이 그동안 얽히고설킨 시간의 타래를 끊고 하나뿐인 딸들과의 시간을 추억하면서 조용히 막을 내립니다. 복수는 종결되었고, 이제 이들에게는 빼앗긴 시간보다 앞으로 채워갈 시간이 더욱 소중하겠죠. 몇 번이고 되돌릴 수 있었던 시간축에서는 미처 깨닫지 못했던 가치랄까요. 그럼에도 이 이야기만은 다 읽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읽기를 꼭 권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