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앞의 사람을 간단히 지워버리고 싶을 땐 어떻게 해야 할까?
“흐린 눈이지 뭐.”
맞다. 흐린 눈을 해야만 한다. 이 말은 불편한 무언가가 존재함을 알고 있으면서도 애써 외면하고자 할 때, 체념 투로 쓰는 말이다. 소설 속 룸메이트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딱 ‘흐린 눈’이다. 룸메이트 간 싸움의 시작은 사소한 다툼이었지만, 이 싸움을 계기로 둘의 사이는 완전히 틀어진다.
사실, ‘나’와 누군가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주인공은 화해하기보다 평생 대화하지 않은 쪽을 택했다. 이러한 인물이 원하는 소원은 딱 하나다. 불편한 관계를 직면하는 대신, 그 사람이 사라져 줬으면. 그 사람이 먼저 물러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투명인간이 되는 것 말이다.
이처럼 지독히 회피형인 그에게, 실제로 투명인간화 시키는 능력이 생기고 만다. 그러나, 그의 방에 있는 물건들의 위치가 묘하게 바뀌기 시작하는데.
살면서 곤란한 일이 있을 때, 우리는 투명인간이 되어 위기를 모면하는 상상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의 주인공은 상대방이 투명인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편이 또 다른 불편한 물음들을 막을 테니까.
이토록 자기중심적인 욕망 앞에서, 작가는 투명인간 취급하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인지 질문한다. 어느 날 물건의 위치가 미묘하게 바뀌고, 주변의 사람들이 정말 그 사람과 괜찮은 것인지 질문하기 시작한다. <트루먼쇼>처럼 이 세상이 내 중심이라면 투명인간 작전은 성공하겠지만, 이 세상은 그렇지 않다. 때문에 이 작전은 처음부터 실패가 예견된 것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예정된 실패와 그로인해 발생하는 불안한 심리를 일상의 곳곳에 나타낸다. 내가 없애고자 했던 사람은 자꾸만 불투명한 모습으로 나타나 내 생활을 방해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질문한다. 정말 네 시야에서만 사라지면 모든 일이 다 해결되는 거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