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여행기로 읽히지만 리얼리즘과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드라마틱한 일이 자주 일어나지도 않고요. 다시 말해 아주 현실적이지도 않고, 아주 극적이지도 않습니다. 이 무심한 균형감각이 독자의 시선을 붙잡는 핵심 요인으로 느껴집니다.
주인공 ‘이정진’은 재수생입니다. 9월 모의고사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정진은 답답한 수험생의 일상을 벗어나 혼자서 즉흥 여행을 떠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뚜렷한 이유 없이 사람들의 일방적 선의를 잇달아 마주치게 되죠. 이게 지친 재수생을 위한 힐링 투어 컨셉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본격적인 스토리텔링을 위한 사전작업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타인의 관심과 선의는 윤리적으로 바람직한 형태로만 다가오지는 않습니다. 주인공의 욕구도 마찬가지고요. 그런데 이야기가 그걸 필요 이상으로 위악적으로 전시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 캐릭터의 입체감을 강조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여관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많이 이상하고 어색해요.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에선 그렇지 않은데, 유독 이 장면에선 힘이 잔뜩 들어가서 경직되게 느껴집니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 중요한 소품으로 나옵니다. 아마 작품 속 주인공의 여정이 파편화된 삶에 대한 저항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을 암시하는 도구일 거예요. 하지만 정진의 여행에서 격렬한 저항의 흔적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시한부 일탈에 가깝죠. 정진은 수능을 치르기 위해 결국 일상으로 돌아와 타협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요. 그러니까 거인과 난쟁이의 대립은 현실적으로 균형이 맞을 수가 없는 겁니다. 이야기의 초점은 대립보다는 새로운 관점의 모색에 있고, 그런 점에서도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과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조합은 영리하게 느껴지죠. 주제가 품고 있는 딜레마를 각인시키는 동시에 주인공의 고뇌를 북돋아주니까요.
회수되지 않는 소품과 사건들도 중간중간 나옵니다. 맥거핀을 의도한 것 같지는 않아요. 이후 내용에서 어떤 식으로든 처리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끝까지 회수되지 않는다고 해도 딱히 부자연스럽게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작품이 추구하는 스탠스가 한 사람의 삶에서 임의로 일어나는 사건들의 건조한 나열이라면, 그 속에 등장하는 소품 사이의 개연성을 빈틈없이 맞추려고 애쓰는 건 오히려 부질없는 시도일지도 모르죠. 삶은 그렇게 인과적으로 흘러가지 않으니까요.
중간쯤에 작가가 직접적으로 노출되는 플롯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이 작품 전반에 작가적 자의식이 짙게 묻어있네요. 어느 행간에서는 자조와 냉소가 읽히고, 다른 행간에서는 위로와 격려가 읽힙니다. 얼핏 모순적으로 느껴지는 정서들이 이야기 속에서 자연스럽게 녹아들 수 있는 건 아마 이것들이 애초에 한 인간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도록 설계되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주인공이 혼자 여행을 떠났지만 끊임없이 타인과 교류하게 되는 것처럼요. 모순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인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