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갈로가 쓴 《프랑스 대혁명》 7부의 제목입니다.
“사람들은 18세기가 카이사르의 시대보다 진보하지 않았음에 놀랄 것입니다. 그때에 폭군은 원로원 한가운데서 단도질 스물세 번 외에는 어떤 절차도 없이, 로마의 자유 외에는 어떤 법도 없이 살해당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은 인민의 살인자요, 현장에서, 피 묻은 손으로 범죄 중에 잡힌 자의 재판을 정중히 열고 있습니다! 누구도 죄 없이 통치할 수는 없습니다. 그 광기는 너무나 명백합니다. 모든 왕은 반역자요, 찬탈자입니다.”
“나로서는 중간 지점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사람은 통치하든지 죽든지 해야 합니다……. 그는 인민들의 평안을 보장하기 위해 죽어야 합니다. 자기 평안을 위해 인민을 짓누르는 일이 그의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에서는 루이 16세에 대한 재판이 열렸고, 생쥐스트는 이렇게 연설했습니다. 생쥐스트의 이 한 마디를 무척이나 감명깊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왕정제 국가의 세습 군주에 관해서 이보다 더 강렬하고 단언적인 문장은 없을 것입니다.
혁명을 스케치하는 작품에서는 자주 아동의 죽음을 다룹니다. 가장 이상적인 부르주아 혁명을 묘사한 《북해의 별》 에서 그랬고, 《베르사유의 장미》 에서도 그랬습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레 미제라블》 에서 가브로슈가 죽고, 《두 도시 이야기》 에서는 부패한 귀족의 마차에 치인 평민 아이가 등장합니다. 조금 다른 배경을 뒤져 보면 《헝거 게임》까지도요. 민중에게 아이들의 죽음은 더 이상은 참을 수 없겠다는 신호탄처럼 쏘아 올려 집니다.
세상에 먼지 한톨만한 잘못도 남겨볼 만큼 살지 못한 어린아이가 죽는 일만큼 늘 새삼스럽고 가슴 아픈 일이 있을까요?
《여명이 그대를 버릴지라도》 가 다른 점은, 분명 세상이 잘못된 것에 더 책임 지분이 있을 나이 든 사람들과 더더욱 죄악을 일삼은 이들의 싸움에서 죽어간 아이들의 이야기로 시작한다는 점입니다. 여전히 아동들은, 십 여년 쯤 살며 주변 세상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바쁜 아이들은 자기 목소리로 이야기하지는 못합니다. 그 아이들에게 벌어진 일들에 대해 소명해야 하는 책임은 항상 그보다는 오래 살고 조금 더 비정한 논리를 이해할 줄 아는 사람들, 아마 우리의 몫이어야 합니다.
새벽의 기수로 레앙 대혁명을 선두에서 이끈 아나이스에 대해 읽노라면 루브르 박물관에 커다랗게 걸려 있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속 시대에 맞지 않는 헐벗은 의상을 입고 선두에 선 마리안느 Marianne 가 떠오릅니다. 지금도 프랑스 공화국의 상징으로서 그 옆 모습 엠블럼으로 남아 있는 마리안느가 상징하고자 했던 자유 중에는 스스로 사유하고 올바른 세상을 추구하는 여성 민중이 될 자유도 있었을까요?
찰스 디킨스의 오래된 고전에서는 광기에 차 매일매일 부역자 돼지들을 기요틴에 올려 보내라고 부르짖는 여성 민중들이 등장합니다. 가끔 저항하는 민중에 대해 너무나도 간단히 축약하기 위해 가장 저항하기 힘든 어린 아이들이 죽는 모습을 묘사한다는 불만이 들다가, 이내 사그라듭니다. 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실제로 죽었겠어요. 그리고 가장 약한 곳에서 보호 받지 못하던 아이들은 죽음조차 존엄하게 다루어 지지 못합니다. 너무 가슴 아픈 최근의 사건 대신 조금 시간이 더 지난 이야기를 예로 들자면 해안가에 실려온 난민 아이를 커버로 보도하는 일 같은 것 말입니다.
아나이스라면 이런 의문에 동의해줄 것 같습니다. ‘일년에 삼천 명 이상의 사람들이 안전하지 못한 배에 정원 이상 몸을 싣고 바다를 건너다 익사합니다. 숫자로 들으면 충분히 가슴 아프지 않던가요?’
안전한 곳에서 무서운 파도에 몸을 싣고 새로운 삶을 도모하는 가족들과 바닷길에 오르지 않아도 되는 아이들의 죽음은 그렇게 다루어 지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이렇게 잔인하고 아이들을 파도에 내몬다는 이야기조차 윤리적으로 다루지 못하기 때문에 《여명이 그대를 버릴 지라도》 는 필요하고, 다정한 이야기 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이 소설을 이야기해볼까요? 막시밀리앙 로베스 피에르와 마라, 생쥐스트는 날카롭고 단호한 앙시앵 레짐의 처단을 외쳤습니다.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일상을 좀 더 좋아하는 당통은 루이 16세를 변호해 달라는 청탁 목적의 금전을 받기도 합니다. 부르봉 왕조나 나폴레옹 황제를 옹호하는 복고 세력은 실제로 존재했고, 군주를 탑에 가두어 종국엔 살해하는 민중들에 경악한 외세의 침략도 존재했습니다.
프랑스 국가 레 마르세예즈는 프랑스의 가장 남부 지역에서 외세에 맞선 의용군에 자원한 마르세이유 청년들이 파리까지 행진하며 부른 선전곡입니다. ‘마르세이유부터 스트라스부르까지’, 현대 프랑스의 영토를 정의하는 거리도 이때쯤 정확히 등장합니다. 《여명이 그대를 버릴 지라도》 는 이렇게 거대한 이념과 이념의 갈등 사이에서 벌어지는, 익숙한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마법이 등장하는데, 마법처럼 환상적인 장치로 우리가 역사에서 이미 목격한 참사를 재현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배경 위에서 진행되는 이야기는 훨씬 더 세밀하고 사소한 쪽에 집중합니다.
생쥐스트의 논리대로라면 통치하거나 죽어야 하는 레오나르는 세습 군주 혈통의 마지막 생존자 입니다. 아나이스는 부패한 절대 권력이 일상의 작고 중요한 행복들을 어떻게 파괴하는지를 몸소 체험해 온 생존자고요. 아나이스가 레오나르를 ‘기다려’ 주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독자들도, 아나이스도, 아마 많은 레앙의 국민들과 혁명군도 알고 있겠지만 레오나르는 아직 모르고 있습니다.
부조리하기 짝이 없는 세상이 자꾸 흘러흘러 가는데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라니, 어느 선한 인물의 순진하고 진지한 노력의 결실로 다 나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고 기다리라니. 아나이스는 이제 울어도 되는지조차 허락 받아야 하는 처지는 지긋지긋할 거라고, 레오나르도 생각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요. 아나이스와 아나이스 같은 사람들이 직접 세상과 맞서고 결정하는 세상은 그저 베풀고 나누는 레오나르가 꿈꾸는 세상과 괴리가 있다는 것을요.
레오나르는 통치할 수 없게 되고 죽지도 못해 무대 위를 방황합니다. 그리고 아나이스도 마찬가지지요. 두 사람은 이 세계의 양분화된 이념을 대표하는 입장이었고, 각자 치열하게 무언가를 추구하면서 싸워왔지만, 같은 곳에서 만났습니다. 우리는 두 사람이 건너고 있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투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고 있으니, 감히 ‘같은 곳으로 돌아왔다’고 해도 괜찮을까요?
하지만 괜찮다고 칩시다. 왜냐하면, 거대한 가치와 이념들이 충돌하고 죄있는 이들과 죄없는 이들이 숫자로 조차 남지 못하고 바스라질 때, 그 한가운데에서 ‘이건 아니다’라고 느꼈을 사람들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름다우니까요. 누군가는 거기서 부당하게 꺼져 버린 대지와 인명이 너무나 안타깝다고, 무엇을 얻기 위해서도 치를 수 없는 대가였다고 말해줬다고 믿고 싶으니까요.
단죄와 복수의 시대입니다. 시대에서 가장 걸출한 이름을 짊어지게 된 두 인물이 가장 사소하게 여기고 어떤 장치로 쓰여온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어쩌면 그들 역시 시대를 사는 주인공들이 아니라 장치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리 다뤄져서는 안되었을 이들에게 주목하고 애도하면서, 끊임없이 고민하면서, 역설적이게도 그들은 이 혼돈 안에 비로소 자신들의 삶을 직접 살아 나가기 시작합니다.
누군가는 고루하거나 이상론이라고 치부할테고, 누군가는 타협 가능한 영역으로 볼지도 모르는 가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가치야말로 무엇보다 우리가 싸워온 목적이며 쟁취해 마땅한 것이라고 지치지 않고 말하는 이야기는 계속해서 필요합니다. 잡음과 갈등을 낳는 충돌 속에서, 중심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말이에요.
아나이스와 레오나르는 모래성을 쌓는 것처럼 후드득 낙엽처럼, 죽은 이파리처럼 떨어지는 사람들을 구하러 나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나이스와 레오나르가 목격하는 죽음들, 폐허, 시신에 대해 알게 됩니다. 가장 약한 고리에 연결되려고 애쓸수록 시대에서 혼자 떨어져 나가 위태롭던 두 사람은 갈피를 잡을 듯 말 듯 조금씩 선명해집니다. 여전히 너무나 고통스럽고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지만 말이에요. 이야기의 끝만큼이나 과정이 고대됩니다. 타인의 고통을 자아의 훼손처럼 경험하는 이들은 정말 피로하고 힘들겠지만, 그런 사람들이 세상을 좀 더 아름답고 살만한 곳으로 만들어 왔으니까요. 이 작품의 메시지는 이야기의 엔딩이나 인물들의 결말과 별개로 이미 충분히 명확합니다.
이 사람은 통치하거나 죽어야 합니다. 생쥐스트가 열변합니다.
우린 죄 없는 어린애들을 고작 그런 이유로 죽여도 된다고 말해도 좋을 세상을 만들기 위해 싸워온 게 아니니까요. 아나이스가 반박할 겁니다.
레오나르에게는 누군가 그렇게 이야기 해주기를 바랄 권리가 있고요.
어차피 모두가 이 글은 사적인 관점에서 쓰였다는 걸 아시겠지만, 굳이 첨언하고 싶은 욕심이 있습니다. 저는 아나이스만큼이나 감내하고 변호를 포기하는 사람은 되지 못하니까요. 거대한 세계의 흐름, 그리고 그 안의 아주아주 섬세하고 약한 개인들이 연결되어 의미를 갖는 이야기에 저는 사족을 못 씁니다. 익숙한 프랑스 대혁명 서사를 로맨스 판타지 서사로 변주한 점이 매력적이라든가, 더 자세한 이야기가 궁금한 인물들에 관해서라든가, 프레데리크 같은 ‘선생님’ 인물을 제가 얼마나 좋아하는지 좀 더 구구절절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여기까지만 하고 이들이 들려줄 이야기를 기다려 봐야겠지요. 레오나르가 조금 더 대범하게 계몽 사상에 눈을 뜨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