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생 개그와 호러의 유쾌한 조합 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필하율 학생의 직업체험 보고서 (작가: 녹차빙수, 작품정보)
리뷰어: 사피엔스, 20년 12월, 조회 121

실제로 입에서 ㅋㅋㅋ 소리가 터져 나온 작품입니다.

아마 취향을 확실히 타는 이야기일 것 같아요. 이공계 종사자 분들은 구구절절 이해하실 분들 많으실 거고 전공이 화학이나 화공 계열이 아닌 분들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어디에서 웃어야 하나 하는 분들도 많으실 거고요. 한 마디로 타겟 독자가 분명한 작품입니다.

간단한 줄거리만 보자면, 필하율이라는 중학생이 어느 대학의 화학과 실험실에 견학 가서 보고 듣고 느낀 뒤 어떤 결심을 하게 되는 글인데요. 학생은 처음에는 부푼 기대를 안고 실험실에 발을 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한 결심은…???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는데요. 과학 발전과 연구 수행을 방해하는 어두운 의지들이 빚어내는 각종 환상적이고 호러적인 현상들을 곳곳에서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작가님의 비유에 감탄했어요. 실험실에서 벌어지는 각종 실수와 사건, 사고, 고행 등을 호러 소재와 하나씩 결합해서 묘사를 하셨더라고요. 하나하나가 적절했고 깨알 같은 웃음을 안겨줍니다. 아마 맞아, 맞아, 나도 저랬어, 하실 분들도 계실 거예요.

저는 재료 공학을 전공했는데 대학원에 다니며 석사 학위를 밟는 동안 저런 의지들을 아주 많이 보고 느꼈어요. 실험이 사람 손을 타는 바람에 실험하는 사람마다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거, 똑같은 시약인데도 어느 회사에서 만들었으냐에 따라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거, 정말 비슷한 촉매인데 약간 다른 구조의 촉매를 써서 결과가 다르게 나오는 거, 난 분명히 실험을 잘 진행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머릿속에 잡념이 스며들어 실험을 망치고 마는 거, 내가 찾을 땐 안 나오던 논문이 왜 다른 사람이 찾으니 나오는지, 공동 장비를 여러 명이 돌아가며 쓰다가 설정이 잘못돼서 실험을 망치는 일 등등이요.

그럴 때마다 내가 과연 졸업할 수 있을까 걱정이 돼서 엄청 절망하고 절규했었거든요. 실제로 집에서 동생 붙잡고 통곡한 적도 있었고요. (이제 보니 저 사악한 의지와 괴이들이 절 방해하고 있었던 거군요!)

그 때의 경험들에 학을 떼는 바람에 이제는 연구와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실은 애초에 적성에 안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실험을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거든요.) 저도 필하율 학생처럼 미리 체험을 했더라면 그때 이미 완전히 다른 길로 들어섰을까요? 아쉽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이런 작품을 보면서 이제는 웃을 수 있는 게 그때의 스트레스가 많이 치유됐나 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나쁜 경험도 아니었던 것 같고요. 그렇다고 웃기기만 한 건 아니에요. 작품 속의 대학원생들의 모습이 안쓰럽게 느껴집니다. 응원하게 되고요.

한편으로는, 댓글에도 썼지만, 연구와는 관계없는 에피소드들이 생각나서 피식거리기도 했는데요. 이를 테면 저희 실험실이 이전 확장을 하면서 고사를 지낸 일이었어요. 저희 교수님이 굉장히 지적이고 논리적이 분이라 아무도 예상 못 했던 이벤트였어요. 박사과정 선배들이 돼지머리랑 각종 제사 음식을 준비해서 어디서 구했는지 축문을 읽어가며 모두들 돼지머리를 향해 절을 꾸벅꾸벅 했었답니다.(웃음이 막 터져 나오는데 안 웃으려고 어찌나 애를 썼는지요.) 대낮에 실험실에서 막걸리도 나눠마시고요, 결국 돼지머리는 처치 곤란이라 네가 가져가라 네가 가져가라 서로 떠밀고 그러다 학교 앞에 무슨 식당에 기부한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작품에서 랩 샤먼이라는 설정을 보니까 그때가 생각나서 반가웠(?)어요.

또 하나는 실험 장비들이 내뿜는 전자파 때문에 연구원들은 아들보다 딸을 많이 낳는다는 속설이 있었거든요. 2000년대 초반이었는데 그때만 해도 아직 남아선호사상(!)이 어느 정도 남아있어서 아들 못 낳을 까 봐 걱정하는 연구원들이 꽤 있었어요. 아들만 줄줄이 낳은 분들은 실험 열심히 안 했다고 타박같은 농담을 듣기도 했었고요. 반면 딸 낳고 싶다고 무슨 실험 장비 측정하러 갈 때마다 장비 한 번 씩 포옹하고 내려오시는 분도 있었어요. 이 작품에서 딸을 낳기 위해 ‘성별간택사업’에 참여한 남자들의 이야기를 보니 우리 학교에서만 저런 얘기가 도는 게 아니었구나 싶어서 재밌었습니다.

호러와 SF를 결합한, 재밌게 읽었던 또 다른 작품은

입니다.

이것도 읽는 내내 주인공의 고난에 안쓰러우면서도, 가끔씩 툭툭 튀어나오는 공대생 개그에 피식거렸던 작품이에요.(심지어 과학 무당이라는 설정까지!) 이 작품은 이공계적인 베이스가 없으신 분들도 무난히 이해하면서 그리고 역시나 재밌게 읽으실 수 있는 작품이에요. 주인공이 기이한 호러 현상을 피하기 위해 커피를 자꾸 마시다 각성해 어떤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두 작품 모두 강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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