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5월 1일은 ‘근로자의 날’이다. 1890년 5월 1일 미국 시카고에서 첫 ‘메이데이 (May day) 대회’가 개최된 이래로 전세계에서 이 날을 ‘노동자의 날 (May day)’로서 기념해오고 있다. 전세계적으로 노동자의 저항을 기념하는 날에 한국에서는 저항의 주체인 노동자가 빠져 있는 것이다. 한국은 왜 ‘노동자의 날’이 아닌 ‘근로자의 날’일까?
이에 대한 역사적 근원을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일제 치하였던 1923년 5월 1일 조선노동총연맹 주최로 2,000여명의 노동자가 모인 것이 한국에서 열린 노동절 최초의 행사였다. 이후 1958년부터는 대한노동조합총연맹의 창립일인 3월10일을 노동절로 정해 행사를 치러오다 박정희 정권 시절인 1963년 노동법 개정과정에서 명칭을 ‘근로자의 날’로 바꿔 기념해왔다. 이후 노동단체들은 ‘5월 1일 노동절’을 되찾기 위한 투쟁을 해오다 문민정부 시절인 1994년부터 3월 10일에서 다시 5월 1일로 옮겨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름은 노동절로 바뀌지 않고 근로자의 날 그대로 유지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사실 사전적인 정의를 살펴보면 ‘근로자’와 ‘노동자’라는 용어는 큰 차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근로기준법상의 정의에 따르면 ‘근로자’는 직업의 종류를 불문하고 사업 또는 사업장에서 임금을 목적으로 근로를 제공하는 자를 의미한다. ‘노동자’는 사전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얻은 임금으로 생활을 유지하는 사람으로 정의된다. 이러한 근로와 노동의 사전적 차이와는 달리 사회적 심리적인 거리는 너무나도 크다. 우리는 흔히 ‘노동자’라는 단어에서 ‘능동적’, ‘저항’, ‘권리’ 등의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리고 ‘근로자’라는 단어에서는 ‘수동적’, ‘안정’, ‘사무직’ 등의 긍정적 이미지를 떠올린다. 심지어 범죄 피의자의 외모를 묘사하는 전단에 ‘노동자풍의 외모’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한다. 당신은 ‘근로자풍의 외모’라는 표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는 정부차원에서 ‘노동’을 ‘근로’로 대체시키며 이데올로기화해온 한국의 역사적 현실과 무관하지 않다.
세상에는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두 부류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지혜로운 사람이 세상에 자기 자신을 잘 맞추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어리석은 사람은 세상을 자기에게 맞추려는 사람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시대의 변화에 수동적으로 자신을 맞추며 세상과의 타협을 시도하는 사람이고 어리석은 사람은 시대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주도하며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혁신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일까? 아니면 능동적인 사람일까? ‘면접에 떨어진 날’을 읽으며 지혜와 어리석음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그래도 세상이 조금이나마 더 나은 방향으로 진화할 수 있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우직함과 신념 때문이 아닐까?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기득권을 대표하는 보수당의 대통령 후보는 세상이 진화하지 못하는 이유를 강성귀족 노조 탓으로 돌리고 있고 한국에서 5월 1일은 여전히 노동절이 아닌 근로자의 날이다. 아니 오히려 더 퇴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에서도 우직하게 세상을 변화시키고자 했던 사람들은 날이 갈수록 도태되고, 시대의 변화에 편승한 사람들은 새로운 기득권층이 되어가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희망은 무엇일까? 차씨 아저씨가 생존의 문제를 고민하면서도 자신의 이야기와 함께 돗대인 담배를 건내준 것처럼 타인에 대한 따뜻한 관심…. 그곳에 세상을 다시 변화시킬 수 있는 실마리가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