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설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말하면서 동시에 시의성을 가진다. 한켠 작가의 시리즈물 <전일도 사건집>에 등장하는 ‘사건’들은 언제나 유독 살아있고 뜨거운 지금을 말한다. 2020년 11월, 지금 우리에게 가장 생생한 화두는 무엇일까. 코로나에 지쳐가는 이 땅은 낙태죄 완전 폐지를 위해서도 싸우고 있다. ‘전일도’ 시리즈 중 하나인 <안녕, 아보카도> 속 등장인물 조우리도 자신의 모양으로 그러한다.
한 때 아보카도였던 여성
여성의 몸을 갖고 이 땅을 살다 보니, 너무나 당연하게도 여성 인권에 관심이 많다. 그러니 임신이라는, 남녀가 함께한 일에 대해 여성에게만 기이할 정도로 책임을 지우는 사회에도 자연스레 눈길이 머문다. 그런데 어째서 지난 한 달, 낙태죄 완전 폐지를 위해 앞장서 싸우는 목소리들로부터 눈을 돌리고 싶을 때가 많았을까 생각해본다. 모친은, 아들인 줄 알았던 태아가 여아의 몸을 하고 나왔을 때 부친이 욕설을 뱉었다는 말을 자주 전해주었다. 그 후 아기는 생면부지 타인에게 맡겨져 양친의 눈길을 한 번도 못 받았다는 이야기가 자랑처럼 이어졌다. 친부에게 돌아와 지독한 학대를 겪으며 아주 가끔 생각했다. 저들은, 태아의 성별을 알려주지 않은 산부인과 의사와 나를 저주하겠지. 미리 알았다면, 갈아버렸을까? 분노와 슬픔이 뒤섞인 그 질문이 아직도 이따금 떠오르는 까닭에, 태아는 여성의 몸에 찾아온 기생충 같은 존재이며 그런 방식으로 생명을 유지할 권리가 없다는 강한 목소리들 앞에 귀를 막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나를 향한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어떤 분노는 나를 과거로 데려갔다.
슬픔이 남은 자리에
우리씨의 임신 중단 수술을 위해 병원에 동행하며 전일도는 말한다. 20주의 태아는 겨우 아보카도 크기라고. 그 말을 듣고, 조우리는 지워버릴 아이, 아니 세포 덩어리에게 아보카도라는 태명을 지어준다. 낙태죄 완전 폐지는 우리가 반드시 서둘러 나아가야 할 길이다. 또한 낙태를 하든 출산을 하든, 혹은 그 어떤 결과를 맞든 임신과 맞물린 모든 문제에는 남성이 함께 참여하고 책임을 분담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런 이후에도 누군가는 한국어를 못 알아듣는, 겨우 아보카도만한 크기의 물질을 여러 이유로 떼어내고 얼마간 슬플 것이다. 누군가는 아이를 낳거나 기르다 잃고 아플 것이다. 누군가는, 자신이 태아일 때 사라져 버리는 것이 맞지 않았을까 평생에 걸쳐 물을 것이다. 그 앞에서 한켠 작가는 전일도와 함께 우리의 손을 잡고, 아보카도를 향해 작별 인사를 해준다. 어쩌면 문학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발화하는 분노와 논리에서 한발 나아가 조금 더 많은 아픔을 끌어안는 존재 아닐까. 누구에게도 끌어안겨 보지 못한 마음까지도. 그것이, 문학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조용하고 강한 힘의 비밀일지도 모른다. 소설을 읽고 조금 울었다. 눈물이 마른 눈으로, 오랜 서러움과 자기 부정을 향해 말해본다. 안녕, 아보카도. 안녕, 아주 작았던 나. 한 번에 끝내지 못할 작별 인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