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든 움트고야 마는 씨앗 감상

대상작품: 지상으로 (작가: 정디귿, 작품정보)
리뷰어: Meyond, 20년 9월, 조회 26

누군가의 의도와 상관 없이 온전히 자신의 우연과 의지로 뿌리를 내리는 잡초 같은 이들이 있다. 결핍과 갈망 같이 만져지지 않는 감정을 자양분 삼아 누구도 반기지 않는 낯선 세계로 기꺼이 뻗어가는 이들 모두가 넓은 의미에선 잡초의 삶을 선택했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에 등장하는 노아나 정 같은 인물의 삶 역시 잡초의 생애를 닮았다.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그리는 방식은 그동안 인류가 잉태되던 방식과 다를 게 없다. 그 어떤 비약적 발전 혹은 퇴보를 거듭한다고 해도 새로운 구성원들의 삶은 보통 이렇게 시작될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내가 그 세계에 존재했다.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이 생경한 감정을 토대로 배경이 되는 도시 ‘엠브리오’의 풍경을 건조하듯 차근차근 독자의 페이스에 맞춰 쌓아올리며 보여주는 데서 묘한 안정감을 느꼈다. 또, 읽는 이가 탈 없이 잘 소화하도록 고군분투한 쓰는 이의 노고가 행간마다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읽은 시점이 불과 몇 달 전, 작년 정도만 됐더라도 이 작품을 그럴싸하게 재밌는 공상 과학 소설 정도로만 여겼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2020년 여름, 내게 ‘지상으로’는 필수불가결하게 현재의 우리와 결부한 미래처럼 느껴지게 됐다.

물난리 속에 감춰져 있던 재해의 흔적이 말라가는 물기와 한낮의 햇살 아래 더 참혹한 광경으로 제 실체를 드러내는 것처럼, 빙산의 일각 마냥 느리게 제 코 끝부터 드러내기 시작하는 세계의 모습을 퍼즐 맞추듯 머릿속에서 얼기설기 만들어가는 과정이 혼란스러우면서도 묘한 희열을 전하는데, 영원히 상승 곡선만을 그릴 줄 알았던(적어도 현상 유지는 하리라 믿었던) 인류의 삶이 원시 문명으로 회귀하다시피 지하 세계로 곤두박질치며 온갖 자원 부족과 재해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이들의 모습에서 현실의 고통 대신 막연한 죄책감만을 느끼게 되는 건, 이 세계의 삶이 끝내 픽션의 영역에 머물러 주길 바라는 내 순전한 이기심일 것이다.

어떤 시절이든 꼭 움트고야 마는 씨앗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시절에 싹을 틔운 이야기가 외부의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힘껏 생장하고 또 성장해나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리뷰를 쓴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왜인지 지금 내가 속한 세계의 모습을 내내 떠올려 보았다. 그리고 옛 동네 골목에서 맡은 묘하게 뭉클한 연기 냄새를 환각처럼 느꼈다. 언젠가 나의 감각에 새겨진 내 세계의 입 냄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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