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장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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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했던 다진의 계획은 진경과 재익이 관여하면서 성공 가능성이 높아졌다. 태구가 세운 계획의 단순한 반복에서 다진과 진경과 재익이 새롭게 세운 팀 작전으로 변했다.

 

세 사람은 몇 번의 실험을 통해 몇 가지 가정을 확인했다. 거울 시간(‘MIRROR-ONE’에서의 시간)과 현실 시간이 동일하게 흘러가는지. 만약 다르다면 거울 시간은 사람마다 다르게 흘러가는지. 그리고 사람마다 실험이 끝나는 시간이 왜 다른 건지. 세 사람이 할 수 있는 건 ‘MIRROR-ONE’에 들어가고 나온 시간을 비교하고 호스트로 이착륙 했을 때 거울 시간을 기억한 것뿐이었지만 성과가 있었다.

 

거울 시간은 현실 시간과 다르게 흘러간다. 거울 시간은 개인마다 다른 상대적인 시간이 아니라 모두에게 동일한 절대적인 시간에 가까웠다. 실험자마다 실험 종료 시간이 다른 이유는 호스트에 머무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도 있지만 이착륙 시간에 개인마다 편차가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재익이 다른 사람보다 실험이 빨리 끝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날의 컨디션이나 나이 등 여러 가지에 영향을 받는다고 다진과 진경은 추측했다. 더욱 정교하게 실험하면 ‘MIRROR-ONE’에 대해 자세하게 알 수 있겠지만 그것은 닥터가 할 일이다. 그리고 세 사람에게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이 사실을 토대로 이착륙이 빠른 재익은 기록원 역할을, 이착륙 시간이 다진과 비슷하고 인내력이 좋은 진경이 경고등을 울릴 난동꾼 역할을 맡기로 했다.

 

여러 날에 걸쳐 기록한 결과, 다진과 진경의 이착륙 시간의 평균치를 냈고 두 사람은 현실 시간과 거울 시간을 거의 맞출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이론이었다. 진경과 다진이 직접 ‘동기화’해야 했다. ‘동기화’란 진경과 다진이 단 한 번만 움직여 경고등을 동시에 울리는 실험이다. 먼저 현실로 돌아온 기록원이 일렬로 나열한 ‘MIRROR-ONE’을 마주보고 앉았다. 재익은 다진과 진경의 거울관, 실험실 중앙에 걸린 원형 시계에 번갈아 눈길을 주었다. 약속대로라면 현실 시간 6분 후에 경고등이 울릴 것이다. 재익은 마른 침을 삼켰다. 혹여나 ‘동기화’가 어긋난다면 시간을 기록한 자신의 잘못인 것 같았다. 5분 56초가 지났을 때 진경의 ‘MIRROR-ONE’ 경고등이 발광했다. 약속보다 4초 빠른 시간이지만 허용 오차 범위였다. 다진의 ‘MIRROR-ONE’ 경고등이 약속 시간에 울리기만 한다면. 5초. 약속한 시간에서 1초가 지났다. 그리고 9초. 다진은 묵묵부답이었다. 진경이 경고등을 울릴 수 있는 건 15초가 한계다. 14초가 지나고 진경의 경고등이 꺼졌다. 곧이어 다진이 경고등을 울렸다. 화려한 독주가 23초 동안 이어졌다. 이어 달리기였다면 완벽한 호흡이었겠지만 ‘동기화’는 이인삼각 경주다.

 

“내가 너무 빨랐나?”

 

진경은 손가락을 세워 관자놀이에 대고 빙글빙글 눌렀다.

 

“아냐, 누나는 잘했어. 내가 잘못 적은 걸지도 몰라.”

 

재익은 ‘MIRROR-ONE’ 출입 시간을 적은 수첩을 펄럭였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D-DAY에는 더 완벽하게 맞출 수 있겠어.”

 

다진은 불안한 기색을 감추고 풀이 죽은 진경과 재익을 달랬다.

 

다진은 개인전도 착실하게 준비했다. 다진은 최대 여덟 번까지 경고음을 들을 수 있었다. 한 번뿐이었지만 장족의 발전이었다. 덕분에 만성 두통에 시달렸지만 결승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서 갈 곳은 정했어?”

 

재익은 오렌지주스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물었다.

 

“나도 궁금해.”

 

진경은 무릎을 세워 가슴으로 끌어당겼다.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길 바라는 소녀 같은 천진난만한 눈이었다.

 

“응, 정했어.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다진은 글라스를 들어 입술을 살짝 적셨다. 독한 위스키를 마신 것처럼 크, 하고 소리를 냈다. 다진에겐 지우고 싶고 반드시 바꾸고 싶은 기억일 것이다. 진경과 재익은 고개를 깊게 끄덕였다.

 

 

 

“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았습니다!”

 

고난의 3주가 지났다. 닥터는 그가 원하는 데이터를 충분히 얻었는지 만족한 얼굴이었다.

 

“여러분이 가고 싶은 기억으로 떠나십시오. 이것도 실험의 일환이지만 저희 연구진은 절대 손대지 않겠습니다. 자, 떠나십시오!”

 

닥터는 신대륙을 발견하고 선원들에게 나아가라고 명령하는 콜럼버스처럼 외쳤다.

 

드디어 마지막 단계에 들어왔다. 작전과 관계없는 멤버들은 고통스러운 3주가 지났다고 들떠있었지만 다진에게는 이제부터 진정한 고난의 시작이었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것, 공기의 냄새와 바람의 소리까지 일분 일초 그 장소에 있는 모든 존재를 암기해야 한다. 그리고 반격을 위한 순간을 찾아야 한다. 다진은 ‘MIRROR-ONE’으로 들어갔다. 오늘따라 유난히 발등을 적히는 윤활제가 차가웠다.

 

다진은 떨고 있었다. 호스트, 탑승자 구분할 것 없이 떨고 있었다. 다진은 숨을 골랐다. 다진은 깊숙하게 들어왔다 물러나는 감정의 파도에 휩싸이지 않기 위해 정신을 바짝 차렸다. 호스트에게 잠겨버리면 얼마 없는 시간을 버리게 된다. 탑승자는 호스트가 감독, 연출한 영화에 집중했다.

 

 

 
*
 

 

 

나는 습관처럼 가방 배를 갈랐다. 시간표와 비교하며 순서대로 공책을 꺼냈다. 물리, 영어, 화학. 공책을 펴서 숙제를 확인했다. 완벽하다. 아, 하나 빼고. 수2는 동식이가 빌려갔으니 수업 시작하기 전에 돌려받으면 된다. 동식이가 다혈질이긴 하지만 공책을 빌리고 돌려주지 않은 적이 없다. 장난이 심하고 수업 시간에 우스개 소리를 툭하면 하지만 심성은 착한 애다. 최근에 최석태와 친하게 지내는 게 마음에 들지 않지만 반에서 그 자식이랑 안 친한 애가 없으니 그러려니 한다. 물리 공책만 빼고 나머지 공책을 다시 가방 속으로 넣었다.

 

“다진아.”

 

나를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그리고 상대방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빠르게 표정을 원상복구했다. 빡빡 머리가 이쪽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책상이 가장 많은 중앙 분단 맨 뒤에 있어 멀기도 하고(내 자리는 왼쪽 분단 맨 앞이다) 그들과 엮이기 싫어 가기 싫었지만 쟤들에게 반항하는 건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니다.

 

“왜 쪽지 안 봤어?”

 

“장난인 줄 알고.”

 

똘마니 둘이 서로를 보며 키득거렸다. 나는 의도가 아니었다며 멋쩍고 비굴하게 웃었다.

 

강태하와 그 패거리는 소위 노는 애들로 학교에서 잘 나가는 애들이다. 강태하는 중학생 때부터 유명했다. 소문에 의하면 노는 애들 답지 않게 성격이나 매너도 좋았고(아무에게나 시비는 안 걸었으니) 얼굴도 반반해서 여자애들한테 인기도 많았다. 다른 학교에서 여자애들이 찾아와 정문에서 기다릴 정도다. 패거리 둘은 빡빡 머리를 한 애랑 교칙에 아슬아슬하게 걸친 긴 머리를 한 애로 강태하를 금붕어 똥마냥 따라다녔다. 두 똥들은 유독 약한 애들만 골라 괴롭혔다. 몇 번 애들을 때리는 장면을 봤지만 괜히 나까지 얽힐까 무서워 외면했다. 같은 반이니 어쩔 수 없이 한 두 마디씩 주고받은 적은 있지만 앞뒤로 나란히 앉아 몸을 돌려 떠들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

 

“곤란한 친구들 그냥 두지 못한다고 하던데, 맞아?”

 

강태하는 좌우로 길게 찢어진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만들었다. 나는 응, 하고 작게 대답했다. 불길했다.

 

“부탁 하나만 할게. 내가 지금 곤란해서 말이야. 내일 방과 후까지 이십만 원 빌려줄래?”

 

“그렇게 큰 돈은… 안 돼.”

 

강태하가 비장의 수라도 있는 듯 자신만만했다.

 

“업보가 쌓일 텐데?”

 

대장의 말에 똘마니들은 키득키득 웃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웃는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들과 얽히고 싶지 않은 마음에 입을 틀어막았다. 변명하면 할수록 괜한 꼬투리로 물고 늘어지는 게 얘네들의 수법이다.

 

“알았다고 이해할게. 그럼 가봐.”

 

나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웃기게도 그 짧은 시간에 수중에 돈이 얼마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이십만 원을 모을 수 있을까 궁리했다.

 

“이거 시험에 나온다. 아주 중요해.”

 

빼곡히 적은 판서 위로 분홍색 동그라미가 여러 개 겹친다. 공책에 받아 적었지만 정작 중요하다는 개념이 하나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나의 2와 다섯 개의 0이 핀볼처럼 수업 내용을 이리저리 튕겨냈다.

 

집에 돌아온 나는 두 번째 책상서랍 속에 고이 모셔 둔 통장을 꺼냈다. \291,000. 언젠가 덮칠지 모를 재난에 대비해 6년 동안 세뱃돈과 용돈을 조금씩 모아 놓은 비상금이다. 이런 식의 인재에 대비한 비상금은 아니다. 엄마에게 정중하게(정말 정중히) 건의해 세뱃돈의 일부를 넘겨받고 적금으로 저축하고 남은 용돈을 아끼고 아껴 모은 귀중한 비상금이다. 절대 쓸 수 없다. 그렇다고 다른 사람에게 손을 벌리자니 업보를 쌓는 일이었다. 나는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저울을 한쪽으로 미뤄두고 이해가 부족한 수학 숙제에 몰두했다.

 

결국 돈을 준비하지 않았다. 대신 삼만 원을 챙겼다. 목표 금액에 턱없이 부족하지만 한 푼도 주지 않는 것보다 낫다고 판단했다. 강태하도 진심으로 이십만 원을 빌릴 마음은 아니었을 것이다.

 

“다진아, 준비했지? 오늘 방과 후까지야.”

 

아침 조례 전, 강태하는 친히 내 자리까지 와서 한 번 더 확인시켜 주었다. 강태하의 눈을 보니 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 놓은 삼만 원이 무용지물이 될 거라 직감했다. 남중 3년과 남고 2년을 거치면서 남자들만의 정제되지 않은 언어를 익혔다. 그 언어는 눈으로 말하는데 말보다 솔직하다. 강태하는 장난이 아니었다. 그리고 나와 강태하를 바라보는 반 아이들의 눈빛이 확실한 선고를 내렸다. 강태하의 진심을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왜 하필 나지? 원래 우리 반에는 강태하를 전담 마크하는 애가 있다(카르마에게 철퇴 맞을 생각이지만). 이름은 강철희. 키는 작지만 이름처럼 단단해 보이는 아이다. 나는 철희와 가끔 장난을 치지만 강태하가 철희를 부를 때면 등을 돌렸다. 철희를 도와주면 강태하와 얽히게 되고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일들이 줄줄이 일어날 것이 두려웠다. 나는 철희를 보았다. 이런 상황을 피할 수 있는 노하우가 철희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철희는 내 시선이 닿기 전에 등을 돌렸다. 내가 그 아이에게 그러했듯이. 당연한 업보였다.

 

강태하가 나를 콕 집은 이유가 무얼까? 자랑은 아니지만 노는 애들은 공부를 제법 한다 하는 애들은 건드리지 않는다. 선생님과 노는 애들 간에 보이지 않는 조약이었다. 공부 잘하는 애들을 건드리지 않고 분위기를 흐리지 않는 대가로 허용 범위 안에 있는 불량한 행동을 눈 감아주겠다는 조약. 강태하도 이 조약을 여지껏 잘 지켜왔다. 그런데 선을 넘으려 하고 있다.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쌓일 업보 때문에 내가 선생님에게 이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런 예상은 웃기지도 않다. 하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었다. 남들이 들으면 이게 무슨 약속이냐고 비웃겠지만 일방적인 약속도 약속이다. 통보를 받은 자리에서 거절하지 못한 내 업보다. 어떻게든 될 거라 어림잡은 내 업보다.

 

“준비됐어?”

 

수업이 모두 끝나고 강태하는 내 자리로 왔다. 교실에는 나와 강태하, 똘마니 둘 그리고 내가 걱정되어서 남은 아이들과 싸움 구경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관객들 몇 명이 남았다. 청소 인원은 싸우던지 말던지 빨리 꺼져줬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4반 대장 강태하가 주관한 일이라 항의할 수 없었다.

 

“준비됐냐고.”

 

똘마니 둘은 책걸상 다리를 발로 툭툭 찼다. 강태하의 눈에 들지 못했으면 똑같이 당했을 놈들이. 나는 이를 부득부득 갈았지만 겉으로 드러낼 수 없었다. 위협 사격에도 반응이 없자 똘마니들은 내게 직접 타격을 가했다.

 

“야, 야! 빌린 돈 가져오라니까.”

 

“내가 언제 빌렸어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