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장 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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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세 번이나 들었다고?

 

다진은 진지한 얼굴로 자신의 계획을 털어놓던 태구를 떠올렸다. 다진은 간신히 ‘MIRROR-ONE’에서 네 발로 기어나와 실험실 구석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세 번 듣는 것도 이렇게나 힘든데 열 번을 버티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아무리 닥터가 기준을 올렸다고 해도 세 번은 너무 적다. 이대로는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다진은 벽에 길게 몸을 뉘인 채 멤버들의 실험이 끝나길 기다렸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저녁 맛있게 드세요.”

 

다진은 허리에 손을 얹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티티임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는 다진이었지만 오늘은 상태가 심각했다. 다진은 내일 보자는 멤버들의 인사를 뒤로 하고 다리를 절뚝이며 방으로 향했다.

 

“죽고 싶은 방법도 여러 가지군.”

 

효섭은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잣죽을 한 술 떠 입에 넣었다. 재익은 멀어지는 동료의 등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다진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침대에 몸을 던졌다. 며칠 전 요청한 침대 시트가 드디어 바뀌었다. 최근 들어 다진은 자면서 땀을 너무 많이 흘렸다. 시트에 스며든 땀은 평소에는 잠자코 있다가 불현듯 존재감을 뿜어냈다. 그런 날에는 찝찝해서 푹 잘 수 없었다. 다진은 뽀송한 섬유에 얼굴을 묻고 이리저리 비볐다. 상쾌한 기분도 잠시 머릿속에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떠올라 달콤한 휴식 시간을 방해했다.

 

다진은 책상 앞에 앉아 갈색 일기장을 펼쳤다. 멤버들에게 계획을 알린 날부터 다진은 빈 공간을 채웠다. 당면한 문제에 대한 생각도 정리하고 계획의 궤도를 수정했다.

 

다진은 자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니 무언가 남기고 싶었다. 거창한 뜻이 있는 건 아니었다. 다만 자신에 대해 적고 싶었다. 다른 사람이 읽는다고 생각하면 쑥스럽고 민망했지만 다진은 멈추지 않았다. 다진에게는 진심을 털어놓을 시간조차 얼마 남지 않았다.

 

 

 

계획을 멤버들에게 알리고 일주일이 지났다. 다진은 계획한 대로 일이 원활하게 풀리지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멤버들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없었다. 일상에서 겪는 어려움이나 연구소에서의 생활에 대한 도움이라면 멤버들의 지혜를 모았겠지만 이건 아무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다. 유일한 경험자는 이 세상에 없었다. 전부 다진이 스스로 헤쳐 나가야 할 몫이었다. 그래도 고무적이라면 경고음이 다섯 번이나 울릴 때까지 참았다는 것이었다. 현재로 돌아온 후에도 머리가 징징 울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경고음을 다섯 번이나 참았다는 사실이 다진은 마냥 기뻤다. 아직 2주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고 진척도를 따지면 계획을 실행할 때쯤에는 열 번에서 열한 번은 참을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그렇게 만들 생각이다.

 

다진은 이날도 짧은 티타임을 가졌다. 개인 훈련을 시작하고 난 뒤부터는 진득하게 멤버들과 식사한 적이 없었다. 다진은 그 사실이 아쉬웠지만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불 꺼진 방으로 돌아온 다진은 눅눅한 침대에 엎드려 잠시 두통을 가라앉혔다.

 

똑똑. 다진은 몸을 일으켜 문을 바라보았다. 티타임이 부활한 다음, 서로의 방에 놀러 가는 일은 있었지만 미리 초대받지 않는 한 먼저 남의 방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었다. 활발한 교류와 개인의 고유 영역은 별개의 문제다. 다진은 노크를 극심한 두통 때문에 들린 환청이라 치부하고 눅눅한 이불에 다시 코를 박았다.

 

똑똑. 다진은 무거운 몸을 일으켜 문으로 다가가 귀를 바짝 가져다 댔다. 문 너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똑똑. 세 번째 노크에는 짜증이 느껴졌다. 손가락을 가볍게 말아 두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먹으로 내리치는 느낌이었다. 다진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안에 있는데 왜 안 열어.”

 

문틈 사이로 짜증 섞인 재익의 얼굴 반절이 보였다. 재익은 방주인이 방문 의사를 묻기 전에 방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왔다. 다진은 문걸쇠를 단단히 걸어 잠그고 손님의 뒤를 쫓았다. 재익은 침대 위에 앉았다. 여전히 짜증 난 얼굴이었다.

 

“뭐 마실래? 물 아니면 포도주스 뿐이지만.”

 

다진은 냉장고에서 포도주스를 꺼내 플라스틱 글라스에 담았다. 진경에게 주문 방법을 배운 뒤 이것저것 냉장고에 쟁여 놓았지만 마지막까지 주문서에 남은 건 음료 뿐이었다. 저번 주에는 사과주스, 이번 주에는 포도주스 주간이다. 다진이 양손에 주스를 들고 거실로 돌아오니 재익은 책상 위에 올려놓은 갈색 일기장의 표지를 보고 있었다.

 

“이거.”

 

다진은 재익에서 글라스를 건넸다. 재익은 시선은 그대로 두고 손만 뻗어 그것을 받았다.

 

“무슨 일이야.”

 

다진은 책상에 밀어 넣은 의자를 꺼내 재익과 마주 보게 앉았다. 재익은 그제서야 본인이 이곳에 온 이유가 다시 떠오른 듯 했다.

 

“형, 그만 둬.”

 

재익은 글래스의 시울을 손가락 끝으로 매만졌다.

 

“집중적으로 마크당하고 있어.”

 

다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포도주스로 입술을 적셨다.

 

“어떻게 알아?”

 

“내가 봤으니까.”

 

재익은 자신이 본 사실을 증명하려는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눈동자 주위로 붉은 실핏줄이 섰다. 닥터라면 당연히 모니터링할 거라고 예상했지만 그 사실을 직접 들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나도 알아. 닥터가 감시한다는 것 쯤은.”

 

다진은 차분한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떨림이 묻어났다.

 

“허세 부릴 때가 아니야.”

 

다진은 글라스를 입에 가져가 재익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형.”

 

“난 포기 안 해.”

 

재익은 한숨을 쉬었다. 감시당하는 사실을 알려도 다진이 계획을 포기하지 않는 한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왜 T도 그렇고 형도 그렇고 다들 죽고 싶어 안달이야. 난 살아서 나가고 싶어. 난 이제 16살이야. 경험한 일보다 경험하지 못한 일이 더 많아. 형도 마찬가지잖아. 아직 살 날이 더 길잖아. 효섭 할아버지나 막순 할머니면 몰라도.”

 

재익은 멤버들 중에 가장 오랫동안 TRAST 연구소에 있었다. 불치병을 치료하기 위해 병원에 입원한 재익은 병원비를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고 치료를 포기할 참이었다. 그 때 TRAST 연구소가 나타났다. TRAST 연구소는 아이의 병을 고쳐주는 대가로 실험에 참가하라는 제안을 했다. 아이가 죽는 것보다 낫겠다고 판단한 재익의 부모님은 TRAST 연구소에 아이를 맡겼다. 연구소는 격리 치료를 한다며 가족과의 연락을 끊었다. 대신 그들이 정성스레 마련한 합성 사진이나 편지로 재익의 소식을 간간히 알렸다. 재익이 실험쥐 생활을 한다는 것을 숨긴 채. TRAST 연구소는 벌써 6년이나 그 짓을 해왔다.

 

“내가 지금까지 얼마나 연구소를 전전했는지 알잖아. 닥터들이 자기 입으로 나가게 해주겠다고 선언한 건 처음이야. 형. 절호의 찬스를 포기할 거야? 효섭 할아버지, 막순 할머니, 화련 아줌마, 진경 누나, 형. 모두 무사히 나가야지. 나가서 살아야지.”

 

재익은 태구를 포함해 많은 동료를 떠나보냈다. 재익은 더는 동료를 잃고 싶지 않았다. 다진은 몇 마디 말보다도 바로 옆에서 전해지는 동생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다진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갑자기 생긴 것처럼. 다진은 재익을 끌어안았다. 소년은 떨고 있었다. 이토록 자신을 위해주는 사람이 남아있다니. 고마웠다. 그래도 다진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다진의 안에는 혼자서 떨고 있는 또 다른 소년이 있었다.

 

“재익아. 나한테도 기회는 이번 한 번뿐이야.”

 

재익은 다진의 부드러운 포옹에서 벗어나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말해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