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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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눈을 뜰 때마다 분침은 10분 뒤로 달아나 있을 뿐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냉장고에서 물통을 꺼내 컵에 따랐다. 사막에서 조난당한 사람처럼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그래도 갈증은 가시질 않는다. 형한테 괜히 말했나? 아는 사람이 없으면 시도하지 않아도 아무도 모를 텐데. 나는 두 뺨을 세게 쳤다. 나약한 소리는 하지마! 기회는 이번 뿐이다. 저저번 휴식에서 저번 휴식까지 4개월이 걸렸고 이번 휴식까지는 6개월이 걸렸다. 간격이 점점 벌어지고 있다. 다음 휴식은 적어도 8개월은 걸린다.

 

“못 버티겠어.”

 

저번 휴식 공지에 진경 누나가 내게 한 말이다. 누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냐. 야, 잊어.” 누나는 실언을 주워 담았지만 누나의 실망한 얼굴이 아직도 눈에 아른거린다.

 

누나의 인생이 내가 저지른 멍청한 실수 탓에 반전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는 아찔했다. 운명의 장난도 정도가 있다고 신에게 화를 냈다. 영원히 진실을 몰랐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알아버린 건 어쩔 수 없다. 누나는 나 때문에 사고를 당한 걸 알고 있을까? 나는 누나가 사실을 알게 될까 두렵다. 인생을 송두리째 뽑아간 사람을 매일 마주한다는 건 지독한 고문이다. 목구멍이 바짝 말라간다. 물병을 들어 목구멍에 들이 부었다. 조금은 갈증이 해소되는 것 같다. 이륙에는 체력이 필요하다. 불완전한 컨디션이라면 천둥소리 13번은커녕 3번도 견디지 못한다. 나는 침대 속으로 기어들어갔다.

 

‘이륙’은 꿈을 꾸는 것과 비슷하다. 머리카락이 뽑힐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만 빼면. 재익이는 수술로 되찾은 팔과 다리가 뽑혀져 나가는 기분이라고 했다. 다진 형은 수채구멍에 빨려 들어가는 물이 된 것 같이 어지럽다고 했다. 아마 사람마다 이륙할 때 느낌이 다른가 보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니 나는 꿈으로 난 길을 걷고 있었다. 그 길은 결전의 장소가 될 축하 행사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무대 뒤는 시상준비로 바빴다. 실험실 막내라는 이유로 진행요원을 맡긴 교수가 미웠지만 인생에 아주 도움이 안되는 일은 없다.

 

“이번에 아주 큰 일을 해주었죠? 네, 네. 제가 소개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군요. 학교의 보물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사이클 부, 킵 고잉입니다!”

 

장내 아나운서가 마이크에 입을 바싹 대고 소리쳤다. 스피커에서 돌출한 고음에 사람들은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무대 뒤에 대기한 사이클부는 아나운서의 호명과 진행 요원의 지시에 따라 한 명씩 단상 위로 올라갔다. 나는 사이클부가 대기하는 곳으로 갔다. 구릿빛으로 그을린 진경 누나의 얼굴이 조금 낯설었지만 반갑다. 이 시간에서는 나와 진경 누나는 모르는 사이다. 나는 반가운 표정을 감추고 진경 누나의 팔을 잡았다. 무례한 모습으로 첫인상을 남기는 게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해야 한다.

 

“뭐에요?”

 

진경 누나는 불청객에 적잖이 놀랐다.

 

“일주일 동안 교내에서 자전거 타지 마세요. 특히 화학동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마세요. 위험한 실험이 있으니까 알았죠?”

 

“뭐에요, 이 사람? 저기요. 이거 놓으세요.”

 

나는 진경 누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누나는 화가 잔뜩 났다. 하지만 누나를 구할 수 있다면 미움 받아도 상관없었다.

 

“지나가지 말라고요.”

 

“저 나가야 하거든요? 놔주시겠어요?”

 

누나는 팔을 뿌리쳐보지만 나는 놓지 않았다.

 

“제발 부탁입니다. 제 말 명심해주세요.”

 

진심을 다해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무언가 느낀 게 있는 걸까.

 

“전다진! 이 새꺄! 뭐해!!”

 

진행을 총괄하는 선배가 울그락불그락한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확답을 듣지 못하고 팔을 놓았다. 누나는 구겨진 정장을 어루만지면서 총총걸음으로 단상 위로 올라갔다.

 

“새끼야, 미쳤어?”

 

선배는 손가락을 세워 가슴팍을 밀었다.

 

“축하 인사한 거에요.”

 

선배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친 새끼야. 너 지금 일하는 중이야. 놀러 온 줄 알아?”

 

“죄송합니다.”

 

나는 허리를 굽혀 사과를 했다.

 

“됐고. 빨리 다음 순서 준비해.”

 

선배는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청중들에게 목에 건 메달을 들어 보였다. 누나는 쑥스러워했지만 기쁨을 감출 수 없었다. 저곳이야말로 누나가 있어야할 장소다.

 

무대 뒤는 실험실로 이어졌다. 내 눈앞에는 알코올 램프가, 한 손에는 소시지가 들려 있었다. 나는 소시지를 램프 위에 올려놓고 창문으로 뛰어갔다.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3분이 채 지나기 전에 실험실은 폭발할 것이다. 그 때까지만 아무도 지나치지 말아줘. 내 바람대로 3분이 지나고 실험실에서 뜨거운 불길이 치솟았다. 나는 폭발에 휩쓸려 공중으로 튕겨져 나왔다. 흐려지는 시야 속에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다. 바로 잡았다. 나는 성공했다.

 

베토벤의 현란한 ‘월광’ 피아노 독주가 나를 땅으로 내리 꽂았다. 아침이었다. 온몸은 땀에 젖어 축축했다. 나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밤새 엉겨 붙은 땀을 뜨거운 물로 씻어 내렸다.

 

나는 갈색 가죽 커버로 싸인 양장 공책을 책장에서 뽑았다. 다진 형에게 전해줄 물건이다. 그동안 겪었던 일이나 계획에 대해 끄적인 일기다. 무거운 짐을 형에게 지어주는 건 아닐까 싶지만 맡길 사람은 형 밖에 없다. 다진 형은 걱정이 많아도 책임감 하나는 끝내준다. 식당으로 가기 전에 형 방으로 갔다. 지금이면 형이 식당에 있을 시간이다. 나는 정보지 투입구로 갈색 일기장을 밀어 넣었다. 일기가 바닥으로 떨어지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이걸로 떠날 준비는 모두 끝났다.

 

“늦었네.”

 

재익이가 식당에 들어온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는 밥과 반찬을 골고루 식판에 담고 테이블에 앉았다. 다진 형은 보이지 않았다.

 

“오늘 해가 서쪽에서 떴어?”

 

“어디 아픈 거 아니지?”

 

실험실 멤버들이 내 식판을 보고 한 마디씩 거들었다. 나는 대답 대신 빙긋 웃고 말았다.

 

시간에 맞춰 실험실로 가니 식당에서 못 본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 보지 않았는데 한 달은 보지 않은 것 같았다. 나는 멤버들과 거리를 두고 걸음을 멈췄다. 온몸이 떨리고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진 형은 나를 발견하고 무리에서 떨어져 나왔다.

 

“진짜 해가 서쪽에서 떴나? T, 어디 아파?”

 

무리 속에서 재익이 물었다.

 

“컨디션이 별로래. 일하다가 하루 쉬면 피곤이 몰아서 오잖아.”

 

다진 형이 대신 대답해주었다. 나는 괜히 헛기침을 했다. 콜록.

 

“감기 걸린 거야?”

 

불쑥 진경 누나가 나타나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뺐다.

 

“이마 가져와. 열 있나 좀 보게.”

 

하는 수 없이 머리를 앞으로 가져갔다. 누나는 자기 이마와 내 이마를 번갈아 손을 댔다.

 

“괜찮은 거 같은데. 힘들면 빼달라고 닥터한테 얘기할까?”

 

“그 정도는 아냐!”

 

큰 소리에 멤버들의 눈이 내게 모였다.

 

“그 정도 아냐. 오바 하지 마. 쪽팔리게 쉬긴 뭘 쉬어.”

 

나는 누나를 뿌리쳤다. 누나는 위 아래로 나를 흘겨보았다.

 

“걱정해줘도 난리야. 니 맘대로 해. 다진 씨도 얘 감싸주지 마.”

 

다진 형은 아무 말도 않고 내 등에 손을 가져다 댔다. 형의 붉어진 눈시울처럼 손바닥이 뜨거웠다.

 

정확히 9시가 되자 연구실 문이 열렸다.

 

“다들 잘 쉬었나요. 아주 좋습니다. 평소대로 실험해주십시오.”

 

사람들은 각기 자신의 ‘MIRROR-ONE’ 앞에 섰다.

 

거울관도 오늘이 마지막이다. 한때는 깡통 같은 게 무슨 타임머신이냐고 무시했었는데 지금은 믿을 게 너밖에 없다.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줘. 나는 검은 원통을 쓰다듬었다.

 

나는 설정 패널을 확인했다. 눈에 띄게 바뀐 조정은 없었다.

 

“다진 씨도 직접 설정해보세요.”

 

닥터는 설정 패널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 다진 형에게 붙었다. 그사이 나는 도착지의 정확한 날짜와 시간을 기입했다. 날짜는 사고가 일어나기 이틀 전, 시간은 사이클부가 단상에 올라가기 10분 전이다.

 

“T는 익숙하죠?”

 

“그럼요.”

 

나는 광대가 아릴 정도로 밝게 웃으며 개폐 스위치를 눌렀다. 실린더에서 공기 빠지는 소리가 나며 검은 원통이 좌우로 갈라졌다.

 

“잘 다녀오십시오.”

 

닥터는 닫히는 문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평소답지 않게 닥터는 문이 닫힐 때까지 나를 지켜보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발 밑에 조명이 들어왔다. 그리고 윤활제가 투입되었다. 마지막 이륙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윤활제가 차오를수록 심장박동이 빨라졌다. 이렇게 긴장한 건 첫 이륙 후 처음이다. 윤활제가 가슴팍까지 차올랐다. 10초 후면 작전 스타트다. 나는 짧은 숨을 반복적으로 내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꿈에서 예행 연습도 했으니까 괜찮다. 괜찮을 거다. 윤활제가 머리 끝까지 차오르고 머리카락이 쥐어 뜯기는 느낌이 들었다.

 

“야, 야. 빨리 움직여.”

 

누군가의 지적에 정신이 돌아왔다. 무대 앞뒤를 나누는 커튼 사이로 침을 튀기며 열변 중인 교수님과 관객석에 앉아 하품으로 파도 타는 학생들이 보였다.

 

“오태구! 다음 순서 늦는다! 준비해!”

 

선배의 울그락불그락한 얼굴이 다가왔다. 나는 그가 지시하는 대로 깃대를 단상 뒤에 옮겼다.

 

“서, 선, 배, 에, 지, 금 며, 뻔째, 죠?”

 

호스트의 입을 빌리자 가벼운 두통이 일었다. 이정도는 괜찮다. 선배는 어눌한 말투에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순서는 머리에 다 입력해놔야지. 임마. 이제 이거 할 차례야.”

 

선배는 상의 포켓에서 네 번 접은 스케줄표를 꺼내 펼쳤다. 사이클부 시상까지 20분 정도 남았다. 고맙습니다. 나는 호의 표시로 미소 지을 셈이었지만 호스트의 얼굴은 불편하게 일그러졌다. 선배는 나를 위아래로 흘겨보곤 할 일로 돌아갔다.

 

호스트에게 몸을 돌려주자 두통이 가라앉았다. 호스트는 의지와 상관없는 행동에 잠시 당황했지만 멍 때릴 시간이 없었다. 그는 백스테이지를 종횡무진했다.

 

“여기서 부를 때까지 대기해주세요.”

 

진행 요원에게 이끌려 대기실에서 사이클부가 무대 뒤로 내려왔다.

 

“이번에 아주 큰 일을 해주었죠? 네, 네. 제가 소개하지 않아도 다들 알고 계시군요. 학교의 보물을 소개하겠습니다. 사이클 부, 킵 고잉입니다!”

 

진행자가 마이크에 대고 크게 소리쳤다. 정상음에서 이탈한 고음 때문에 관객들은 인상을 찌푸렸다.

 

“제가 호명한 차례대로 나와주세요. 주장 김영재 선수!”

 

진행자가 호명한 사람들이 관객들의 박수를 맞으며 차례차례 무대로 올라갔다. 나는 하던 일을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