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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능에 관한 이야기(Feat 제미나이)

분류: 수다, 글쓴이: 창궁, 3시간 전, 댓글1, 읽음: 27

다른 곳에 두서없이 적은 걸 제미나이한테 정갈하게 말투 교정하라고 맡긴 뒤 올리는 것입니다ㅋㅋ 재미로 읽으세요!

 


‘재능’이라는 단어의 기묘함과 모호성

‘재능’이라는 말은 참 쓰기 좋은 단어이지만, 막상 깊이 파고들면 이보다 더 실체가 없고 모호한 표현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요즘 국문학’이라는 단어처럼 말입니다. 모두가 어느 정도 긍정할 수 있으면서도, 누군가는 확실하게 부정할 수 있는 그런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재능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이 ‘재능’이라 불리며 인식되는 개념 자체를 생각해보면 참으로 기묘한 지점이 있습니다.

재능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재주와 능력. 개인이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하여 획득된 능력을 아울러 이른다.’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즉, ‘타고난 능력’과 ‘훈련에 의해 획득된 능력’을 모두 합쳐서 이르는 말입니다.

하지만 실생활에서 이 단어를 그렇게 사용하는 사람은 드뭅니다. 물론 개인의 인식 속에서는 재능이 ‘타고난 능력’에 ‘그 능력을 개화하기 위해 투자된 노력’을 합한 의미일 수 있겠지만, 그러한 정의가 단어의 ‘일반적인 쓰임’에 부합하냐고 묻는다면 감히 그렇다고 대답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이조차도 제가 생각하는 ‘일반적 쓰임’의 기준이라고 지적하신다면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창작의 영역에서 ‘재능’이 거론되는 두 가지 경우

조금 더 면밀히 따져보았을 때, 창작의 영역에서 ‘재능’이라는 단어가 거론되는 경우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주로 신인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는 글을 마주했을 때: 이 경우 ‘재능’은 결과물에 대한 찬사를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이는 창작자가 들인 노력과 경험의 ‘양’을 재능이라는 ‘질’로 압축해 버리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특히 신인의 경우, 그가 이전까지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길이 없으므로 ‘저 글을 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했겠구나’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저런 글을 써내는 재능이 부럽다’라는 감탄으로 넘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2. 창작에 입문한 당사자가 스스로를 평가대 위에 올릴 때: 이때의 ‘재능’은 가능성과 잠재성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본인의 현재 결과물에 ‘노력’이 더해진다면 앞으로 훨씬 더 훌륭해질 수 있음을 타인에게 증명받고 싶어 하는 심리입니다. 때로는 자신이 그동안 들인 노력을 의도적으로 감춤으로써, 오직 ‘재능’이라는 포장 아래 자신의 가치를 압축하여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재능’은 대체로 ‘노력’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굳이 짚고 넘어가는 것이 새삼스러울 정도로,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 타고난 감각, 하나를 배우면 열을 깨우치는 비상함 등으로 말입니다.

글쓰기에서 ‘선천적 능력’을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

그런데 문제는 ‘글쓰기’라는 영역에서 선천적으로 주어진 능력, 즉 타고난 능력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아는 것은 글쓰기 재능이라기보다 지능의 영역에 가까우므로 논외로 하겠습니다.)

운동과 같은 분야는 타고난 능력을 비교적 쉽게 측정할 수 있습니다. 대개의 운동은 일상에서 인간이 수행하지 않는 과제를 내세우고, 평소 잘 쓰지 않는 근육을 사용하게 만드니까요. 결과물도 상당히 직관적이며 어느 정도 객관적인 측정이 가능합니다. 미술이나 음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글쓰기는 어떨까요? 제가 글쓰기 재능이라는 개념에 회의를 가지는 이유는, 글쓰기의 재료인 ‘언어’가 우리 삶과 지나치게 밀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과 지식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가깝다는 것은 우리가 이를 일상 속에서 너무나도 자주 사용하고 활용한다는 뜻입니다.

또한, 나이가 들수록 이러한 언어와 경험의 축적은 자연스럽게 이루어집니다. 10살이 인생에 대해 말하는 것과 20살, 나아가 30대, 40대, 50대가 인생에 대해 말하는 깊이와 시각이 각각 다른 것처럼 말입니다. 더불어 같은 나이라고 해서, 혹은 같은 정규 교육 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경험의 축적량이 동일한 것도 아닙니다. 사람마다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고, 완전히 똑같은 사건을 겪더라도 느끼고 받아들이는 바는 천차만별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글쓰기 재능’을 순수한 선천적 능력으로만 규정할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어떤 창작자가 과연 ‘아무것도 축적된 것이 없는 제로 베이스’에서 두각을 드러낸 것인지, 아니면 ‘살아오며 축적된 것들이 쌓임’에 따라 자연스럽게 역량이 발현된 것인지 분간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메리 셸리의 사례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그녀는 성인이 되기도 전에 『프랑켄슈타인』을 써낸 천재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 그녀의 성장 환경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글쓰기에 최적화된 지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만약 유년 시절부터 방대하게 축적된 그녀의 경험과 사유가 응축되어 발현된 결과물이 『프랑켄슈타인』이라면 어떨까요? 이를 단순히 ‘어린 나이에 걸작을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경험과 사유의 축적 과정을 배제한 채 오롯이 ‘재능’이라고만 부를 수 있을까요?

게다가 메리 셸리의 다른 저작들은 대중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녀에게 진정 선천적인 ‘재능’이 있었다고 확언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선천적인 능력이 단 1회성에 그치고 만다는 것만큼 우스운 이야기도 없을 테니까요.

그렇다면 진정한 ‘글쓰기 재능’이란 무엇인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따져보겠습니다. 우리가 ‘글쓰기 재능’이라 부를 수 있는 ‘선천적 능력’은 과연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요?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자연스럽게 쌓이는 언어의 축적, 경험의 축적, 사고의 축적은 ‘노력’입니까, 아니면 ‘재능’입니까? 선천적으로 타고난 신체적 기능이나 지능만이 재능일까요? 아니면 개인에게 주어진 환경과 인간관계, 나아가 경험의 질적 측면까지 모두 포함해야 비로소 재능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만약 후자를 긍정한다면, 전쟁 중인 러시아나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난 사람과 상대적으로 평온한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사람 중 ‘글쓰기 재능’을 타고난 쪽은 누구입니까? (흔히 작가들 사이에서 농담처럼 퍼져 있는, 고통이 문학을 낳는다는 낭만설을 긍정한다면 정답은 전자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글쓰기에 있어 ‘선천적인 능력’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요? 그건 또 아닐 것입니다. 타고난 언어적 감각을 발휘하여 수 개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 기억력이 월등히 뛰어나 방대한 지식을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사람, 두뇌 회전이 빨라 복잡한 이론과 개념들을 순식간에 자기 것으로 소화해 내는 사람들은 분명 존재하니까요.

조금 결이 다른 예시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예민한 육체적·감각적 수용력을 바탕으로 이를 언어로 섬세하게 표현해 내는 데 성공한 작가가 있다면, 그에게는 ‘선천적인 능력’으로서의 글쓰기 재능이 있다고 보아야 할까요?

이처럼 분명 ‘선천적인 능력’으로서의 ‘글쓰기 재능’은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경계가 너무나도 빠르게 모호해집니다. 존재하기는 하나, 그것이 우리가 통상적으로 인식하는 ‘글쓰기 재능’의 전부냐고 묻는다면 그 대답 역시 명확하게 내리기 어렵습니다.

결과적으로 우리가 흔히 인식하는 ‘글쓰기 재능’이라는 것은, 사실 ‘선천적인 능력’이 차지하는 비중이 ‘분명 존재하기는 하나 압도적이라고 부를 만큼 절대적이지는 않은’ 영역이라는 뜻이 됩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것을 온전한 의미의 ‘재능’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요?

바로 이 지점에서 저는 ‘글쓰기 재능’이라는 단어에 깊은 회의를 느꼈고, 그 결과 일상에서 ‘재능’이라는 말을 통상적인 의미로 사용하는 것을 그만두게 되었습니다. 굳이 엄밀하게 따져 말해야 한다면, 적어도 저 스스로에 한해서는 어떠한 ‘선천적인 능력’으로서의 글쓰기 재능은 없다고 말하는 편입니다. (제가 나름대로 글쓰기에 진지하게 임해보겠다고 다짐하며 썼던 중학교 2학년 시절의 글이나 그 이전의 습작들을 보면 아주 명백하게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재능’에 대한 통상적인 인식을 이렇게까지 철저히 해체해 놓고 대책 없이 ‘나는 잘 모르겠다’라고 결론짓는 것은 너무 무책임한 처사일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까지 깊이 파고들며 정립하게 된 ‘제가 생각하는 진정한 글쓰기 재능’에 대해서도 말씀드려 보고자 합니다.

구축되는 재능, 그리고 내면의 ‘질문’

사실 앞선 해체 과정에서 이미 어느 정도 해답의 윤곽이 드러났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생각하는 ‘글쓰기 재능’이란, ‘선천적인 능력을 일부 포함하고 있을지언정, 본질적으로는 그보다 훨씬 더 포괄적이고 거대한 경험과 사유의 축적물’입니다.

즉, 선천적으로 타고난 뛰어난 능력이 없을지라도 글쓰기 재능은 후천적으로 얼마든지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이 제 생각의 핵심입니다. 대중적으로 흔히 인식되는 ‘천부적인 것’과는 완전히 다른 성질을 띠는 셈입니다.

이를 바꾸어 말하면, 글쓰기 재능은 스스로 구축해 나가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는 세월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쌓이는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개념일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창작자의 의지에 따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개념으로 얼마든지 확장될 수 있습니다. 흔히 창작자들에게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좀 만나라”라고 조언하는 것 역시, 본질적으로는 이러한 글쓰기 재능의 파이를 확충하라는 의미입니다. 더 다양하고 넓은 경험, 그리고 깊이 있는 사유만이 글쓰기 재능을 한층 더 단단하게 키워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경험’이 무조건 외향적이고 사교적이거나 신체적으로 활동적인 경험만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치열한 지식 습득, 깊이 있는 독서, 다채로운 문화생활의 향유 등 내면을 채우는 모든 행위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나아가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겪게 되는 모든 종류의 사건들, 거시적인 세계 정세의 흐름, 개인의 삶에 예고 없이 들이닥치는 부조리와 불가항력적인 비극, 그리고 그러한 풍파를 겪어낸 타인을 간접적으로 접하는 일까지, 이 세상의 모든 것이 글쓰기 재능을 구성하는 재료가 됩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어린 나이’에 돋보이는 ‘글쓰기 재능’을 보여준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선천적인 능력’만으로도 충분히 두각을 나타낼 수 있는 특정한 영역에서 예민한 감각을 발휘한 경우이고, 둘째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축적해 온 경험과 사유의 양과 질이 동년배에 비해 압도적으로 이례적인 수준인 경우입니다.

이는 역으로 말하자면, ‘어린 나이’에 자신의 ‘글쓰기 재능’ 유무를 성급하게 확인하려 드는 것은 그다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님을 뜻합니다. 경험을 쌓을 물리적인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상태에서 유의미한 축적을 이루어내기란 불가능에 가까우며, 따라서 두각을 나타내기 힘들 확률이 월등히 높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만약 그에게 진정 비상한 선천적 능력이 있었다면 ‘굳이 글을 쓰지 않더라도’ 다른 방면에서 이미 두각을 보였을 것이기에, 뒤늦게 글쓰기를 통해 재능을 확인하려는 행위 자체가 역설적으로 그 능력이 부족함을 반증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부연하자면, 선천적인 능력이라는 것은 결코 ‘문장을 유려하고 아름답게 쓰는 스킬’을 타고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타고난 운동 신경을 가진 선수가 태어날 때부터 정확히 축구, 야구, 배구의 룰과 기술을 타고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만, 저는 이토록 방대하게 축적된 경험과 사유가 궁극적으로 어떠한 ‘질문’의 형태로 개인의 내면에 남는 것이 창작자에게 있어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혹은 이 거대한 세계나 추상적인 관념을 향해서든 예리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능력. 그러나 동시에 그 질문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여전히 알지 못하는 상태. 저는 창작자가 이 선문답 같은 상태에 놓여 있어야만 비로소 창작 행위를 멈추지 않고 지속해 나갈 수 있다고 굳게 믿습니다.

내면에 자리 잡은 그 묵직한 ‘질문’이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어야만, 그 답을 치열하게 강구하기 위한 돌파구로서 ‘창작’이라는 수단을 선택하게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그 답을 찾는 수단이 창작이 아닌 학문적 연구가 될 수도 있고, 비즈니스가 될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해답’을 가진 창작은 결코 끈질긴 지속성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 ‘답’을 선언하는 단 한 편의 창작물을 내놓는 것으로 그 생명력을 다하고 말 것입니다. 저 역시 제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저만의 ‘질문’을 품고 살아가며, 글을 쓰는 다른 모든 창작자들 역시 저마다의 고유한 ‘질문’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굳이 타인에게 그 질문이 무엇인지 캐묻지 않습니다. 저 역시 제가 품은 질문을 바깥으로 소리 내어 밝히지 않습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 질문에 스스로 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써 내려간 제 작품들이 그 자리를 대신 증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창작의 동력이 되는 결정적인 ‘질문’은, 단지 본인이 머리로 원한다고 해서 인위적으로 구축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대개의 경우 자신에게 주어진 통제 불가능한 환경과, 삶에 예고 없이 들이닥친 거대한 사건들 속에서 살과 피가 부딪히며 아주 자연스럽고도 치열하게 맺어지는 굳은살 같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진짜 ‘글쓰기 재능’의 핵심 영역일지도 모릅니다. 창작자의 내면에 형성된 이러한 ‘질문’이 얼마나 밀도 있고 강력하느냐가, 곧 멈추지 않는 창작의 폭발적인 역동성을 빚어내는 근원적인 에너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농담과 마찬가지로, 전쟁이나 시대적 비극 같은 거대한 부조리 한가운데 내던져진 개인에게 형성된 질문은 생존과 직결된 것이기에 무시무시할 정도로 강력하게 작동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이 세간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배가 고파야 예술을 제대로 할 수 있다”라는 속설의 본질적인 의미라고 봅니다. 삶의 치열한 경험의 축적이 날카로운 질문을 잉태하고, 그 질문의 형태와 깊이가 곧 창작자를 추동하는 진짜 글쓰기 재능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을 하겠다며 억지로 본인을 가혹한 환경으로 몰아넣고 피학적으로 굴 필요까지는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글을 쓰다가 스스로의 한계나 거대한 벽에 가로막힌 듯한 답답함을 느낀다면, 그것은 곧 자기 내면에 축적된 경험과 사유의 세계를 지금보다 훨씬 더 낯설고 넓은 곳으로 확장해야 할 때가 왔다는 분명한 신호로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다. 저 역시 종종 그러한 한계의 순간들을 뼈저리게 느끼며, 나름의 돌파구를 강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타인의 텍스트를 함부로 평가하며 ‘재능’이 있네 없네 하는 단정적인 말을 가급적 삼가려고 합니다. (물론 일상적인 대화를 나눌 때에는 편의상 통상적인 의미의 ‘재능’이라는 표현을 섞어 쓰곤 합니다. 저 혼자만의 철학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글쓰기 재능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을 시간에, 사람들의 통상적인 인식을 융통성 있게 따라주는 것이 곧 원만한 사회생활이기 때문입니다.)

두서없이 적다 보니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고 장황해진 것 같습니다. 다소 거창하고 긴 글을 끝까지 인내심 있게 읽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긴 시간 수고 많으셨습니다.


원문은 이렇습니다(…)

뭐랄까, 말투만 바꿔달랬더니 멋대로 어느 정도 정리를 해버린 느낌이 있는데, 그렇게 되니 놀라우리만치 사람이 쓴 글처럼 보이지 않네요. 이 기묘함… 낯설군요…

창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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