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작품을 모두 읽었거나, 스포일러를 감수하실 분을 대상으로 한 비교비평글입니다. 부디, 유념해주셨으면 감사하겠습니다. 참고로 저는 이해충돌 당사자이나, 작가님으로부터 참고했다는 샤라웃을 받았기에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들어가며
<나는 그녀를 죽였다.>와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각주를 주요한 장치로 차용한 소설이다. <나는 그녀를 죽였다.>에서 각주는 페이크 르포라는 형식과 결합하여 고발문학으로서 작품의 성격을 강화한다. <초고의 끄트머리에서>에서 각주는 대화극이라는 형식과 결합하여 소설로 성립하도록 작품을 붙들어놓는다. 그리고 이 각주들이 겨냥하는 개념이 있다.
두 작품에서 각주는 각각 20세기의 거대서사 둘을 해체하는데 복무한다. 남성성과 사회주의. 거대서사는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 철학(리오타르, 다만 남성성은 그가 직접 다루지 않았다. 현재 한국 문단에서 남성성은 극복해야 하는 거대서사로 여겨지므로, 이 글도 그 흐름을 따른다.)의 주요한 비판 대상이었다. 이를테면 가부장제는 가정의 구성원은 응당 가장에게 순응해야 함을 사회 규범을 통해 강요하고, 그 가장이 남성이야 함을 자연화하여 개인에게 피해를 가한다. 또 레닌-마르크스주의는 계급해방이 이뤄져야 함을 자명하게 여기고, 해방에 도달하기 전까지 개인을 억압하는 관료국가의 존재를 영구화한다.
그러나 두 거대서사는 중요한 차이를 보인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남성성은 현실의 물리적 우월함에서 파생된 유무형의 자산을 통해 우위를 유지한다. 즉, 남성성은 자연적이나, 물리적 우위가 사라지는 상황에 취약하다. 남성성에 비하면 근래의 발명품인 사회주의는 취약점을 극복하는 능력이 존재한다. 21세기의 몇몇 마르크스주의자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계급을 개인의 속성으로 무한히 파편화하여 투쟁의 동력을 분산하여 자본에 포섭되었다고 반격한다. 남성성은 폭력으로 논리를 수립한다면, 사회주의는 논리를 바탕으로 폭력을 전개한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이 사실을 아는 것이 두 작품의 독서에 왜 필요한가. 두 작품은 얼핏 보면 각주로 거대서사를 해체한다는 점에서 유사하면서도 심대한 구조적 차이를 보이기 때문이다.
대항 담론에 대한 대항 담론. 그것이 있는가, 없는가? 각주가 본문에 대한 대항 담론이라면, 본문이 각주에 충돌하는 순간이 한 번이라도 있는가?
<나는 그녀를 죽였다.>는 나(각주)를 살해한 연인인 나(본문)의 서사를 살해하고, 나(본문)는 이에 반격하지 못한다. 인과응보를 따르는 플롯.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반동인물 소우주가 생성하는 프로파간다를 충실히 전시한다. <나는 그녀를 죽였다.>에서는 반동인물이 대항을 인식하지 못하고, <초고>에서는 대항에 대항하니 두 작품의 결말도 다르다. 한 작품에서는 남성성이 주변화된 각주에 있던 진실에 의해 패배한다. 다른 작품에서는 사회주의가 외주를 맡긴 각주로 촉발된 자기모순에 의해 작동을 멈춘다.
각주에 대한 내적 인식과 원리의 해명
<나는 그녀를 죽였다.>에서 본문의 화자를 나(본문)이라 하자. 나(본문)는 각주의 화자 나(각주)를 살해했다. 나(각주)는 나(본문)를 희화화한다. 그것은 살해된 나(각주)가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살인자는 자신의 연인을 만났던 계절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7] 우리가 처음 만난 건 봄이 아니라 11월이었다. 그는 우리 사이에 대해 제대로 기억하는 것이 없다.
– 나는 그녀를 죽였다., 12년후, p2.
나(각주)의 죽음은 비가역적이므로, 나(각주)는 나(본문)에 대한 물리적 간섭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나(각주)는 나(본문)의 변명에 대해 조롱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본문을 비웃는 각주의 연쇄와 별개로 나(본문)는 각주를 인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언어적 능력에서 퇴락을 보인다. 본문이 언어화의 능력을 잃을 때, 각주는 조롱을 넘어서 형식에 간섭을 감행해 본문을 탈취한다.
[33] 그는 더 이상 본문이 아니다. 나는 이제 본문이다. 주석은 사라졌다. 아래 여백에 작게 인쇄되는 보조적 존재로서의 나는 끝났다. 이 글에는 이제 본문이 없다. 그러므로 내가 본문이다. 이것을 그가 알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안다.
– 나는 그녀를 죽였다., 12년후, p2.
<초고의 끄트머리에서>에서 각주의 역할은 사뭇 다르다. 처음에 각주는 정지돈식 의사 인용의 유희를 보인다.
3) 학술 단체의 이름을 걸고 정부 과제를 쓸어담는 신종 범죄가 기승 중에 있다.
5) 김영래, 「수원 영통 법조타운의 형성과 해체: 사법 인프라 이전이 지역상권에 미친 영향, 2003-2024」, 『한국근현대지역사연구』 제47집, 한국근현대지역사학회, 2025, 113-148쪽.
– 초고의 끄트머리에서, 김밀세, p1.
그러나 주동 인물 피세주가 반동 인물 소우주에 의해 소멸하고 나서, 각주는 피세주가 부활하는 서사에 핍진성을 부여하기 위해 쓰인다.
[5] 나는 피세주의 능력과 반능력이 충돌해 폭발을 일으켜 만들어진 에너지 덩어리다. 피세주의 상식에 따르면, 이를 볼츠만 두뇌라고 한다.
[6] 나는 지속되고 싶은 갈망이 자신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7] 나는 열의 형태로 빠르게 전환되어 의식을 잃을 것이다.
[8] 내가 자신을 스스로 피세주로 여긴다면, 피세주의 신체를 재구성해야 할 것 같다.
[9] 내가 피세주가 아니더라도, 피세주의 신체를 재구성하면 좋을 것 같다.
– 초고의 끄트머리에서, 김밀세, p3.
최종적으로 모두가 평등했던 인류세로 돌아가기 위해서 피세주를 제외한 인류를 자기 자신으로 대체하겠다는 소우주의 계획이 성공하자, 각주는 대화극으로 전환한 본문 대신에 묘사를 도맡는다. 다음은 소우주의 영탄에 피세주가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을 묘사 지문으로 구체화한 예시이다. 이 시점에서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나는 그녀를 죽였다.>와 마찬가지로 각주를 통한 조롱을 시도한다. 소우주의 권위를 실추하기 위해서다.
장막이여 옥쇄하라. 네 빛이 말라붙어야 총원이 영도에서 벗어나 날것의 발자국을 낸다. 우상이 본연을 다하지 못할 때, 해체는 전파를 탄다.1)
1) 섬광이 하늘을 가득 메운다. 우주조약의 전면적인 폐기를 의미하는 전례없는 규모의 대기권 밖 핵실험이 행해진다. 핵무기를 감축하기 위한 그 어떤 협정보다 즉각적인 쇼. 사회주의라는 우상이 붕괴를 겪었듯이, 소우주는 더 이상 과시할 필요가 사라진 폭력의 최후를 전시한다.
-초고의 끄트머리에서, 김밀세, p6.
그러나 <나는 그녀를 죽였다>의 반동인물 나(본문)와 달리 소우주는 피세주의 희화화를 인식하고 있고, 선취, 전유, 승인이라는 전략을 통해 이를 무효화한다. 다음은 세 가지 사례들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주먹을 내질러도 격파할 송판이 없다고 말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럴 때 흔히 대중매체 속 악당은 이렇게 말합니다. 보아라, 터지는 모습이 썩 아름답지 않으냐. 자본에 포섭된 일상성에 집착하는 작가라면, 이렇게 말합니다. 소우주는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슈팅스타처럼 바스라지는 폭발을 아련히 지켜보았다. 실제로는 소우주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다다라야 할 곳에, 다다른 것입니다.3)
1)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계의 파괴자가 되었노라.
7)
반
대
는
의
무
-초고의 끄트머리에서, 김밀세
두 소설은 반동인물이 각주에 대해 인지하는지 그 여부가 다르다. 이는 각주라는 형식을 정당화하는 내적 논리가 작품 내에 탑재되었는가와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각주)는 원혼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나는 그녀를 죽였다.>는 좁게 정의하면 신체 강탈(바디스내치)이고, 크게 보면 호러라는 장르에 속하므로 나(각주)가 어떻게 각주를 달 수 있는지, 어떻게 각주로 본문을 탈취하는지 알려주지 않아도 좋다.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그건 사다코가 어떻게 화면 밖으로 나올 수 있는지 묻는 것과 같다고 할까나. 요컨대 장르의 관습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초고의 끄트머리>는 사회주의 환상문학이지만 사변소설이라는 대전제가 있으므로 피세주가 어떻게 각주를 달 수 있는지 정당화할 필요가 있다. 소설은 이렇게 응답한다. 이름이 힘인 세계이니깐, 주석과 관련된 이름을 가진 피세주는 각주를 달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해볼 수 있다. 여전히 남성성은 지구에서 공고하므로, 페어플레이를 지키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하고 쇠퇴한 사회주의를 다루기 위해서는, 공정성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두 소설은 거대서사를 무너트리기 위해 어떻게 접근할까.
거대서사에 접근하기
일전에 <나는 그녀를 죽였다.>가 페이크 르포라고 한 바 있다. 르포란 현실의 문제를 직접 고발하는 예술이다. 나(각주)는 실존 인물이 아니므로, 당연히 진짜 르포가 아니다. 그러나 여기서 페이크는 결함이 아니라 성립 조건이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고들 하지 않는가. 살해의 일차 증언자는 원리적으로 증언할 수 없다. 르포가 불가능한 자리, 그 공백에서만 페이크 르포는 정당해진다. 허구는 현실의 대용품이 아니라, 현실이 봉쇄한 발화의 유일한 통로인 것이다.
또한 작품은 거대서사에 대한 옹호를 일말도 제공하지 않는다. 나(본문)는 데이트 폭력의 필요성을 신봉하는 독자가 아니고서야 신뢰가 불가능한 화자다. 이는 재현의 윤리가 강제한 설계다. 당초에 가해자성과 남성성에 납득 가능한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어렵고 위험한 위업이다. 살인자에게 서사의 살을 붙이는 순간, 소설은 자신이 해체하려던 알리바이를 재생산하고 만다. 그러므로 <나는 그녀를 죽였다.>에서 남성성은 변호인 없이 기소된다. 앞서의 구별을 상기하자. 폭력으로 논리를 수립한 거대서사에서 폭력을 걷어내면, 변호할 알맹이가 남지 않는다.
반대로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거대서사를 복원한다. 죽이기 위해 되살리는 것이다. 작품은 이 시도가 균등화에서 동일화로 미끄러지는 병적 측면을 극대화하면서도, 독자가 따라갈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한다. 인류가 살 만했던 인류세로 돌아가자. 80억의 개별적 정체성을 소거한 학살자임에도 불구하고, 소우주는 자신의 행위가 행해야만 하는 당위라고 진심으로 믿는다. 그는 작중에서 선언한다. “진지합니다.” 그리고 작품은 이 진지함을 아이러니로 기각하는 대신 정면으로 상대한다.
여기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입장이 갈린다. 포스트모더니즘이 거대서사에 대한 불신이라면,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 베르뮬렌과 판 덴 아커의 용어로 메타모더니즘은 해체를 통과한 뒤의 재건이다. 아이러니와 진정성 사이의 진동. 모르고 믿는 순진함이 아니라, 알고도 믿는 순진함. <나는 그녀를 죽였다.>가 남성성의 해체에 집중한다면,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사회주의를 의심하면서 다시 믿어보고자 한다. 관건은 무엇을 다시 믿는가이다.
결말의 동사도 다르다. <나는 그녀를 죽였다.>에서 각주는 본문이 된다. 주변이 중심을 차지하나, 중심과 주변이라는 구조 자체는 존속한다. 전복이다. 전복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동사다. <초고의 끄트머리에서>의 결말에서 전체는 복수의 파편으로 해산되고, 그 폐허 위에 한 문장이 세워진다. “가능성을 믿어야 한다. 내가 가능성을 믿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순진한 신앙 고백이 아니다. 환멸을 전부 치른 뒤에 필연이 명령하는 믿음, 마치 가능한 것처럼 살겠다는 결의다. 재건이다. 재건은 포스트포스트모더니즘의 동사다. 그러므로 각주라는 포스트모던적 장치를 쓰면서도,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포스트모던 문학이 아니다.
인물의 평면성과 입체성
<나는 그녀를 죽였다.>는 탈개인화된 페이크 르포이기 때문에, 등장인물이 평면적이다. 가해자는 자기반성이 없고, 피해자는 주제의식을 직접 논설한다. 그러나 피해자에게 누가 슬퍼하기만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입체적 가해자가 등장했다면, 소설은 앞서 말했듯 완전히 다른 작품이 되었을 것이다. 인물의 입체성은 절대적 진리가 아니며, 절대적이라면 그것마저 절대성을 부정하는 포스트모던 문학이 극복해야 하는 대상이다.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다소 다른 양상을 보인다. 반동인물이 입체적이며, 주동인물은 평면적이다. 텍스트 중간에 삽입되는 소우주의 과거 회상은 구체적인 질감을 제공한다. 반면에 피세주는 욕망이 희박하고 장치에 더 가깝다. 체제 유지의 장치. 그 체제가 소우주가 만드는 신인류세이건, 만인 소우주화 계획을 저지하고 돌아간 앙시엥 레짐(구체제)이건.
덕분에 독자는 나(본문)에게 혐오만을 느끼게 되고, 소우주에겐 불쾌한 유혹을 느끼게 된다. 이는 어느 소설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선택이었을 뿐이다.
거대서사에 접근하기에 접근하기
두 작품에는 텍스트 접근성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고의 끄트머리에서>는 난해한 텍스트이다. 우리의 삶과 직접 맞닿지 않은 일이라는 점이 큰 지분을 차지하고 있을 터이다. 사회주의 진영의 흥망성쇠에 대한 상식을 선제적으로 요구하며, 초능력이 난무하므로 능력자 배틀물에 대한 익숙함도 필요하다. 등정에 성공한다면, 지적 퍼즐을 해결한 보상이 아마도 기다리고 있다. 동시대성과 동떨어진 엘리트주의에 물든 글이라고 비판해도 좋다. 작품의 핵심 테마는 시대착오성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녀를 죽였다.>는 훨씬 읽기 편한 텍스트이다. 일단 나의 감수성으로 읽는데 문제가 없었다. 다른 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82년생 김지영>의 페이크 르포에서 발전해서, 주석이 서사를 보충하는 것을 넘어 견인하였기에 문학적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한 형식 상의 발전을 뒤로 하고, 개인적으로는 남성성에 대한 고유한 관찰을 작품 내에서 볼 수 있었으면 더 좋겠다는 가치판단을 하였다. 무색무취의 텍스트가 독자의 수용 가능성을 높이겠으나, 거대서사에 접근하는 방식에 본인만의 개성이 있다면 더 호소력이 짙은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이런 상상을 해보았다.
마치며
하나의 이야기는 거대서사를 죽이고, 하나의 이야기는 거대서사를 살려낸다. 다시 죽이기 위해서. 너가 나의 신체를 해체했듯 나도 너의 텍스트를 해체하기. 인류세회귀라는 거창한 메시지의 허망함을 알면서도 그 본질의 진실함만은 믿어보기. 정당한 복수. 무작위 방향으로의 진보. 각자의 의미가, 자리가 있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가능한 모든 활자의 조합이 있는 그 도서관에는 공평하게도 두 소설의 역본이 함께 비치되어 있을 테니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