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문 4답] 저도…
어쩐지 쑥스럽긴 하지만,
다른 작가님들이 쓰신 글을 보고 저도 용기를 한번 내볼까 합니다.
1. 내 글에 영향을 준 창작물
1) 터미네이터
어린 시절 보았던 만화영화부터 시작해서 여러 소설과 드라마, 광고 그 외에도 여러 직간접적인 체험 모두가 소재가 되고 영향을 주는 것 같습니다. 그중에서도 작품에 직접 영향을 주었다고 할 만한 창작물을 하나 꼽아보자면, 영화 ‘터미네이터’라고 할 수 있겠네요. 유명한 작품이라 많이들 보셨겠지만, 이 영화는 저에게 여러모로 큰 충격을 준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작년 여름 ‘6월의 6시’라는 이름의 소일장에서, 폴 발레리의 원작 ‘위그든 씨의 사탕가게’ 를 패러디한 ‘위고돈 씨의 사탕가게’라는 엽편을 쓴 바 있습니다.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위고돈 씨의 사탕가게’는 영화 ‘터미네이터’를 패러디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몇몇 분들께서 재미있게 읽었다고 댓글을 남겨주셔서 감사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뿌듯한 마음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브릿G 자유게시판에서 너드덕 님이 쓰신 4문 4답을 읽다가, 빈약한 상상력을 토대로 쓴 제 소설의 원래 내용보다 더 엽기적이며 창조적인 내용으로 재구성하여 다르게 기억하신 담장 님의 댓글을 보고, ‘아, 역시 진짜는 다르구나!’라고 감탄하며 이마를 탁,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마냥 웃고 넘길 수만은 없었던 게, 양상은 다르지만 저 또한 오랜 세월 동안 잘못된 내용으로 기억한 작품이 있었으니, 그게 하필이면 바로 이 터미네이터였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터미네이터를 잘못된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었는지와 영화를 보고 어떤 충격을 받은 지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영화의 스포일러도 일부 있고, 시시콜콜 자질구레한 TMI가 넘쳐나고, 부끄러운 한편 불건전한 내용도 포함하고 있으므로 접어두겠습니다. 좀 지루하고 별로 유쾌한 내용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웬만하면 보지 마세요.
워낙 오래된 일이라 제대로 기억나지는 않습니다만, 무더운 여름날이었을 겁니다. 아마도 집에 저는 혼자 있었겠죠. 심심하던 저는 엄마가 TV 위에 올려두신 용돈을 들고 비디오 대여점에 갑니다. 그리고 제법 진지한 태도로 뭘 볼지 고르고 있었을 겁니다.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좋은 영화와 나쁜 영화를 구분하는 확고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좋은 영화란, 제목 = 주인공 인 영화였습니다. 동화책으로 치자면, 장발장은 옳은 제목이지만 레미제라블은 어딘가 한참 잘못된 제목이었습니다. 영화도 마찬가지였죠. 슈퍼맨이 주인공인 영화는 제목이 슈퍼맨이어야 하고, 배트맨이 주인공인 영화는 당연히 배트맨이 제목이어야 했습니다. 그간의 얼마 안되는 인생 경험을 종합해 볼 때, 제목과 주인공이 일치하는 영화는 꿀잼을 보장하는 띵작이었습니다. 반면, 긴 문장 형태로 괜히 고상한 척하거나 알쏭달쏭한 제목으로 소비자를 현혹하는 영화 (특히 포스터에 무슨 무슨 상을 엄청나게 받았다고 트로피를 빼곡히 새겨두었다든가, 심지어는 상을 받은 것도 아니면서 후보에 올랐다고 뻐기는 파렴치한 – 소위 어른들이 보는 영화)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영화였고 제게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아울러, 대여할 비디오를 선택하는 데에도 철칙이 있었는데 그건, 신프로가 아닌 구프로에서 고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숨은 명작과 고전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새로운 것만 찾는 세태를 안타까워했기 때문은 아니고 그냥 싼 구프로를 대여하면 남은 돈으로 과자를 사 먹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리저리 비디오를 고르는 중에, 저는 제 수준에 딱 맞는 작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제목만 봐도 발음상 뭔가 스펙타클한 분위기가 팍팍 풍기는, ‘터미네이터2’ 였습니다. 저도 익히 명성을 들은 적이 있었고, 구프로임에도 불구하고 복본이 여럿 있는 걸로 보아 인기작이 분명했습니다. 비디오 케이스를 뽑아 들자, 표지에는 말할 필요도 없이 선글라스와 가죽 잠바를 걸치고, 오토바이를 탄 채 총을 든 사나이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정직한 제목. 정직한 표지. 박력 넘치는 주인공. 그리고 안에 들어있는 테이프의 묵직한 무게감.
이 모든 것은 저를 사로잡기에 충분했습니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죠. 그건 바로 ‘터미네이터2’라는 제목에 붙은 숫자 ‘2’였습니다. 맞습니다. 1편을 보지 않고 2편을 본다는 것은 매우 불경스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죠.
비디오 대여점의 우수 어린이 고객으로서, 저는 1, 2, 3편처럼 시리즈로 제작된 작품들은 나란히 배치해 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터미네이터 1편이 보이지 않자 저는 아저씨께 물었습니다.
“아저씨, 1편은 없어요?”
아저씨의 눈길이 향한 곳은 저 멀리, 제 머리보다 높은 곳이었습니다. 아, 그곳은… 빨간 딱지의 영화들이 수두룩하게 진열되어 있는 미성년자관람불가 코너였습니다. 키가 작아서였는지, 성인용이라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비디오는 제 손이 닿지 않는 금단의 영역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제가 찾던 작품은 그 아득히 높은 곳에서, 제목에 ‘1’이란 숫자조차 붙지 않은 순수한 ‘터미네이터’라는 이름으로, 복본도 없이 홀로 고고하게 그러나 조금 쓸쓸한 모습으로, 마치 한때는 융성했으나 이제는 잊혀져버린 오랜 왕국처럼 서 있었습니다.
숨은 명작과 고전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새로운 것만 찾는 세태를 안타까워하던, 어딘가 쿠엔틴 타란티노를 닮은 아저씨는,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마냥 인기에 휩쓸리지 않고 근본부터 살필 줄 아는 바람직한 비디오 키드를 대견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손수 테이프를 꺼내어 제 손에 쥐어주셨습니다.
테이프를 손에 넣은 저의 가슴은 떨렸습니다.
터미네이터
미성년자 관람불가
(당시 저희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는, 비록 성인물 등급이긴 해도 그 장르가 에로틱한 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미성년자에게도 대여를 해주는 관대하고도 융통성 있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당시 비디오 가게 아저씨는 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비디오 가게에 앉아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곤 비디오를 보는 일이 전부였으니까요. 공공연히 말을 하고 다니지는 않았지만, ‘비디오 가게 사장’은 한때 저의 장래 희망이었던 슈퍼마켓 주인을 밀어내고 대체 불가능한 최고의 로망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였습니다. 슈퍼마켓에서 하는 들쑥날쑥 자질구레한 물품 관리와 비교해보면, 깔끔한 사각 케이스에 수납된 비디오테이프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샵에서 고객의 마음을 설레게 할 컨텐츠를 제공하는 하이테크 사업은 세련되어 보일 수밖에 없었죠.
어쨌거나 저는, 전편의 흥행을 내세워 작품성을 내팽개치고 비겁하게 자본논리와 야합하여 ‘고등학생이상관람가’라는 미적지근한 등급으로 전락해 버린 터미네이터2를 조금은 비릿한 미소로 돌아보며, 아저씨가 비닐봉다리에 담아 주신 빨간 딱지의 ‘진짜 터미네이터’를 손에 들고서, 발걸음도 당당하게 비디오 가게를 나왔습니다. 그리고 아마 슈퍼마켓에 들러 남은 돈으로 더위사냥 같은 걸 사 먹었을 겁니다.
집으로 돌아와 경건한 마음으로, 빛이 들어오면 안 되니까 커튼을 치고 테레비를 켠 후, 채널을 4번에 맞추고 비디오에 테이프를 밀어 넣습니다. 치지직 거리던 화면이 파란 바탕으로 바뀌고 PLAY▶ 라는 글씨가 뜹니다. 곧이어 ‘경고’라는 고딕체 글씨와 함께 ‘이 비디오물은 미성년자관람불가 등급입니다. 따라서 만 18세가 되지 않은 연소자는 어쩌구저쩌구…‘라는 구태의연한 문구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지만 가볍게 흘려보냅니다. 왜냐하면 저는 비디오 시청의 등급 결정에 관한 실질적인 최고 권위자-비디오 가게 아저씨-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은 몸이기 때문입니다.
두둥 둥두둥! 두둥 둥두둥!
영화가 시작되자, 미래를 배경으로 한 SF 액션 영화의 국룰 답게 세상이 어떻게 망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시작됩니다. 자막으로 뭔가 어려운 말이 나오긴 했지만, 대충 세상이 결딴 나서 기계와 인간이 편을 나눠서 싸우는 중이라는 뭐 이런 내용으로 이해했습니다.
그리고 시점은 현재로 바뀌어, 잘은 모르지만 미국의 뒷골목 같은 곳이 나옵니다. 하늘에 번개가 꾸르릉 하더니, 갑자기 아가처럼 홀라당 벗은 남자가 무릎을 꿇은 채 나타납니다.
아, 저는 여기서 일단 충격을 한번 먹습니다. 아무런 경계심도 없이, 무방비 상태에서 보는 와중에 (비록 뒷모습이었지만) 팬티도 안 입은 전라의 남성이 눈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저는 터미네이터가 대충 스포츠머리에 선글라스 낀 인조인간 아저씨가 총질하는 영화라고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장면이 나올 거라곤 전혀 예상 못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도 다 언젠가 성인용 비디오를 대여해서 보게 되었을 때 받을지 모르는 갑작스러운 충격에 대비하여, 일종의 선행 학습을 통해 완충 장치 또는 백신 기능을 하도록 배려한 비디오 가게 아저씨의 선견지명 아니겠습니까.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잠시 후에 또 번개가 치고 다른 알몸의 남자가 쓰러진 채로 나타나는데, 아까와는 달리, 뭐랄까, 털 뽑힌 한 마리의 닭처럼 처량해 보였습니다.
아무튼 먼저 왔던, 딱 봐도 쎄보이는 그 근육질의 남자는 불량배들을 때려죽이고 옷을 빼앗아 입습니다. 그리고 공중전화 부스에 들어가서 전화번호부를 뒤지며 사라 코너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를 전부 죽이러 다닙니다.
하지만 서스펜스 영화의 공식답게, 죄 없는 동명이인의 인물만 죽어 나가고 서서히 긴장감이 조성되며 진짜 사라 코너에게는 조금씩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집니다. 그때, 아까 털 뽑힌 닭처럼 비실거리던 사내가 나타나서 자기는 미래에서 왔다는 설명과 함께 사라 코너를 구해주고, 터미네이터를 피해 함께 도망을 다닙니다.
인제야 저는 조금씩 상황 파악이 됩니다. 아… 그러니까 이 터미네이터는 나쁜 놈인 겁니다.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터미네이터가 나쁜 놈일 거라고. 약간의 배신감이 들긴 했지만 그것도 잠시, 어떤 불온하고도 상쾌한 느낌이 제 마음을 채웁니다. 야, 이게 어른의 영화구나! 그동안 죠스나 고질라와 같은, 빌런인 동시에 주인공이면서 제목이기도 한 영화를 보기는 했지만 그런 건 무차별적인 테러를 감행하는, 그저 재앙 덩어리라고 부를만한 한심한 괴수가 등장하는 영화였고, 터미네이터처럼 인간형의 로봇이 주인공으로 나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 타겟을 살해하러 다니는 영화는 처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고리타분한 ‘선 = 정의 = 주인공 = 제목’이라는 공식을 거침없이 파괴하는 빨간 딱지의 세상이었습니다. 저는 또래 코흘리개와는 달리, 적어도 영화에 있어서만은 확실한 어른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겁니다.
새로운 흥분에 사로잡혀 영화를 계속 감상하는데, 충격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무시무시한 터미네이터에게 쫓겨 도망 다니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 난데없이 여인과 사내의 뜨거운 정사가 펼쳐진 것입니다. 어른들 보는 영화가 괜히 야한 장면을 끼워 넣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게 지금 여기서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언젠가 성인용 비디오를 대여해서 야리꾸리한 장면을 보게 될 그날이, 상상을 초월한 속도로 일찌감치 도래한 것입니다. 상식을 깨부술 만큼 급진적인 비디오 가게 아저씨의 커리큘럼을 미처 감당하지 못했던 제가, 유난히도 노이즈가 많이 껴서 화질이 고르지 않았던 그 구간에서 기억하는 것은 정사 도중에 여인이 침대의 머리맡에 놓인 탁상시계를 거꾸로 들어 올리는 장면이었습니다. 이것이 어떤 복선이 되는 장면이라는 것은 (제 마음대로) 나중에 깨닫게 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주인공이면서 제목이면서 동시에 악당인 터미네이터는 끈질기게 여인과 사내를 쫓아옵니다. 그러다가 터미네이터는 어찌어찌하여 바보처럼 자기가 몰고 있던 트럭과 함께 폭발해 버립니다. 근데 잠시 후, 죽은 줄 알았던 터미네이터는 그나마 남아있던 거추장스러운 피부를 말끔하게 태워 먹고, 빨간 눈을 가진 은빛 해골 기계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여 걸어 나옵니다. 아, 이건 호러 그 자체였습니다.
여인과 사내는 어떤 공장 같은 곳으로 들어가서 도망을 치다가 결국 잡히고 마는데, 위기의 순간 사내가 터미네이터의 배에 폭탄을 박아 넣어서 터미네이터는 폭발하고, 사내는 죽게 됩니다.
하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폭발했던 터미네이터가 죽지도 않고 상반신만 남은 채로, 전설의 고향에서 내 다리 내놔라 하는 귀신처럼 바닥을 기어서 끈질기게 여인을 쫓아옵니다.
여인은 도망치다가 좁은 기계 같은 곳으로 들어가고, 이에 질세라 터미네이터도 따라 기어들어 옵니다. 하지만 여인은 먼저 구멍에서 쏙 빠져나와 기계 장치의 작동 버튼을 누릅니다. 기계장치가 덜커덩 내려오고, 구멍을 기어서 따라오던 우리의 주인공 터미네이터는 프레스 기계에 짜부가 되어, 눈에서 나오는 빨간 불빛을 잃고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보통 영화에서는 상황이 이렇게 되면, 따로 신고하지도 않았는데 때를 맞춰서 앰뷸런스와 경찰차가 사이렌을 울리면서 찾아와 현장을 수습해 줍니다. 잘 기억은 안 납니다만 이때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배가 불룩해진 여인은, 카세트테이프 녹음을 통해 ‘너희 아빠는 용감했단다’와 같은, 마치 베트남 참전 미군 용사의 미망인이 할 법한 멘트를 뱃속에 들어있는 아들(아까 그 사랑의 결실)에게 남기며, 어딘가 조금은 성숙해지고 터프해진 모습으로 지프차를 타고 사막 같은 곳으로 떠납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라는 분위기의 여운을 남기며 영화가 마무리되죠.
…
자, 이렇게 영화가 끝났습니다. 혹시… 아직도 읽고 계신가요? 네. 그럼 더 해보겠습니다. 영화는 SF 액션 호러 서스펜스 스릴러(+에로) 무비의 모범 사례처럼, 공포의 절정에서 위기가 해소되고 끝이 납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결말부에서 전율할 만한 여운을 남기는데요. 그것은 미래에서 온 사내가 나중에 사라 코너의 아들인 존 코너에 의해 다시 과거로 거슬러 올 것임을 알리며, 영화의 시작 부분을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저도 여러 매체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옛날로 가서 공룡을 만나는 따위의 이야기를 보았기 때문에 시간 여행의 개념이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A라는 원인이 B라는 결과를 만들고, 그 B라는 그 결과가 다시 A의 원인이 되는, 무한한 폐곡선의 시간관념은 어린 저에게 너무나 파격적인 설정이었습니다. 이때 제가 느낀 엄청난 지적 희열은 훗날 아이작 아시모프의 ‘최후의 질문’을 읽었을 때의 감동에 비해 절대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 멋집니다. 이것이야말로 영원 회귀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니체의 철학을 SF라는 장르적 장치를 사용해, (물론 애들 보라고 만든 건 아니지만) 저 같은 꼬맹이조차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낸 훌륭한 수작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저는 진짜 충격에 휩싸이게 됩니다.
아, 그것은 지금까지 영화를 보면서 느낀 공포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옵니다.
제 머릿속을 강타한 생각은, 정말 엉뚱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에…! 자기가 자기 아들로 태어나다니!
…라는 것이었습니다.
잠깐, 이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안 가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여인의 뱃속에 있던 아기가 나중에 자라서, 미래에 기계와의 전쟁이 벌어진 세상에서 여인을 구하기 위해 다시 과거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오는 걸로 이해했던 겁니다.
… 좀 어처구니가 없으실지도 모르겠으나, 변명을 좀 하자면, 당시 제가 영화를 이해하는 수준은 미개함 그 자체였기 때문에, 자막은 거의 대충 보고 그림만(…) 보는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를테면 어떤 범죄 영화에서,
– 맥스! 큰일났어!! 루이스를 죽인 게 네이트가 아니라 록키라는 사실을 마이키 녀석이 경찰에게 불어버렸어! 젠장, 우리가 렉스 패거리의 손에 놀아난 거라고!
– 뭐? 이런 비열한 로이드 자식! 언젠가 배신할 줄 알았어. 내가 마크 그놈을 주의하라고 그렇게나 경고했는데…
이런 장면이 나온다고 칩시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맥스(듣는 사람)나 루이스(아까 죽은 사람)까지는 알겠는데 나머지는 도저히 누군지 전혀 모르겠는 겁니다. 영화에서는 분명히 중요한, 반전과 놀라움의 요소를 가득 담은 결정적 장면일지라도, 저는 엥? 무슨 소리야. 아까부터 계속 말로만 떠들고… 총 쏘는 건 언제 나오지? 이러고 앉아 있는 겁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당시, 어린 제가 뱃속에 든 인물과 구하러 온 사람이 동일 인물일 거라고 착각한 데에는, 그간 시청했던 히어로 영화들에서 보인, ‘중요한 인물이 전면에 나선다’는 법칙에서 비롯된 인지 편향 탓도 있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아직 성인 영화의 내러티브에 익숙하지 못했던 꼬꼬마로서, 영화 내내 코빼기도 비치지 않던 존 코너, 즉 ‘숨겨진 주역’이라는 인물을 상상해 낼 만한 능력이 모자랐던 탓에, 그냥 보이는 사람을 그 빈 자리에 채워 넣은 거라고 여겨집니다.
그전에 테레비에서 보아왔던 만화영화에서, 잃어버린 엄마를 찾아 떠나는 모험 같은 소재는 그리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잃어버린 엄마(인 줄도 모르고)를 찾아서 미래에서 과거로 시간여행을 하는 이야기는 본 적이 없었던 겁니다. 그렇게 도착한 과거에서 사내는 여인과 함께 터미네이터를 피해 도망을 다니다가 그리고… 아…
그랬습니다.
그건 SF적, 서사적, 생물학적, 존재론적, 윤리적 충격을 저에게 동시에 안겨 주었습니다.
….
그다음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비디오테이프를 반납했는지, (보통은 테이프를 감아서 반납하는 게 매너인데 아마 그때도 그렇게 했을 겁니다) 연체를 하진 않았는지 (두 번 본 기억은 없는 걸로 보아 바로 반납했던 것 같긴 합니다) 아무튼 생각이 잘 안 나네요.
다만 그 이후로는 어떤 영화를 보든지, 예상치 못한 장면에서 뜬금없이 정사 장면이 나오더라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달리, 포스터에 화려한 수상 이력을 자랑하는 긴 제목의 영화들도 어쩌다 한 번씩 대여해 감상하면서, ‘그리 나쁘지 않군’ 또는 ‘꽤 괜찮은데?’라는 생각도 했던 것 같습니다.
가끔 TV에서 진행하는 ‘출발! 비디오 여행’ 같은 프로그램에서, 자기 몸을 수은처럼 자유자재로 변형해 가며 쇠창살을 통과하는 액체 인간을 피해, 긴 앞머리의 미소년 에드워드 펄롱을 오토바이 앞좌석에 앉혀 태우고 장총을 휘두르는 터미네이터의 모습에 몇 번 눈길이 가긴 했지만, 그건 제가 알고 있는 터미네이터가 아니었고, 그저 전작에서 캐릭터가 인기 있었다는 이유로 악역이었던 터미네이터를 억지로 부활시켜 무리하게 선역으로 변질시킨, 그야말로 야비한 상술의 극치인 작품이었기 때문에 그게 터미네이터2 인지 터미네이터3인지 별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건 전작에서 사력을 다해 싸우다 비참한 결말을 맞이한 주인공의 활약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니고 뭐겠습니까. 그러다가 나중에 액체인간이 인기가 많아지면 액체인간이랑 터미네이터랑 편 먹고 또 새로운 악당이랑 싸우고 뭐 그럴 거 아닙니까. 아무튼 그 이후로 터미네이터는 제 관심 속에서 멀리 사라졌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제가 터미네이터의 원래 내용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 저는 달리는 지하철 안에서 제가 아는 분과 함께 영화에 대한 얘기를 한창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이 전 세계를 강타하고 있었고, 저와 이야기하고 있던 분은 어벤져스 시리즈의 1편인 ‘아이언맨’을 시작으로 인피니티 사가의 모든 작품을 개봉할 때마다 순서대로 챙겨 보아왔을 정도로 SF/액션영화를 즐겨보시는 분이었습니다. 저도 엔드게임을 보긴 했지만, 그 전에 인피니티 사가의 작품 중 4~5개 정도밖에 보지 않았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함께해 온 거대한 이야기가 그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 감동을 고스란히 받았을 그 분을 부러워하며, 제가 미처 알지 못했던 어벤져스의 숨겨진 이야기 따위를 재미나게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저도 예전에 보았던 감명 깊은 작품들을 얘기하던 도중, 어릴 적 저에게 가장 큰 충격을 선사했던 터미네이터의 결말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마지막 장면에서 지프에 탄 사라 코너가 뱃속의 아들에게 메시지를 남길 때 그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여인을 다시 구하러 오게 될 것을 알게 된 장면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제 말을 들은 그 분은 순간 충격에 휩싸였습니다.
아니! 그게 그런(?) 영화였냐고…! 하시면서 말이죠.
저는 그렇다고, 아직 터미네이터 안 보셨냐면서 그분께 말했고, 아마 그분도 그 장면을 인상 깊게 보았으리라고 생각했던 제 예상과는 달리 조금 의외의 반응을 보이시길래, 저는 터미네이터2나 3 같은 상업적인 작품에 휘말려 1편의 진가를 모르고 계신 그 분께 좋은 작품을 하나 소개해 드린 것 같아 내심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분은 그럴 리가 없다면서… 어질어질한 듯한 몸짓으로 스마트폰을 들어 재빠르게 검색을 해보시더니, 그게 아니라고 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제서야 저는 엑스파일처럼 오랜 세월에 파묻혀있던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뱃속에 있던 아이는 존 코너라는 인물이고, 미래로 와서 여인과 함께 터미네이터를 피해 도망을 다니던 남자는 카일 리스라는, 이름도 생각나지 않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 존 코너가 카일 리스라는 남자를 미래에서 과거로 보내어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게 했고, 카일 리스는 다름 아닌 존 코너의 아버지였다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아귀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서사를 그때 알게 된 겁니다.
오랜 세월동안 영화의 내용을 착각하여 잘못 알고 지낸 저로서는, 이거야말로 거의 어벤져스 엔드게임에 나오는 타노스에게 핵펀치를 정통으로 두들겨맞는 듯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건 정말로 유구한 역사를 가진 기억의 대반전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새롭게 알게 된 원래의 스토리를 곱씹다 보니 어쩐지 또 좀 싱거운 듯한 느낌도 받았습니다.
아무튼 저는 그분께 거짓된 내용으로 놀래켜 드려 죄송하다고 재빠르게 사과를 드렸습니다. 다행히도 평소 인품이 너그러운 그분은 괜찮다고 하셨고, 이어 마음이 놓인 저는 그분께, 이런 오해나 착각들이 다 창의력의 씨앗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는 둥, 비평의 역사는 곧 오독의 역사 아니겠냐는 둥 하는 무슨 터미네이터 잠꼬대하는 소리 같은 궤변을 늘어놓았던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 빨간 딱지의 터미네이터와 파란 딱지의 터미네이터2 중에서 한 가지를 골랐던 상황이, 괜히 매트릭스에서 네오가 빨간 약과 파란 약을 고르는 장면과 오버랩되어 느껴지기도 합니다만, 뭐 그렇다고 파란 딱지의 터미네이터2를 골랐다고 해서 제 인생이 크게 달라졌을 거라곤 생각되지 않습니다.
2) Everything is a Remix
그리고 창작에 대한 제 기존 가치관을 완전히 뒤바꿔놓은 영상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Kirby Ferguson 이 제작한 ’Everything is a Remix’라는 영상입니다.
Kirby는 세상의 모든 새로운 창작물(음악, 영화, 산업 제품, 심지어는 생명체의 발현까지도)은 ‘복사’, ‘변형,’ ‘결합’이라는 단순한 세 가지 원리에 의해 만들어진다고 하며, 이 세 가지 요소가 창의성의 근원이라고 설명합니다. 이 영상은 여러 시리즈로 제작되었으며, 매우 놀라운 통찰과 흥미로운 사례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제 창작물에서 패러디가 서슴없이 사용되는 데에는, 이 시리즈의 영향이 있었음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이 시리즈는 소설뿐만 아니라 장르 불문하고 창작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 권하고 싶은 저의 강력한 추천작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MZ2GuvUWaP8
2. 내 글의 지향점
아직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런 걸 찾아나가는 게 글쓰기의 여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른 분들이 재밌게 읽어주시면 물론 좋지만, 스스로가 만족하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만족적인 글을 추구합니다. 세 글자로 ‘자만추’라고 할 수 있겠네요.
다만, 무심코 쓴 제 글이 누군가에게 상처가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쓰고 싶은 이야기, 또는 써야 할 것 같은 이야기, 아니면 강렬하게 쓰고 싶지만 절대 쓰면 안 될 것 같은 이야기(…)를 쓰는 데 제약이 생기는 것도 좀 곤란하기 때문에, 이런 딜레마에 대해서는 항상 어려운 숙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 내가 세운 목표에 어느 정도 도달했는지
대외적인 목표나 욕심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가끔 소설을 쓰고, 누군가가 재미있게 읽어주면 그걸로 된 것이니 이미 목표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하지만 억지로 야망을 조금 품어보자면 그래도 역시, (그게 뭔지 모르겠지만) 조금 더 좋은 작품을 더 많이 쓰는 것 정도가 되려나 싶네요.
물론 제가 쓴 소설들이 단행본으로 출간된다든가, 넷플릭스로 영상화되어 전 세계 160개국에 스트리밍이 되는 것도 기쁜 일일 겁니다. 휴고상 같은 걸 받아서 식탁에 올려두고 밥 먹을 때마다 쳐다보는 것도 제법 흐뭇한 일이 될 테고, 한겨레문학상이나 맨부커상 받았다고 아파트 경비 아저씨나 야구르트 아줌마에게 자랑한다든가, 노벨 문학상 받은 기념으로 저녁 회식 때 코다리찜이나 참치회 같은 거 한턱 쏘는 것도 분명 기분 좋은 일입니다.
아니면 생뚱맞게 일본의 아쿠타가와상 같은 걸 받으면 신기하기도 할 테고, 제 작품이 현진건 황순원 같은 작가들의 작품과 나란히 교과서에 실린다든가, 외계의 지적 생명체를 탐사하는 우주선에 실린 레코드판에 새겨지는 것도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저는 그저 재미있는 작품을 써내는 것이 가장 보람 있을 것 같네요.
별개로, 올해는 다른 목표를 하나 갖고 있는데… 리뷰를 한번 써볼까 합니다. 그동안 제가 다른 작가님들의 글에 리뷰 쓰기엔 깜냥이 안된다 싶어서 엄두를 못 내고 있었는데, 없던 깜냥이 갑자기 생긴 건 아니고요, 아무래도 리뷰를 쓰는 것이야말로 ‘읽고, 쓰고, 생각하기’의 삼박자를 고루 갖춘 활동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러니까 이것도 자기만족을 위해 하는 겁니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올해 안에는 꼭 도전해 보고 싶네요. 쓰면 많이들 읽어주세요.
4. 글이 안 써질 때 나만의 방법
아직 글을 쓴 지 얼마 되지도 않았고, ‘글이 안 써진다’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많이 써 본 게 아니라서, 이게 진짜로 글쓰기 장벽인지 그냥 경험 부족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사실 잘 안 써진다고 느낀 적이 많이 없긴 합니다. 쓴 게 별로 없으니까요.
어쨌거나 이런 저도 잘 안 써질 때가 있긴 한데요. 이야기가 막히거나 아이디어를 얻고 싶을 땐 저 역시 다른 작품을 읽기도 하고 유튜브에서 이런저런 영상을 보기도 합니다만, 뭐가 막히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그런 걸 봐도 그 자리에서 바로 써먹어지지는 않더라구요. 대신, 그럴 때 봐둔 것들은 한참 나중에 소화가 되어서 그제야 좀 도움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응급책으로 갖다 쓸 수 있는 방법은, 적어도 글쓰기에서 저는 아직 찾지 못한 것 같아요. 저는 좋은 생각이 주로 심적으로 이완되었을 때 많이 생겨나는 편인데, 어깨에 힘주고 잘 쓰려고 하는 것 자체가 긴장의 상태라, 구하려면 안 구해지고, 가만히 있으면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 아이러니를 겪곤 합니다.
그리고 쓰다가 좀 지루해지면 뒷부분을 당겨와서 쓰기도 합니다. 결과를 먼저 진술하고 원인을 서술하다 보면 좀 새로운 관점에서 보이기도 하구요. 뭐 그렇습니다.
그러다가 결국 안 되면, 그냥 접어둡니다. 어차피 연재작도 아니잖아? 하는 마음으로요. 쓰던 작품은 내려놓고, 스케치북 한 장 넘겨서 그림 새로 그리듯이, 다른 작품을 새로 씁니다. 그러다 보니, ‘아무래도 망친 것 같은 작품’을 얼마나 붙잡고 씨름하는 게 현명한 건지 고민이 되기도 합니다. 그만두는 건 쉽지만, 이게 습관이 되면 곤란하니까요. 다른 분들은 풀리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망한 것 같은 소설을 어떻게 처분하는지 궁금하네요. 1. 꾸역꾸역 완성한다. 2. 일단 접어두고 다른 걸 쓴다. 3. 기왕 망친 거 더 망쳐서 괴작으로 만든다. 4. 기타
그리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싶긴 하지만 아직 이야기로 잘 빚어낼 자신이 없는 소재들’도 있긴 한데, 그런 건 무리하지 않고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소양이 쌓일 때까지 기다려볼까 합니다. 예전에 이문열 작가님이 대하소설 변경의 서문에서 ‘내가 산 시대의 거대한 벽화를 그리겠다’라는 야심을 품었다고 쓴 걸 본 적이 있는데, 그걸 실제로 시도하신 게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 시도는 단순히 야심 같은 걸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가해져야 가능한 일이겠죠.
아직 장편은 좀 더 기다려야 쓸 수 있을 것 같고요. 당분간 중단편과 엽편을 쓰면서 조금씩 경험을 다져볼까 합니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좀 더 큰 이야기도 쓸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여기까지입니다. 쓰다 보니 주절주절 말이 길어졌네요.
재미있는 이벤트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들 건필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