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보험사]
고전적인 아이디어에 전개 방식도 고전적이군요. 이런 아이디어가 참신했던 시절이었다면 아이디어 하나로 승부하는 전개로도 충분했을 테지만 작품 외적 환경의 변화로 좀 아쉽습니다. 물론 날것 그대로의 아이디어 뿐만이 아니라 현 시대의 주요 사회 문제를 가져온 점은 주목하고 싶습니다. 그 문제의 원인을 개인에게 돌리는 – 결국 너를 죽이는 건 너다. – 작가의 해석은 공감하기 싫고 자못 위험하게까지 보이지만, 읽은 사람의 입맛을 쓰게 만드는 문학의 힘은 멋진 거죠.
[지금 여기]
단단하군요. 좋은 일이지만, ‘딱딱하다’가 될까 하는 노파심에서 너무 빨리 자기 스타일을 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 남겨봅니다. 더 좋아질지도 모르는데 그냥 굳어버리면 아깝잖습니까? 이 아이디어도 낯이 익습니다. 공모전의 성격상 어쩔 수 없을지도 모르겠군요. 그리고 아이디어의 소화 정도는, 유감스럽지만 흡족하다 할 정도는 아닙니다. 다른 이의 타임루프에 걸린 ‘나’가 이전 ‘회차’들을 기억하고 있다면 그 세계의 다른 모든 이들, 특히 살해당한 두 사람도 기억을 해야 하지 않습니까?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창작자는 허가 받은 사기꾼입니다만 이건 공들인 사기라 부르긴 어렵습니다.
[네버 체인지]
예. 타임 리프라면 하나 정도는 나와줘야죠. 내기. 소재의 힘을 믿고 어깨에 힘 빼고 쓴 것 근사합니다. 개인적으로 창작물에서 암흑 물질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나비 효과 등은 이제 좀 안 봤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이나 비유가 멋진 탓에 제대로 이해 못한 창작자가 오용하는 경우가 많아서 그렇습니다. 그 중 나비 효과는 보통 작은 힘으로 큰 결과를 만들어내는 아르키메데스의 지렛대 비슷한 이야기로 오해되곤 하죠. 애석하게도 여기서도 그렇고요. 그러나 작품에 뭘 넣고 뭘 넣지 않을지는 작가 마음이죠. 독자는 평가만 가능할 뿐. 이 작품에선 이야기에 흠을 낼 정도는 아니라고 평가합니다.
[하나의 미래]
제목의 중의법이 마음에 듭니다. 디테일을 살펴 보면 엉성한 부분들이 (질식할 듯한 먼지는 묘사하면서 기온은 묘사하지 않는 부분이라든가, 체포권이 없을 텐데 체포영장을 받겠다는 비경찰이라든가, 운석이 지구를 때리는 정도의 폭발은 지금도 태양에서 쉼없이 일어나고 있다든가, 찾아 보면 꽤 나오는군요.) 보입니다만 제 기준으로는 그럭저럭 수용 가능한 범위입니다. 그런데 인물… 전반부에서 좋은 솜씨로 잘 묘사해놓은 인물의 후반부 변화가 좀 싱거운 느낌입니다. 전반부를 봤기에 높아진 기대치에 못 미친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군요.
[꼬리가 없는 하얀 요호(妖狐) 설화]
고민해가면서 글 많이 써 본 사람은 확실히 티가 나죠. 플롯 무난하게 좋고 내레이션 괜찮고. 백이숙제가 작품 시점 기준으로 이천오백여 년 전의 인물임을 생각하면 ‘삼백 년 전엔 흔적도 없었던 이치’라는 요호의 발언에 입을 벌리게 됩니다만 요호가 의도적으로 사실을 곡해하는 것이거나 무지해서 그러는 거라 이해하면 넘어갈 만합니다. 하지만 정직하게 공부만 했다는 낭군은 사기열전 정도는 읽었을 텐데요. 낭군의 유자다움에 대한 묘사가 좀 모자란 기분입니다. 그게 갈등의 원인인데 말이죠. 더 좋은 작품으로 만나고 싶은 기대가 드는 글이었습니다.
[극히 드문 개들만이]
액자식 구성일 경우 외부 이야기 덕분에 내부 이야기가 더 큰 리얼리티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만, 그 말은 바꿔 말하면 내부 이야기 때문에 외부 이야기가 리얼리티를 잃을 위험이 있다는 말도 됩니다. 이 작품의 외부 이야기는 보리의 탄생이 무의미하다는(‘나’는 그냥 타인의 강권에 의해 타성적으로 게임을 설치했고 결국 소설도 안 썼죠.) 것과 보리의 하루가 반복되는 이유(그냥 ‘내’가 버그가 일어나는 오래된 운영 체제를 쓰고 있었죠.) 등을 설명하는, 정말로 내부 이야기의 리얼리티 형성용으로만 기능하고 있습니다. 모처럼 액자식 구성을 사용했다면 외부 이야기도 자체적으로 이야기가 될 만큼 썼으면 어땠을까 싶군요.
[그럼에도]
어둡고 무거운 스토리와 수다스럽고 성인 ADHD인가 하는 의문이 드는 화자 사이의 괴리가 계속 눈에 밟힙니다. 현실에서 아프고 괴롭다고 계속 떠드는 사람을 보면 저 작자가 진짜 아프거나 괴로운 것인지 아니면 관심이 고픈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죠. 소설 속의 화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괴롭고 힘든 등장 인물을 표현할 때 그 등장 인물이 계속 괴롭고 힘들다고 말하게 하는 건 대개 좋은 수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펑서토니의 마임이스트]
준수한 묘사는 글 많이 읽고 쓴 분의 솜씨처럼 보이는데 스토리텔링이 왜 이런 건지 모르겠군요. 이 작품의 스토리를 제 나름대로 짜맞춰보면 불행한 아터는 죽음으로써 윤지와 오영(어머니와 연인. 여신 아키타입을 나눠놓았군요.)을 불렀고 오영은 거기서부터 윤지의 조력을 받아 시행 착오를 겪어가며 이 겨울의 장례식장에서 그 여름의 축제현장으로, 과거를 바꿀 수 있는 그 결정적인 날로 돌아간 것이다… 이렇게 볼 순 있는데(이렇게 정리하니 정말 예스러운 ‘부덕이나 불운으로 파멸한 남성을 저승이나 눈의 여왕의 궁전이나 과거까지도 갈 수 있는 여성이 구원하는’ 서사군요.), 저는 작가가 정말 이런 스토리를 말하고 있는 건지 확신할 수 없습니다. 인물들의 동기가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탓으로 보입니다. 동기를 ‘적시’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독자가 ‘인지’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비가 오면 데려다줄게]
심사자에겐 작가가 기발한 타임 리프를 만들어내려다가 오류를 범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중에는 ‘민형과 고교 3년 동안 연인으로 있다가 졸업 후 해외로 떠난 연주’와 ‘다른 연주를 알고 있으면서 심화반 시험에서 2등을 하지는 않은 민형’이 언급되는데 이 두 인물은 제대로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타임 리프물에서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패러독스로 생각하고 넘어가려고 해도 그러기 어려운 것이, 이 두 인물은 각자 민형에겐 ‘연주와의 재회’를, 연주에겐 ‘운명의 상대와의 만남’을 소망하게 만든 인물들입니다. 중요 인물이죠.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할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백만 번의 종말]
많은 경우 장편소설 결말의 주인공은 전개와 위기와 절정 과정을 통해 발단의 주인공과 달라진 인물, 켐벨의 표현을 빌린다면 모험에서 귀환한 영웅입니다. 샤이어로 돌아왔다가 서쪽으로 떠나는 프로도는 그 전형이라 할 수 있겠죠. 하지만 이 작품의 결말에서 기현은 이전의 과정을 통해 변화한 인물이 아닙니다. 리셋 때문이죠. 1360월의 기현은 이전에 겪은 사건들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건들은 자기가 겪은 것도 아니죠. 1360월의 기현이 독단적 결정권을 가지는 건 이전의 기현에 대해 책임이 없기 때문이며, 동시에 이전의 기현을 본 독자들에 대해서도 책임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결말 방식은 ‘사실 꿈이었다.’ 결말 만큼이나 위험합니다. ‘사실 꿈이었다.’도 굉장한 책임 회피가 될 수 있는 결말이죠. 하지만 창작자는 도전 정신을 가져야 하고 위험하다는 건 도전하지 않을 이유가 못 되죠. 흥미로운 작업에 감사합니다.
[튜튜 스커트]
분수에 맞지 않는 심사를 하다 보면 종종 이런 작품들을 보곤 합니다. 본인이 좋아하는 것만 읽는 작가가 쓴 글이구나 싶은 작품들. 물론 사람이 취향을 가지는 건 지당한 일이고 그걸 관철하는 것도 나쁘다고 말할 일은 아닙니다만, 창작은 독자를 상정하는 행위입니다. 독자가 읽어야 작품이 되는 거죠. 그리고 그 독자는 작가와 다른 취향, 관점, 사고 방식 등을 가진 타인입니다. 그냥 타인과 담소를 나눌 때도 자기 관심사만 계속 말하는 건 그다지 좋은 화법이 아니죠. 어느 한 쪽을 골라야 한다면 소설가는 관심사가 다양한 쪽이 좋을 거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