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한 소설이 묻고, 다른 소설이 답합니다

대상작품: <길 잃은 기억> 외 1개 작품
큐레이터: 노르바, 2시간 전, 조회 14

한 소설이 묻습니다.

죄책감의 순환에서 인간은 빠져나올 수 있는가.

다른 소설이 답합니다.

어떤 죄책감은 사람을 끝까지 태우기도 한다.

[길 잃은 기억]과 [주황색]은 표면적으로 놀랍도록 닮아 있습니다. 어린 동생을 자신의 실책으로 잃은 형, 그 죄책감,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황혼녘과 불의 주황색까지.

그러나 같은 상처를 출발점으로 삼으면서도 두 작품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걸어갑니다. 나란히 읽었을 때, 좀 더 생각해 볼 만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 싶어서… and 너무나 흐르는 이미지가 비슷하여 ‘또’ 제 소설을 가져와 봤습니다. 비교 리뷰를 해야 돼서 리뷰가 아니라 큐레이션입니다.

 

[질문을 던지는 소설: 길 잃은 기억]

이 작품을 처음 읽으면 따뜻한 위로의 이야기처럼 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교통사고로 의식을 잃은 준성이 황혼녘의 골목길 끝에서 오래 전 죽은 동생 준호를 만나고, 준호의 손에 이끌려 다시 삶으로 돌아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준호의 대사를 천천히 따라가면, 그 따뜻함 아래 훨씬 서늘한 구조가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준호는 형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전에도 왔었잖아요.”

“형은 항상 중간까지만 와요.”

“그때마다 형은 기억을 조금씩 두고 가요.”

이 말들을 종합하면, 준성이 이 경계를 넘어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스스로를 끝내려 했던 시도들, 그 순간마다 그는 이 골목에 닿았고, 준호는 그때마다 형을 돌려보냈습니다. 그리고 준성은 매번 그 기억을 잃은 채 다시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준호가 30년째 그 골목에서 형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직 오지 않은 형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반복해서 찾아오는 형을 반복해서 돌려보내기 위해서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원에서 눈을 뜨는 마지막 장면의 준성은 달라질 수 있을까요. 준호의 말을, 이제는 잘 살라는 그 약속을, 이번에는 기억할 수 있을까요.

제 소설은 그 안에서 그 질문에 끝내 답을 주지 않습니다. 심박동이 확인되고 의식이 돌아왔다는 의료진의 목소리로 소설은 끝납니다. 이 열린 결말은 제 특성이긴 하지만, 단순히 따뜻한 여운을 주려고만 한 것은 아닙니다. 준성이 또다시 기억을 잃고 같은 순환 속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조용하고 잔인한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답을 내리는 소설: 주황색]

이 소설의 형은 처음부터 다른 방식으로 죄책감을 안고 살아왔습니다. 그는 애도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수첩에 선우를 살려두었습니다. 나이를 먹게하고, 밴드를 만들어주고, 월세를 대주고, 연락을 주고받았습니다. 이 행위는 애도가 아니라 애도의 회피입니다. 선우를 진짜로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그는 26년 동안 자신의 현실을 조금씩 갈아넣으며 환상을 유지해왔습니다.

주황색이 점점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증상은 그 균열이 터지기 시작하는 신호입니다. 억압해온 것들이 실제 감각의 형태로 새어 나오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제로도, 정신적인 질환이 신체에 직접적인 영향으로 발현되는 것은 흔한 일이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그가 불 속으로 뛰어드는 것은 선우를 구하려는 행동이 아닙니다. 26년간 유지해온 환상의 완성이자, 그 환상 속으로 자신을 완전히 소진시키는 행위입니다. “뜨겁지 않았다. 따뜻했다”는 대목은 그래서 더 어둡습니다. 파국이 구원처럼 느껴지는 순간, 그것이 이 소설의 1차적인 호러입니다. 거기에 장르 표기가 호러인 이상, 그 불길이 순수한 내면의 환각인지 아니면 어떤 초자연적 힘으로 실체화되어 형을 실제로 삼킨 것인지는 독자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것이 2차적인 호러요소입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결말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형은 끝내 구원되지 못했고, 선우 역시 편히 보내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에는 처음부터 출구가 없었습니다.

 

[동생의 자리]

두 작품에서 죽은 동생이 차지하는 위치도 대조적입니다.

「길 잃은 기억」의 준호는 능동적인 존재입니다. 그는 형을 알아보고, 진실을 알려주고, 손을 잡아 현실로 돌려보냅니다. 형의 죄책감과 무관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준호가 “전 괜찮으니까”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형의 투사, 환상이 아니라 독립된 존재로 그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황색」의 선우는 처음부터 형이 만든 피조물입니다. 너무 잘나면 안 되고, 실패해야 하고, 영원히 형의 그늘 아래 있어야 하는 존재로 설계된 선우는, 형의 죄책감이 필요로 하는 형태로만 살아 있습니다. 이것이 이 소설을 서글프게 만듭니다. 형은 동생을 그리워한 것이 아니라, 동생을 놓아주지 못한 자신의 죄책감을 붙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두 소설이 나란히 만드는 것]

한 소설은 묻고, 다른 소설은 답합니다. 그러나 그 답이 위안은 아닙니다. 「주황색」이 내리는 답은 어떤 죄책감은 끝까지 사람을 태운다는 것이고, 그 사실은 「길 잃은 기억」이 던지는 질문을 더 무겁게 만듭니다. 준성이 이번에는 기억을 붙들 수 있기를, 독자는 바라게 됩니다. 「주황색」의 형이 어떻게 됐는지를 알기 때문에.

두 작품은 같은 상처에서 출발해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가지만, 나란히 놓고 읽었을 때에서야 비로소 완성되는 하나의 문장처럼 읽힙니다.

「길 잃은 기억」의 죄책감은 반복적 자기파괴와 순환으로 나타납니다.「주황색」의 죄책감은 현실을 대체하는 환상, 그리고 점진적인 내면 붕괴로 나타납니다.
「길 잃은 기억」의 동생은 능동적으로 매번 형을 구원합니다. 「주황색」의 동생은 형이 만들어낸 수동적인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능동적으로 형을 끌어당긴 셈입니다.
「길 잃은 기억」의 결말은 열린 결말입니다. 이번엔 그 순환이 끊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남기는.「주황색」의 결말은 닫힌 파국입니다. 결국 환상은 주인공을 집어삼킵니다. 그게 주인공에게는 구원이었을지도 모르지만요.

 

차삼동 작가님의 소설들은 대체로 ‘정말로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주인공의 착각인가’라는 심리적인 경계에 세워둡니다. 그리고 그것을 황혼과 같은 주황색을 배경으로 자주 나타납니다. 제 소설은 ‘물리적으로’ 경계에 서 있는 존재들을 자주 다룹니다. 그런 차이에도 주목하면서 봐 주시면 좀 더 재밌으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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