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의 시선을 빌려 무언가를 말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우리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관점에서 대상을 재구성할 수 있으며 때로는 풍자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기도 하지요.
이번 큐레이션에서 살펴볼 주제는 ‘사물’입니다. 화자가 사물이거나, 사물이 되어버리는, 그리고 다시 인간이 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준비했습니다.
삼호 마네킹
‘저 마네킹들, 눈빛 좀 무섭지 않아?’
남성 의류 브랜드 A사에서 일하는 모델 마네킹 삼호는 매장에서 3년째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민정을 짝사랑하고 있습니다. 매일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민정에게 수고했다고 말하고 싶지만 마네킹 업무 규정상의 이유로 삼호는 그런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마네킹이 소름끼치게 생겼다.’라는 민원에 사측은 마네킹들의 눈코입을 전부 없애버립니다.
이어폰
‘저기, 내 말 들려?’
어느 날 이어폰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통화가 연결된 것도, 유튜브나 음악 앱에 접속한 것도 아닌데 희한한 일이었죠. 이어폰은 ‘나’가 잠들 때까지 노래를 불러주기도 하고,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기도 합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이어폰을 사랑한다는 걸 자각하게 됩니다. ‘나’는 이어폰 속의 존재가 누구인지 알아차리고 그와 닿을 수 있을까요?
karl
나는 karl입니다. ‘칼’이고요.
‘키친 쿡 퀸 주방 칼 3종 세트’ 그것이 바로 ‘나’, 그러니까 칼입니다. 아버지의 사업이 망하고 아들은 ‘나’를 항시 몸에 지니고 다녔습니다. 번번이 좌절되는 취업과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작은 집. 아들은 집에 틀어박혀 게임과 인터넷에만 몰두하게 됩니다. 칼은 기억합니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요.
식칼의 고백
나를 다룬 것은 한 여자였다. 어떤 이는 우리의 영혼이 날에 스민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기실 손잡이에 있다.
‘나’는 식칼입니다. 사람들은 식칼을 보고 무정한 존재라 말하죠. 무언가를 자르고 저미는 것은 칼의 숙명이고 ‘나’는 여자의 손에 잡혀 무언가를 난도질 하는 일을 이어나갑니다. 바래지고 닳아지더라도 그를 위해 마음과 몸을 바치는 것은 큰 기쁨이니까요.
ok computer
837일여 동안 이곳에서 보고 듣고 기억한 모든 정보들을 업데이트 할 수 있기만을.
전원이 켜지고 관리자가 오길 기다린지도 837일 14시간 26분 16초가 지난 지금, ‘나’는 그에게 지구로부터 수집한 정보를 보내 업데이트 하길 희망합니다… 처음으로 스위치가 on 되었던 그날, ‘나’는 대한민국 서울 구로역 앞 공터에서 인간세계의 관리자인 ‘김복성’ 할머니가 파는 자동 변신 로봇 안에 숨어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ok computer’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힌 남자가 ‘나’를 구매합니다.
인간이 아닌 사물의 시선을 빌려 인간의 속성을 노래하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의 물결 속을, 당신과 함께
저는 냉장고입니다. 쓰레기장이며, 발전소이기도 하죠.
구상성단의 한가운데서 성단을 붙들고 있는 블랙홀의 지평, 그곳에서 인공지능인 ‘나’는 세월에 닳아지는 소중한 것들을 기록하고 보관합니다. ‘나’는 냉장고이면서 쓰레기장이기도, 발전소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기억들을 변질되지 않게 붙들어 두는 용도로 만들어졌음에도 누군가는 구축비가 아깝다며 쓰레기를 버리기도 하죠. 블랙홀의 주변은 시공간이 일그러지므로 이곳에서의 1년은 밖에서의 100년이 되기에 ‘나’는 오로지 홀로 동 떨어져 유배된 기분을 느낍니다. 그리고 어느날 ‘나’는 예고도 없이 찾아온 인간과 조우합니다.
인형들
저희는 자매이자 연인이에요. 샬럿과 에밀리, 진분홍색 작업복을 입은 여자들.
‘나’는 인형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입니다. 이곳에서 일하는 우리는 종종 사람이 아닌 인형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다 ‘나’는 밤의 공장이라는 것에 대해 듣게 됩니다. 밤의 공장이 무엇인지 너무나도 궁금했던 ‘나’는 결국 공장에 들렸다 진분홍색 옷을 입은 봉제인형들을 보게 됩니다. 강철과 솜으로 이루어진 인형들이 상징하는 바가 무엇인지 곱씹으며 읽게 되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