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면서 느꼈던 문제점을 위주로 적어본다.
이런 작품을 보면 SF라는 장르는 SF로서의 SF와 SF의 틀을 빌린 다른 장르물로 나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양쪽 장르는 각각 나름의 방식으로 성장해오며 많은 작품들을 남겨왔다. 후자의 유명한 작품으로는,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카우보이 비밥이다. 소설 쪽에서 꼽자면 부디, 레오네라 불러주시길이 가장 최근에 본 작품인데, 1년 정도 전이지만, 그리 자주 볼 수 있는 장르가 아니다보니.
‘회색 눈’은 작품 소개에 언급된 ‘만화책 보듯’이란 말처럼 서구권 SF물보다는 일본 만화, 애니메이션풍의 활극물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작품은 그다지 만화스러움을 잘 구현하지 못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겉은 만화스럽지만, 본질적으로 만화의 장점은 그리 잘 흡수하지 못했다.
물론 만화와 소설은 다르기 때문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완벽히 모방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소설이 만화스러움을 표방할 때 만화에서 당연히 배워왔어야 할 부분들이 그다지 구현되지 않았다.
1.우선 1챕터를 읽으면서 느낀 건, 만화라고 보기엔 전개가 느리다는 것이었다.
일본의 여러 출판사에서는 장편 연재 전에 단편으로 먼저 반응을 확인한 후 그 단편을 장편으로 키우는 시스템이 있다.
회색 눈의 1챕터는 232매인데, 진행된 내용을 봤을 때 이 1챕터가 그 단편 만화 분량에 해당한다. 그런데 소설로 250매면 이는 300쪽 내외의 장편 소설 한 권의 1/3, 즉 100쪽에 달하는 분량이다.
러닝타임을 생각해보면 문제는 확연해진다. 나를 기준으로 계산해보자. 나는 소설 한 페이지를 읽는 데에 1분 정도가 걸린다. 고로 100쪽을 읽는 데에는 100분이 걸린다.
반면 단편만화 한 화 분량을 넉넉히 70쪽이라 잡아도, 이는 20분 정도면 다 읽는다.
요약하자면, 회색 눈 1챕터의 내용은 20분 만에 읽을 정도로 썼어야 할 것을 100분 동안 읽어야 되게 썼다는 것이다. 만화에서는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분을 소설은 글로 다 표현해야한다는 점 등을 고려해도 이는 엄청나게 길어진 편이다.
왜 이렇게 길어진걸까. 2챕터를 읽다가 문단 하나를 옮겨적었는데, 이게 그에 대한 대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대로 도망치면 난 죽겠지. 누군가한테 붙어서 도움을 주면 그 치가 날 챙겨주겠지. 어차피 여기서 죽나 노블리스 한테 죽나 매 한가지, 달아나기는 애초 그렀다 치고, 잘 생각해보자. 블랙 크라운의 사천왕 중 하나키언과, 윤과, 수명은 셋의 부하들이 나타났어. 하나키언은 처음부터 나를 필요로 했으니 엘로우를 보낸 걸 테고, 윤의 부하인 타우는 나는 신경 안 쓰고 성식만을 노리니 원래 목적은 강철 팔과 그였을 테고, 수명은의 부하인 뼈 수집가는 처음부터 전부 죽이려 했어. 그러니까 우선순위는 뼈 수집가다. 저 놈을 죽인 뒤, 엘로우에게 협로를 구해 하나키언님에게 붙고 윤과 대적하는 거야. 와 나 머리회전 진짜 빠르네. 이게 바로 천하의 기자모크지.’
일일히 다 세어본 건 아니지만, 이 문단만 유독 긴 게 아니다.
만화를 그릴 때와 소설을 쓸 때 다른 점 중 하나는, 만화 쪽이 지면이 더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 독백 하나에 여러 페이지를 쓰더라도, 어쨌든 말풍선 안에 다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독백 하나에 여러 페이지를 써버리면 내용을 전개할 여유가 없다. 한정된 지면 때문에 대사는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고, 그런 지면의 제한이 도리어 만화라는 매체 특유의 호흡을 만들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글이 무진장 많은 만화를 읽는 것처럼 답답함이 컸다.
2.사천왕식 전개를 좋아한다. 약한 녀석부터 한 명씩 나와 용사에게 당하며, 용사를 성장시켜주는 전개를 말한다.
흔히 용사물 클리셰 중에 지적받는 게, 왜 처음부터 마왕이나 다른 센 녀석이 나오지 않고 용사가 강해지도록 약한 녀석부터 보내는 걸까 라는 것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마왕이 오면 이야기가 성립이 안 되는 건 차치하더라도, 분명 이상하긴 하다.
그러나 지적과는 별개로, 이런 전개가 많은 건 그만큼 독자들을 사로잡는 면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주목하는 점은, 악역은 물론 동료도 포함한 여러 캐릭터들의 ‘등장에 대한 빌드 오더’이다.
고전으로는 오즈의 마법사, 최근 작품으론 원피스만 봐도 알 수 있지만, 동료나 악당이나 여러 캐릭터들은 차근차근 등장한다. 매 화마다 한 명씩 등장하는 경우도 있고, 어느정도 전개하다가 신캐릭터를 등장시키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한 번에 많은 캐릭터를 등장시키지는 않는다. 그도 그럴게, 고등학교에 입학한 날에, 신입생들이 모두 강당이나 운동자에 모였다고 해서 그날 바로 신입생 모두의 이름을 외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럼 몇 명을 등장시키면 좋냐는 질문에는 답할 수가 없다. 막말로, 신입생이 천 명이어도 그 천 명의 이름과 특징을 그 날 다 외울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는 단정할 수 없다. 독자도 마찬가지로, 어떤 독자는 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이 첫 챕터에 소개돼도 너끈히 외울 수도 있고, 어떤 독자는 서너 명만 돼도 너무 많다고 느낄 수도 있다.
어떤 의견이건 결국 글쓴이 본인의 경험에 비춰 말할 수 밖에 없으니 모쪼록 그 부분은 감안해주시길 바라며, 얘기를 이어가자면, 회색 눈은 1챕터에서 너무 많은 인물들이 나온다고 생각한다. 분량을 나눠가지다보니 개개인의 임팩트도 줄어드는데, 액션물이었던 터라 더 아쉽게 느껴졌다. 현실에서도 그렇지만 액션물의 핵심은 액션 보다는 캐릭터라고 생각한다. 만약 액션물의 재미가 액션에서만 온다면 모든 사람들은 마블, 디씨 영화만 보지 실제 격투기에는 눈을 두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파퀴아오의 경기에 환호하는 건 선수로서의 기량이라는 일정 수준 이상의 액션성을 확보한 후 캐릭터가 받쳐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빠른 이야기 전개를 중심으로 두고 액션은 가끔씩 나온다면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