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한 객관적인 리뷰를 쓰려고 노력합니다.
…
예, 노력만 가상합니다.
이 리뷰는 1장. 소녀와 학귀(10) 까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작가님이 솔직한 리뷰를 바라셔서 저도 리미터를 풀고(?!) 훅훅 들어가 볼 생각입니다. 이번 작품은 ‘눈꽃이 피는 곳’, 당찬 소녀 설화의 이야기입니다.
세계관
장벽(작중 묘사를 보면 그냥 높은 산인 거 같습니다만)에 둘러싸인 공화국, 눈. 학술원이라 불리는 학교가 있고 전자기기를 학생들이 쓸 정도로 발전된 기술. 장벽 너머엔 드넓은 벌판이 있고, 온갖 야만인들과 학귀라는 괴물이 들끓고 있음.
10화까지 읽으며 제가 캐치한 설정은 저기까지입니다. 나머진 솔직히 잘 와닿지 않았습니다. 한번 쭉 살펴볼까요.
디테일 부족, 고증에 맞지 않는 설정
전 작중 배경이 러시아를 모티브로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정치질서가 잘 잡히고 인구도 많은 ‘공화국’, 즉, 현실의 우랄산맥 서부죠. 반대로 산맥 넘어서 나오는 동부 무법지대는 시베리아 벌판을 모티브로 해서 ‘벌판’이라는 이름을 지으신 거라 생각했습니다. 현실 역사에서도 러시아 지역은 저러니까요. 작중에 눈이 나오고, 설화를 제외한 인물들의 이름이 서양식이다 보니 분위기도 얼추 비슷했습니다. 소설 제목조차 ‘눈꽃이 피는 곳’이고요.
그런데 저 사람들, 놀랍게도 동남아 사람들의 주식인 쌀국수를 먹습니다. 주인공 설화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쌀로 된 음식이 먹고 싶다’ 라고 말합니다. 물론 쌀로 된 음식이 귀하다는 말이 나오긴 하지만 그래도 이상합니다. 작중 벌판은 정치질서가 무로 돌아간 무법지대로 묘사되는데, 대체 어디에서 가게를 유지할 정도의 쌀을 구한 거죠? 쌀은 온난, 열대 기후에서 키우는 작물입니다. 도적이 깽판 치고 다니는 무법지대에 논농사나 짓고 있는 농민과 그 무거운 쌀을 수입해오는 상인도 상상이 안가고요. 정말 농민, 국제무역상이 존재한다 해도 서양이 배경이라면 귀리나 밀 따위가 나오는 게 자연스럽죠. 게다가 우리가 아는 쌀은 일반적으로 국수로 해 먹는 곡물이 아닙니다. 국수나 빵으로 만들지 않으면 먹기 힘든 밀과 다르게 쌀은 그냥 밥으로 해 먹으면 그만이니까요. 동남아에서 쌀국수가 유래한 것도 그냥 그 지역에서 밀 대신 쌀이 썩어 넘칠 정도로 많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작중에서 화투–섯다까지 나옵니다. 아시다시피 화투는 일본산이며 한국에서만 이상할 정도로 흥한 놀이입니다. 마야, 에드거라는 사람들이 즐기는 도박이라면 좀 더 서양스러운 포커나 국적불명의 주사위 놀이 따위가 더 어울리죠. 쌀과 섯다 모두 세계관과 전혀 맞지 않는 재료입니다. 아무리 미슐랭 쉐프가 조리한들 간장이 들어가야 할 자리에 케첩을 집어 넣어버리면 맛이 좋을 리가 없겠죠.
‘신화적’ ‘환상적’ 판타지가 아닌 실제 역사, 지역, 국가를 모티브로 한 세계관을 짜시겠다면 알맞은 재료-고증은 선택이 아닌 필수입니다. 아니, 설사 신화적 판타지라도 최소한의 현실성–핍진성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판타스틱한 세계를 만들어놔도 그걸 읽는 독자들은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니까요. (디테일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제 다른 리뷰 ‘디테일이 세계를 만든다.’ 에도 자세히 써놨으니 한번 참고하셔도 좋습니다)
스토리텔링
결론부터 말하자면, 1, 2화 말고는 그다지 몰입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유가 뭘까요.
첫째, 우선 작중 사건들이 지나칠 정도로 평범합니다. 저도 클리셰를 많이 공부하고, 많이 활용합니다만 이 작품에서는 클리셰가 남발됩니다. 바꿔 말하면 눈에 띄는 장면이 없습니다. 미스터리한 조력자, 핸드폰 부수기, 상인과 함께 움직이기, 추격자의 습격, 주인공이 사실 XX였다! 정신을 잃고 깨어나 보니 어느 박사의 집, 양아치에게 린치를 당하고 또 다른 조력자에게 도움받는다… 그리고 그 끝에서 만난 가족과 전설적인 인물인 후긴! 거의 교과서에 가까운 플롯이 쭉 진행되다 보니 뒷내용이 기대가 안 됩니다. 클리셰를 잘 버무리는 것도 좋지만, 하나둘 쯤은 이 작품만의 특색이 있으면 좋겠어요.
둘째,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부족합니다. 시작부터 가족이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행방불명되고, 본인은 정부요원에 쫓기는데… 이 위험천만한 상황이 문단 몇개만에 정리됩니다. 스릴러에 응당 있어야 할 아슬아슬한 추격전 따윈 없고, 바로 마야 선생이 나타나 설화를 구해주죠. 그러더니 여행이라도 떠나듯 훌쩍 장벽(산)을 넘으러 갑니다. 폼 잡으며 설화를 잡으려던 정부요원들은 어째서인지 전혀 따라붙지 못하고요. 그걸 알고 있기라도 한 건지 마야와 설화도 캠핑이라도 온 것처럼 한가롭게 별구경이나 합니다. 추격자가 없다고 해도 사람이 다닐 길도 없는 냉대기후 겨울 산맥을, 그것도 한밤중에 넘는 건 베테랑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인데 말이죠. (주인공의 정체를 생각해보면 문제가 안 될 수도 있습니다만, 그렇다면 관련 묘사를 더 했어야죠. 마야도 마찬가지고요.)
긴장감을 저해하는 요소는 이외에도 더 있습니다. 6화쯤이었죠. 앞에 도적이 진을 치고 있다는 걸 트럭 기사가 친절히 알려줍니다. 실제로 그 동네 도적이 진을 치고 통행세를 받는 유형이라고 해도, 그걸 굳이 독자에게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그 직후 (이제서야) 정부요원이 따라붙고 전투도 벌어집니다만, 이 역시 플롯을 그대로 늘어놓은 듯 긴장감이 떨어집니다. 설화가 잠시 위기에 처하긴 하지만 금방 능력을 각성하더니 순식간에 위기를 해결하죠.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밀당의 기술이 부족합니다. 클리셰라는 좋은 재료를 사용했지만, 정작 중요한 재료 손질이 부족했다고나 할까요. 좋은 플롯과 장면은 독자를 들었다놨다 하는 맛이 있죠.
셋째, 설정 설명이 너무 장황합니다. 일례로 벌판에 나서자마자 마야와 설화가 쌀국수를 먹는 장면. 이런 장면이 필요한지도 의문인데 그마저도 설명으로 꽉 차있습니다. 마치 ‘마야 선생의 역사강의!’라도 듣는 것처럼요. 설정 설명이 지루하지 않으려면 그 장면이 플롯과 잘 연계되던가, 연출이 좋아서 몰입되던가 해야 하는데 쌀국수 식사는 어느 쪽도 아닙니다. (예를 들어 캄피에르 사태를 설명하고 싶다면, 그 사태로 황폐화가 된 바로 그 장소에서 설명해주는 편이 훨씬 몰입됩니다. 주요 플롯과 연계가 된다면 더 좋고요) 좌군과 우군, 공화국과 후긴 같은 장대한 설정을 굳이 초반부터 풀 이유도 없습니다. 주인공이 공화국과 후긴의 진실에 대해 모르는 편이 훨씬 좋으니까요. 몰라야 궁금증이 증폭되고, 궁금증은 곧 독자가 다음 편으로 넘어갈 동력, 즉, 떡밥이 됩니다.
캐릭터
먼저 설화의 처지를 생각해봅시다. 중등 학술원에 들어가게 돼서 친구들과 축하하는 매우 기쁜 상황입니다. 그런데 그 직후 가족이 테러리스트로 낙인찍혀 행방불명되고, 정부요원에게 쫓기고, 잘 알고 지내던 선생이 갑자기 영화 속 주인공처럼 나타나 구해주고, 나고 자란 고향을 떠나 위험천만한 벌판으로 떠납니다. 한 소녀의 세계가 한순간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믿었던 사람들은 자신을 속이고 있었고, 친구는 외면했고, 이제 정체를 알 수도 없는 선생에게 목숨을 맡겨야 하고, 추격자를 피해 위험한 세계에서 가족을 찾아야 합니다.
(작중 묘사를 보면 설화도 가족과 마야 선생을 좀 의심하긴 했던 모양입니다만, 그렇다 해도 여전히 감정묘사가 부족합니다. 애초에 아예 의심도 안 했다고 하는 편이 독자 입장에선 훨씬 더 몰입될 테고요)
평범한 소녀라면 울고 불며 정신을 놓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고, 당찬 소녀라 해도 마야에게 대뜸(작중 묘사된 것보다 훨씬 강하게) 따지는 게 정상입니다. 분노, 슬픔, 절망, 의심, 무력감. 위와 같은 상황에 당연히 떠오를 감정들이죠. 그런데 설화는 그런 감정의 기복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습니다.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침착, 쾌활하죠. 독자로서 감정 이입하기 힘들 정도로요. 원래 그런 성격인거면 저도 할 말이 없습니다만(…)
물론 설화처럼 시원시원한 주인공도 나름의 매력이 있습니다. 세상만사에 쿨하게 대응해도 좋고, 속으론 마음앓이하는 외강내유도 좋죠. 어느 쪽이든 그에 걸맞은 감정묘사가 뒤따라야겠지만요.
못다 한 이야기
차후 전개와 세계관 설정 문제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고 계시다 하셨는데… 예, 맞습니다. 세계관 설정은 힘든 일입니다. 그야 장편이니까요. 세계관이 커지고 등장인물이 늘어날수록 필요한 설정이 제곱수로 늘어납니다. 그래서 대개 장편 판타지는 집필 시간보다 세계관 설정 짜는 기간이 훨씬 깁니다.
하지만 결국 답은 하나입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참고 자료를 찾기 위해 도서관을 들락여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키보드만 다닥여도 손쉽게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위키 등을 뒤적거리며 재료를 구하고, 자기 방식대로 이리저리 조리해보며 점점 크기와 깊이를 더해 나가는 것. 장편 소설, 더 나아가 판타지 소설의 시작은 바로 여기, 즐거운 망상 속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시간을 두고 천천히 즐기시면 됩니다. 아무리 힘들고 막막해도 답은 어디엔가 반드시 존재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