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며 고정 관념이 하나 있었다. 내가 배웠던 마녀사냥에 대한 이야기, 마녀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 마녀는 사람들의 욕망이, 종교가, 편협한 시선이 만들어낸 허상이고, 그로 인해 피 흘리며 죽어간 피해자들을 상징하는 아픈 단어라는 것.
그래서 <마녀가 죽었던 집>을 읽기 시작하며, 난 언제쯤 마녀에 대한 오해가 밝혀질까 하면서 이 소설을 읽었다. 그런데, 마녀가 진짜 나쁜 마녀였다. 동생을 가져간 진짜 마녀… 난 ‘마녀가 언젠가 무죄일 거야’라는 생각으로 1부를 다 봤고, 2부도 봤다. 그리고 3부를 보고 있다. 그런데, 내 기대는 2부 초중반까지 여지없이 무너졌다.
보통 이러면, 기대가 무너진 순간 소설을 덮는다. 정치인을 좋아하다가 그 정치인의 이미지가 무너지면 정치 뉴스 전부를 보지 않게 되는 것처럼… 그런데… ‘빌어먹을’ 이 소설은 계속 보게 된다. 우울한 날에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나 <나의 아저씨> 같은 몇 번 본 드라마를 배경음악처럼 틀어놓고 무언가를 끄적거려야 그 하루를 그나마 보낼 수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은 그렇게 배경음악처럼 읽힌다.
어느덧 여울비 마을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고향 동네 옆쯤에 자리 잡은 마을처럼 느껴지고 마녀는 정체도 없이 아이를 잡아먹고 사라지는 흉가의 클리셰 같다. 지수의 환각, 내면의 붕괴, 마녀가 아이들을 훔쳐간다는 맹목적 믿음, 계모의 사망, 그리고 2부에서 더해지는 의심의 돌림병, 배신, 그리고 함정. 계속 이런 장면 속에서도 난 ‘마녀는 나쁘지 않을 거야’를 외치며 이 작품을 읽었다. 마마을 전체가 지수를 마녀로 몰아세우고 흉흉한 소문이 난무할 때쯤… ‘봐봐, 마녀는 없잖아. 사람들의 편견이야’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무슨 소리야? 지수가 ‘마녀’라고? 그 ‘마녀’라는 게 뭔데?”라며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끼어드는 지훈의 외침은 내 생각이기도 했다.
2부의 서사적 절정은 서로를 향한 팽배한 불신이 결국 물리적이고 치명적인 덫으로 치환되어 주인공을 덮치는 순간에 도달한다. 지수는 자신이 믿었던(혹은 믿을 수밖에 없었던) 누군가에 의해 어둡고 비가 쏟아지는 으스스한 숲속으로 유인당하는 끔찍한 상황에 처한다. 이 장면에서 오가는 대화는 평범한 단어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이면에는 소름 끼치는 악의가 묻어난다. “그런데 여긴 어디야? 집으로 가는 거 맞아?”라며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지수에게, 동행자는 “무섭구나?”라며 감정을 기만하는 태도를 취한다. 자꾸 어두워지고 나무들이 기분 나쁘게 다가온다며 저항하는 지수에게, 동행자는 그녀의 어깨를 과감하게 푹 끌어안으며 말한다. “비가 와서 그래. 집에 돌아가면, 금방 잊을 거야.”
이 폭력적인 위로 앞에서 지수는 마침내 자신이 철저히 기만당했음을 깨닫고 “함정이었어…. 날 유인했던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비명을 지른다. 이 장면의 탁월함은 단순히 주인공이 육체적인 위협에 노출되었다는 데 있지 않다. 비가 내리는 어두운 숲이라는 공간적 배경은 지수가 10년 전 동생 ‘지나’를 잃어버렸던 바로 그날 밤의 환경적 트라우마를 완벽하게 강제 재현하는 것이다. 즉, 지수의 어깨를 끌어안은 동행자의 행위는 육체적 감금인 동시에, 과거의 트라우마 스위치를 억지로 눌러 그녀의 이성을 완전히 파괴하려는 극악무도한 심리적 살해 행위와 다름없다. 귀신이나 마녀라는 초자연적인 존재보다, 가면을 쓴 채 다가오는 인간 군상의 맹목적인 집착과 배신이 훨씬 더 섬뜩한 현실적 공포로 다가오는 지점이다.
이 소설의 가장 큰 강점은 인물들이 주고받는 대화의 밀도이다. 작가 나기는 대화를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도구로 사용하지 않고, 상대방의 약점을 찌르고 정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한 무기로 활용한다. 예를 들어 지수가 “언니에게 전화라도 해볼까”라며 휴대폰을 꺼내 드는 장면에서, 그녀가 주소록에 가진 번호는 단 두 개뿐이라는 서술은 지수의 지독한 사회적 고립을 증명한다. 또한, 10년 만에 재회한 유하(혹은 선우)와의 대화에서 지수는 상대방이 자신과 눈을 마주하려 하지 않고 먼 산에 시선을 두는 것에 불만을 느낀다. “빈 시간에 내가 이렇게 애를 봐주곤 하지”라는 퉁명스러운 어투나, 막역하다고 보기엔 떨어진 시간이 너무 길어 속내를 알기 힘든 어색함은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미세한 불신과 경계심을 탁월하게 보여준다. 이처럼 작가는 폐쇄된 공간 속에서 고립된 인물들이 서로의 의도를 의심하며 끝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미시적인 권력 투쟁을 섬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드디어 2부 마감 즈음에 서사의 근본적인 축을 뒤흔드는 치명적인 철학적, 사회학적 담론을 제시한다. 그것은 바로 ‘기억의 불완전성’과 ‘마녀라는 사회적 발명품’에 대한 고발이다.
2부의 전개를 뒤엎는 가장 충격적인 대사는 주인공을 입양했던 양어머니 ‘최유리’의 입에서 등장한다. “묻고 싶은 게 있거든요. 왜 우리를 입양했어요?”라는 날카로운 질문에 최유리는 스윽 입술을 핥으며 대답한다. “왜 입양했냐고? 그건……. 기억이란 건 이기적이고 편리주의적인 악마거든.” 이 단 한 줄의 명제는 독자가 지금까지 전적으로 신뢰하며 따라왔던 1인칭 관찰자 시점(지수의 시점)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파괴력을 지닌다. 지수는 10년 전 그날 밤, 흉가에 숨어 있던 초자연적인 ‘마녀’가 불가항력적인 힘으로 동생 지나를 ‘빼앗아 갔다’고 굳게 믿고 있으며, 독자 역시 이를 서사의 사실로 수용해 왔다. 그러나 최유리의 말처럼 인간의 기억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진실을 편집하고 조작하는 ‘이기적인 악마’라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이 가설을 적용할 경우, 10년 전 그 빗속에서 동생의 손을 놓아버린 것은 초자연적인 마녀의 납치가 아니라, 극도의 공포에 질려 자신만이라도 살아남고자 했던 어린 지수 본인의 이기적인 생존 본능이자 무의식적인 유기였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추론이 가능해진다. 즉, 자신이 동생을 버렸다는 참혹한 진실을 이성적으로 감당할 수 없었던 지수의 정신이 철저히 붕괴하는 것을 막기 위해, 죄책감을 온전히 전가할 대상으로서 ‘아이를 훔쳐가는 마녀’라는 초자연적인 허상을 스스로 창조해 냈을 가능성이다. 지수가 집에 오자마자 동생의 환영을 목격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원망하는 듯한 소리에 시달리는 이유가 외부의 귀신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처절한 자책감 때문이라는 이 심리학적 해석은, 본 작품을 단순한 심령 호러에서 인간 정신의 어두운 심연을 해부하는 고도의 심리 미스터리로 격상시킨다. 이는 독자로 하여금 서술자인 지수의 독백조차 맹신하지 못하게 만들며, 텍스트의 얄팍한 표면 아래 도사린 행간의 침묵과 모순을 날카롭게 읽어내도록 강요하는 탁월한 장치이다. 드디어 작가는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사회적 편견과, 마녀는 어떻게 창조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 도출된다.
“이 마을에서 ‘마녀’를 쫓는다는 핑계로, ‘마녀’ 그 자체가 되어버린 가여운 사람”이라는 평가와 “처음부터 마녀인 사람은 없으니까”라는 한마디.
유지수가 어린 시절 계모에게 당해야만 했던 일상적인 학대, 고아라는 이유만으로 겪어야 했던 수녀원과 세상의 차가운 편견, 그리고 동생을 잃은 처참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아이들을 납치하는 주범으로 낙인찍힌 채 마을 사람들에게 마녀로 매도당하는 일련의 과정들. 이 모든 폭력의 사슬은 한 연약한 개인을 벼랑 끝으로 몰아세우며, 세상에 대한 증오를 품고 타인을 파괴하는 진짜 ‘마녀’로 변모하도록 강제하는 사회적 린치와 다름없다. 작가 나기는 전설 속에 박제된 마녀라는 초자연적 클리셰를 산산이 조각내고, 그 자리에 타자를 배척하고 악마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안위를 보장받으려는 인간 사회의 보편적이고 추악한 타자화를 폭로한다.
나기 작가의 <루시 : 마녀가 죽었던 집> 1, 2부 서사는 물리적으로 단절된 과거의 흉가로 귀환하여 직면하는 한 인간의 처절하고도 핏빛 어린 심리적 쟁투를 그려낸다. 표면적으로는 비 오는 밤의 흉가, 실종된 아이들,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마녀라는 고전적이고 관습적인 호러 클리셰의 외피를 두르고 서사의 문을 열지만, 텍스트의 깊이가 더해질수록 그 이면에는 폐쇄된 사회의 무자비한 폭력성,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인간 본성의 나약함, 그리고 진실을 편집하여 자신을 보호하려는 기억의 간악함이라는 묵직하고 심오한 주제 의식이 모습을 드러낸다.
정통 호러의 공포 조성 방식과 미스터리 스릴러의 추리 기법을 거부감 없이 엮어내는 작가의 기교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10년 전 동생을 납치한 초자연적인 존재를 쫓아 마을의 숲을 헤매는 외현적인 서스펜스 플롯의 아래쪽에는, 과거의 상처를 회피하기 위해 자신조차 속여 넘긴 자기기만의 장막을 스스로 찢고 들어가야 하는 내현적인 심리 플롯이 거대한 톱니바퀴처럼 완벽하게 맞물려 회전하고 있다. 신뢰했던 연인 지훈의 등 돌림, 지수를 어두운 함정으로 유인한 인물의 정체, 마을 전체를 지배하는 집단 광기의 기원, 그리고 “기억은 이기적인 악마”라거나 “처음부터 마녀인 사람은 없다”는 파괴적인 명제들은 회를 더해갈수록 감칠맛을 풍긴다.
결과적으로 이 소설의 1부와 2부는 잃어버린 혈육을 찾기 위한 단순한 공간적 귀환의 서사를 훌쩍 뛰어넘는다. 그것은 왜곡되고 조작된 트라우마의 껍질을 하나씩 벗겨내고, 인간 자아의 가장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는 지독하게 불편한 진실을 향해 묵묵히 걸어 들어가는 구도의 과정이다. 주인공 유지수가 겹겹이 쌓인 의심의 안개를 걷어내고 마침내 마주하게 될 최종적인 진실이, 상상을 초월하는 초자연적인 악의 실체일지 아니면 나약한 인간들의 이기심이 빚어낸 참혹한 군상의 민낯일지는 아직 예단할 수 없다. 그러나 2부까지의 전개만으로도 이 작품이 축조해 낸 서늘하고도 지적인 공포의 미궁은, 눈부신 미학적 성취와 무한한 가능성을 선명하게 입증하고 있다. 1부는 조금 느렸다. 그런데 1부를 읽고 나서 2부를 더해갈수록 이 작품의 진가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평하겠다. 나기 작가, 잘 쓴다. 난 이렇게 잘 쓰는 사람……….. 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