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킬레우스의 분노The Anger of Achilles』 – 자크 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 1819年
세상에는 그리워할 만한 과거의 좋은 것들이 있다. 항상 진보를 향해 나아가는 듯 보이는 문명도 미시적으로 바라보면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종종 뒷걸음질 칠 때도 있고, 그러다 아예 넘어져 옛 시대의 비석을 다시 마주하기도 한다. 그런 날이면 비스듬히 누워 쉬던 고문古文은 오랜 잠에서 깨어나 다시금 빛을 발하는데, 개중에는 한때 자신이 존경받았음을 증명하듯 황금 같은 교훈을 속삭이는 것도 있다.
물론, 짚고 넘어갈 부분은 있다. 우리는 옛 시대의 “미덕”에 관하여 수많은 착각을 지녔고, 특히 추억에 지나치게 너그럽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한 착각은 자주 편향으로까지 이어지고, 해가 지날수록 늙은 일꾼처럼 구시렁거리게 만든다. 허나 어찌 그것을 나쁘게만 볼 수 있겠는가? 현대에도 살아 숨 쉬는 옛것들은 모두 제 나름대로 위대하다. 그렇지 못한 것들은 세월의 풍파를 맞고 먼지와 하나 되어 사라져버린 것을. 장구한 불멸을 기린 지도 이미 오래되었으니, 여기에 백 년쯤 더 더한다고 달라지지는 않을 터이다.
같은 논리로, 고전을 향한 외경 역시 새롭지도 않고 크게 나무랄 일도 아니다. 실체에 기반한 관념을 추종하는 것은 오로지 관념뿐인 것을 섬기는 것보다 정직하다. 고전은 수 세기에 걸쳐 제헌祭獻받을 만큼 우수한 형식을 갖추고 있고, 사람으로서 쌓을 수 있는 위업 중 가장 높다 여겨지는 ‘불멸’에 닿아 있으며, 길고 긴 시험의 길을 지나 경전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이 땅의 누군가가 그 작품을 알든 모르든 고전은 상관하지 않는다. 어느 날 우연히 당신에게 발견되어, 충분히 성숙한 지성으로 오랜 향을 음미하고, 한때의 충동보다 더 먼 곳으로 보내줄 끈기를 갖추어 탐독한다면 고전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살아난다. 다만 수고로이 성산聖山을 오르는 인간이 적고, 그 산이 고독한 거인이었음을 깨달은 이는 더욱 적을 뿐이다.
필자는 고전을 공경하는 사람 중 한 명이다. 성실하거나 박식하지는 못해 그 위대함을 널리 알릴 사도는 되지 못하지만, 최소한 보면서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부류에 속한다. 그렇기에 옛 구전가의 언어를 이해하고 이를 다른 말로 풀어 쓰는 식자識者들을 ― 문체에 있어 취향 차이가 있긴 하지만 ― 깊이 존경한다. 그리고 그와 마찬가지로, 고전 형식을 현대의 문법으로 재구성할 줄 아는 능력 있는 창작자를 존경해 마지않는다. 필자 자신도 고어古語와 문어체를 사랑하고 그 영향을 받은 고로, 그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적막한지를 막연하게나마 이해한다.
그리고 그런 필자에게 쉽지 않은 과제가 떨어졌다. 바로 이 작품, 〈거짓 꿈의 신탁〉에 대한 간단한 감상을 남기는 일 말이다. 텍스트가 나타내는 바 그대로 간단한 일이 되면 참 좋겠지만, 대상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를 리텔링한 것이라면 이야기가 아주 복잡하게 된다. 얼마나 복잡하냐면, 신화 속 괴수가 3단 변신을 한 것도 모자라, 대륙을 건너 타국의 복식과 언어를 받아들인 것과 같다. 영웅도 식자도 아닌 범인凡人에게 괴수의 본모습을 보이고 털을 벗겨 모직을 만들라니, 헬리콘산에 사는 신께서도 참으로 짓궂으시다.
1. 아이올리아어? 이오니아어? 아티카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의 작가 호메로스Ὅμηρος는 기원전 800년대 이오니아 사람이다. 이오니아는 에게해에 인접한 아나톨리아 서부 지역으로, 범이오니아 동맹의 중심지이자 한때 크나큰 발전을 이루었던 곳이다. 이 지역이 이오니아라는 이름을 부여받고 ‘그리스인’ 정체성을 가진 민족이 정착한 것은 철기 시대로, 본래는 히타이트의 변두리에 속하던 땅이었다. 이온Ἴων의 자손을 자처하는 이들이 아티카Αττική 등에서 난민으로 이주하면서 이오니아는 그리스인의 터전이 되었는데, 그들 자신도 이오니아 사람보다는 그리스인임을 자처하였으며, 호메로스의 시대에는 ― 히타이트 표기 Aḫḫiyawā와 상관이 있는 듯한 ― “아카이아인Ἀχαιοί”이란 단어가 그리스인을 지칭하는 용도로 굳어졌다.
위 문단에 압축된 복잡한 서사처럼, 《일리아스》에 담긴 언어‧민족학적 배경은 장대한 디아스포라의 역사에 걸쳐 있다. 이오니아의 그리스인은 펠로폰네소스 반도 ― 그중에서도 아티카를 중심으로 파종을 시작했고, 마찬가지로 소아시아에서 그리스인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던 아이올리아Αἰολία, 그리고 본토에서 새로이 부상한 도리아인Δωριεῖς과 문화적으로 교류했다. 말인즉 “《일리아스》는 고대 그리스어로 쓰인 작품이다”라는 설명은 초점을 에게해 일대로 대강 맞출 수 있을 뿐, 거의 아무런 사실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럼 호메로스가 이오니아 사람이니 《일리아스》는 이오니아 방언으로 쓰인 작품일까? 그랬다면 연구자로서는 좀 더 편했겠지만, 고대 언어는 그런 식으로 쉽게 대응되는 게 하나도 없다. 우리는 삽포가 아이올리아 사람이고 헤시오도스‧헤로도토스가 이오니아 사람, 소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가 아티카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지역이 곧 언어를 설명한다고 단정하는 것은 이 무르고 몰경계한 시기의 유연함과는 상통하지 않는다. 《일리아스》는 호메로스 그리스어Homeric Greek로 쓴 작품이라고 하는 게 차라리 옳을 것이다.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싶겠지만, 정말 이렇게밖에 설명할 길이 없다.
거칠게나마 이를 풀어보겠다. 우선, 이오니아 방언은 초기 아티카 방언과 높은 유사성을 보여준다. 도리아/아이올리아 방언이 ᾱ[a:]를 쓰는 것에 비해, 초기 아티카 및 이오니아 방언은 η[ε:]를 사용하고 있다. ε‧ο는 이오니아어에서 종종 ει‧ου로 바뀌며, 아티카어와 달리 이오니아어는 모음이 연속되었을 때 축약이 일어나지 않기도 한다. 초기 아티카어에서 지시대명사(혹은 지시형용사)에 한정되어 있던 ὁ‧ἡ‧τό는 호메로스 시대에 정관사를 포함한 여러 한정사의 기능으로 확장되고, 호메로스 작품에서는 ― 주격, 속격, 여격 등에서 ― 굴절 형태의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언어적 유사성과는 별개로, 《일리아스》의 틀을 이루는 서사시 형식은 본디 아이올리아의 것이다. 극초기에 서사시는 윌루샤Wiluša 인근 ― 그러니까 트로이아Τροία로 추정되는 일대에서 시작했고, 이후 이오니아로 전해질 때도 어휘를 거의 유지하였다. 《일리아스》는 여기에 이오니아 방언 특성이 더해졌고, 나아가 호메로스만의 운율 철학이 골격을 형성하며, 어느 유형에도 완전히 속하지 않는 고유한 그리스어 작품이 되었다.
그렇기에 《일리아스》는 문체에 있어 다층적인 면모를 가지고 있다. 작중의 엄숙한 선언들은 아이올리아 고전의 장구한 기상을 지니고 있으나, 감정이 격앙하여 짐승처럼 다툴 때면 이오니아의 통속적 표현이 여과 없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고 청동기의 야만을 억누르라며 이성에 호소할 때는 소아시아 그리스인들이 아티카에서 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흐른 끝에 현대의 언어로 이를 번역하게 되면, 그 모든 입체성이 고전이란 이름의 궤도 바퀴에 짓이겨져 평탄화되고 만다. 이것이 《일리아스》 번역본을 마주할 때 현대인이 겪는 첫 번째 난관이다.
2. 닥튈로스, 스폰데우스
《일리아스》는 닥튈로스(장-단-단) 6보격dactylic hexameter이라 하면 떠올릴 수 있는 대표적 서사시이다. 그런데 이렇게만 설명하면, 한국어 사용자에게는 그 의미가 좀처럼 와닿지 않는다. 고대 굴절어 서사시의 6보격/5보격을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음보를 어떻게 나누었는지를 다뤄야만 한다.
고대 그리스어‧라틴어 작가들은 주로 모음의 ‘장단’을 통해 운문의 율격을 형성했다. 그리스어로 말할 것 같으면, 항상 ‘장모음’인 η‧ω, 항상 ‘단모음’인 ε‧ο, 경우에 따라 장단이 바뀌는 ‘유사모음’ α‧ι‧υ를 기준으로 운율이 형성된다. 여기에 ‘이중모음(αι, αυ, ει, ευ, οι, ου, ηυ, υι, ᾳ, ῃ, ω)’과 같은 요소가 추가되고, 모음축약/보상 장음화로 인한 ‘모조 이중모음’이 생성되기도 한다. 때로는 분음표(¨)를 사용하거나, 숨표(῾, ᾿)를 덧대어 연속된 모음이 이중모음인지 아닌지를 분명히 구분한다.
이렇게 구분된 장음(—)과 단음(∪)을 가지고 문장을 6보hexameter 또는 5보pentameter로 나누는데, 음수에 따라 간격을 두는 데 익숙한 우리로서는 독특하게 느껴질 만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단어의 길이에 상관없이 일정한 리듬에 따라 소리걸음을 나눈다는 것으로, 예를 들자면 이러한 형식이 된다. (굵은 글씨는 장음 구간, 사선은 분절, 이중 수직선은 중간 휴지, 밑줄은 본래 어휘의 길이이다. 소단락κῶλον 표시는 필자도 이해가 완전하지 않아 생략한다.)
μῆνιν ἄειδε θεά Πηληϊάδεω Ἀχιλῆος
μῆ-νιν ἄ / ει-δε, θε / ά, || Πη / λη-ϊ-ά / δεω Ἀ-χι / λῆ–ος
(— ∪ ∪)(— ∪ ∪)(— || —)(— ∪ ∪)(— ∪ ∪)(— —)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일단은 이렇다는 정도로만 봐주길 바란다. 보이는 것과 같이 한 음보는 2~3개의 음절을 지니고 있다. 여기서 장-단-단(— ∪ ∪)의 운율을 닥튈로스dactylos, 장-장(— —)의 운율을 스폰데우스spondeus라고 하며, 닥튈로스 6보격으로 쓰인 작품은 일정한 규칙 하에 닥튈과 스폰디를 반복하는 패턴을 가졌다. 1~4음보까지는 닥튈과 스폰디가 모두 쓰일 수 있으나, 5번째 음보에서는 스폰디를 거의 쓰지 않고(그 예외가 다름 아닌 호메로스 자신이다), 6번째는 반드시 2음절(장-장 또는 장-단trochee)로 끝나야 한다. 3~4음보에는 중간 휴지caesura가 들어가며, 몇 번째 음절 뒤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남성적/여성적 휴지로 구분된다.
이는 리듬감을 살려 듣기 좋게 구전하려는 소리꾼들의 연구가 축적된 결과물로, 음보율을 살려 고전 시를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정교하고 타당한지를 금세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설계는 본래의 언어를 벗어나게 되면 그 탁월함을 발휘하기 어렵다. 멀리 가지 않아도, 한국어 번역본으로 《일리아스》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이 말을 아주 잘 이해하고 있을 것이다. 고문古文도 현대어도 아닌 게 들쭉날쭉한 음보율로 낯선 이름과 상징을 읊어대니, 첫 독서에 그 명성을 체감하기란 쉽지가 않다. 서양 고전에 대한 경험과 제반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는, 고대 그리스 서사시의 완전한 번역이 왜 불가능한 목표인지를 알지 못하므로, 결국 작품의 형식을 오해하거나 역자의 역량을 문제 삼는 흐름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
일례로, 위의 음보율이 한국어로는 어떻게 분절되는지를 보도록 하자. (직관적 설명을 위해 어순을 다소 희생하는 것을 양해해주길 바란다.)
분노를 노 / 래하소서, 여 / 신이여, || 펠 / 레우스 / 의 아들 아 / 킬레우스의
( ̄ ˘ ˘ ˘)(˘ ˘ ˘ ˘, ˘)(˘ ˘ ˘, ||  ̄)(˘ ˘ ˘)(˘ ˘ ˘ ˘)(˘ ˘ ˘ ˘ ˘)
그리스어 본래 어순과 한국어 장음 규칙을 어설프게나마 적용한 결과, 예시의 직역은 그 리듬감이 뭉개지고 읽기 호흡이 어색해졌다. 무사한 것은 3음보의 휴지뿐으로, 합성어를 제외하고는 첫음절에만 장음이 허용되는 한국어 특성상 장단의 조화는 거의 없다시피 하다.
다음으로, 직역의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고치고 한국어 읽기 호흡에 따라 다시 분절을 해보겠다.
노래하소서, / 여신이여, // 펠레우스의 / 아들 // 아킬레우스의 / 분노를
▩□□□□, / ▩□□□, // ■□□□□ / ▩□ // ▩□□□□□ / ■□□
3개의 소단락κῶλα과 (사실상 음보 역할인) 6개 어절로 구조를 나누었다. 좀 더 그럴싸한 모양새가 나오긴 하지만, 여전히 ‘미적美的’이라 할만한 규칙을 찾기는 힘들어 보인다. 작게는 5‧4/5‧2/6‧3, 크게는 9/7/9로 각각 [1]/[3]/[3]의 음절 차와 0/-2/0의 음수 차가 형성되어 있으나, 그다음 문장에서 전혀 상관없는 패턴이 나오면 통일성 있는 운율을 형성할 수 없다. 3음보의 남성적 휴지는 2음보 끝이 그 기능을 대신하고 있고, 각 음보의 첫음절이 ‘단-단-장-단-단-장’으로 원전 6보격의 구조를 조금은 흉내 내고 있다. 하지만 이것 역시 닥튈과 스폰디의 느낌에 대응시키기는 모자라다.
한글에서 성조가 일찍 탈락하고 장단과 강세 표기가 없었던 것은, 음성학적 역동성이 크지 않은 대신 통사 구조의 분화가 활발하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달리 말해, 한국어는 ‘어떻게 조음할 것인가’보다는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에 따라 뉘앙스가 갈리는 언어이다. 과거 한문 어휘를 적극 차용하던 시절에 비해, 현대 한국어는 압운 의식도 상당히 약해져서 이제는 언어유희pun 정도에서나 그 일부를 찾아볼 수 있는 수준이다(대중가요도 음의 중첩과 멜로디 중심으로 이행하며 가사에서 같은 경향을 보인다).
종합하자면, 한국어는 닥튈로스 6보격의 느낌을 살려 번역하기 몹시 어려운 언어이다. 음의 고저/강약/장단은 물론이고 분절 방식에 큰 차이가 있기에, 호메로스 서사시의 아름다운 낭송 방식을 그대로 대입할 수는 없다. 이러한 난점은 단순히 언어를 바꾸는 일뿐만 아니라 그 번역본을 참고하는 재창작에도 영향을 주며, 이번에 분석할 〈거짓 꿈의 신탁〉 역시도 예외가 아니다.
3. 호메로스를 다시 쓰기
드리민 작가의 엽편 〈거짓 꿈의 신탁〉은 《일리아스》 2권 1행-34행의 내용을 개작한 것이다. 정확히 대응하는 범위는 2권 23-34행으로, 제우스가 보낸 사악한 꿈οὖλος ὄνειρος이 아가멤논을 부추기는 부분에 해당하며, 본작은 여기에 살을 덧대어 해석을 풍부하게 했다 볼 수 있다. ‘거짓false(혹은 lying) 꿈’이라는 표현은 영문판‧한국어판의 해석을 따른 것인데, 뒤에 ‘신탁’이 함께 오면서 절묘한 이중 수식을 보여주고 있다. (중의성에 관한 것은 ‘현대적 재창작’을 논하는 부분에서 설명하겠다.)
명료한 차이점은 본작이 문단 구성의 산문 형식으로 되어있다는 것인데, 이에 관한 필자의 가설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상술하였듯이, 한국어로 고전 그리스어 운문의 율격을 살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리텔링은 원작에는 없는 새로운 어휘와 문장을 추가해야 하므로, 굳이 본래의 6보격을 따르는 것은 부담이 크고, 각색의 한계상 작가 자신에게 맞는 형식으로 창작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필자는 판단한다. 게다가 원형을 모방함은 필연적으로 ‘비교’와 ‘경쟁’을 촉발하는데, 두 언어의 간극을 메꿀 방법이 없으므로 제대로 된 분석체계를 도출하기 어렵다. 따라서 원작의 구조를 고수하는 것보다는 자유 형식에서 텍스트를 더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귀결일 것이다.
둘째로, 기존 한국어 운문 구조를 ‘차용’하거나 새로 ‘개발’하는 것 어느 쪽이든 품이 많이 든다. 한국어 운문으로 된 작품 중 《일리아스》와 유사성을 가진 것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다. ‘원시-인도유럽-굴절어에 뿌리를 두고 있는 고대 그리스어’와 ‘한문-고립어 어휘에 순우리말 어근과 조사가 더해진 현대 한국어’는 어순과 수식에서 수렴 불가한 차이를 보인다. 이 때문에 대입할만한 구조를 찾는 게 쉽지 않은 건 물론, 마찬가지의 원리로 그리스 서사시에 맞는 한국어 율격을 창작하는 것도 큰 어려움이 따른다.
셋째로, 운문 형식이라면 음보율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데, 이 경우 그리스어 어휘의 혼입이 음절 수를 조절하는 데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필자가 보기에, 한국어 음보율은 음절의 수를 엄격하게 통제할 때만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다. 이는 내재율조차 외형률에 강하게 종속된다고 보는 필자 개인의 의견이므로, 대단히 문제가 있는 선언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주장을 철회할 방법도 없는데, 왜냐하면, 위에서 말했듯이 한국어 음소‧운소를 소재로는 운율에 활용할 수 있는 요인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높낮이, 강약, 장단에 있어 개성이 약한 한국어를 운문으로 쓴다면 남은 선택지는 무엇이 있겠는가? 기껏해야 조음 방법이나 위치 정도가 있는데, 이것은 어지간한 전문가가 아니라면 감히 흉내도 낼 수 없는 기법이다. 그럼 남은 것은 음수율과 음보율이 남는데, 문제는 그리스 서사시의 인물명‧별칭‧의역된 단어에 관계 수식구를 더하고 나면 쉽게 장황해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 난점을 시각화하기 위해 예시를 조금 들겠다. 다음의 두 단어를 보자.
ⓐ Ἀτρεΐδης
ⓑ ἱππόδαμος
여기서 ⓐ는 ‘아트레우스의 자손’이고, ⓑ는 ‘말을 길들이는 자’란 뜻이다. 한글 표기에서는 인물명만으로 손쉽게 4음절 이상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의미 번역 시 격조사‧보조사‧의존명사 등이 붙으며 복수의 어절로 분리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여기에 접속사나 대명사까지 고려하면 각 마디 간 등락이 극심해진다. 이러면 읽기 호흡에 따라 음보를 나누어도 딱 맞아떨어지는 구조가 나오기 힘들고, 이를 일일이 보정하는 것도 소요가 너무 크다. 그렇다고 임의로 그 크기를 줄이려고 하면 가독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를 ‘아트레이데스Atreḯdēs’, ⓑ를 ‘조마사調馬師’로 표기하면 음절은 줄어들겠으나 그 의미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접근성이 절실한 각색작으로서는 섣불리 선택하기 어려운 방식이다.
마지막으로, 지금은 ‘낭독’의 시대가 아니다. 엄한 율격의 운문문학이 유지되려면 이를 낭송하고 구전하는 사람이 존재해야 한다. 계층에 상관없이 작품을 향유하는 풍토 또한 받쳐주고, 무엇보다도 ‘습관적으로’ 운문을 소리 내어 읽을 필요가 발생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현대는 (냉정히 말해,) 경구警句와 산문이 주를 이루고 있다. 시를 쓰는 작가는 나날이 줄고 있고, 입으로 직접 낭독하면서 쓰는 이는 더욱 희소하다. 영상물의 대사를 패러디하거나 노래의 특정 구간을 잠시 흥얼거릴 뿐, 텍스트를 읽을 때 한국인은 그들이 가진 도서관만큼이나 조용하다.
설령 그렇게 창작된 적이 있는 고전 시가를 참고한다고 해도 문제가 있다. 현대인이 옛날 노래를 ‘낭독’하려 시도한다고 생각해보라. 지금 당장 징저우荆州 현지인을 붙잡고 “옛날 농군처럼 양보음梁父吟을 한 번 불러보라” 말하면 이를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한국 수험생에게 “서동요를 불러보라” 해도 결과는 매한가지다. 부르는 방식이 실전되어 그 당시의 낭송법을 알 방도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호메로스 서사시를 현대 한국어 운문으로 개작한다는 것은 그러한 요구만큼이나 당혹스러운 과제다. 그렇다고 엄격하지 않은 율격으로 다시 쓴다 해도 창작하는 입장에서 썩 만족스럽지 않을 것이다. 한 작품을 개작한다는 것은 곧 저자의 지음知音이 될 준비도, 그리고 그에게 도전할 준비도 되었다는 의미이기에. 결국, 우리는 고대의 서사시 작가와 같은 지평에서 겨룰 수 없다. 오직 각자의 향토에서 자신의 언어로 최선을 다할 뿐이다. 이 작품이 산문 형식으로 집필된 건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4. 현대적 재창작
장장 세 단락장에 걸쳐, 필자는 《일리아스》의 각색에 어떤 난점이 따르는지만을 지루하게 떠들어댔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으나, ① 〈거짓 꿈의 신탁〉이 왜 산문 형식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② 어째서 《일리아스》 한국어 번역으로부터 과감히 독립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본격적인 분석의 개시로는, 당연하게도 첫 문장에 관한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아래의 예시(2권 23행에 해당하는 내용)를 보도록 하자. (순서대로 ⓐ 호메로스 그리스어, ⓑ 천병희 교수의 번역본, ⓒ 본작에서 23행에 대응하는 문장이다.)
ⓐ εὕδεις Ἀτρέος υἱὲ δαΐφρονος ἱπποδάμοιο·
ⓑ 자고 있군요. 말을 길들이는 현명한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 아가멤논이여. 말들을 길들이는 현명한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여.
〈거짓 꿈의 신탁〉은 2권 23행을 샘플링하는 것으로 첫발을 떼고 있다. 보다시피, 《일리아스》의 서술 방식은 물론 운을 맞추기 위한 칭호epithet도 그대로 유지 중이다. 각 단락의 첫 문장은 가장 강렬하고 기억이 잘 남는 부분으로, 거짓 꿈의 첫 마디를 본래 형태 그대로 쓴 것은 각색작으로서 다분히 전략적이다. 청자가 아가멤논임을 주지시키는 이 문장은 본래도 말을 더하거나 뺄 필요가 없는 구간이므로, 이를 거의 고치지 않고 사용한 것은 좋은 선택이었다 할 수 있겠다.
달라진 점은 아가멤논의 이름을 직접 부르는 것과 말ἵππος이 복수형으로 표기되었다는 정도이다. 2권 23-34행에는 아가멤논을 따로 언급하는 구간이 없다(대충 6, 9, 18, 21행까지만 존재한다). 여기에는 배려와 함정이 공존한다고 필자는 보는데, 배려라 함은 그리스 신화가 낯선 사람들을 위한 부연이라는 것이고, 함정이라 함은 기묘하리만치 그리스‧로마 신화가 익숙한 특정 세대(?)를 겨냥했으리란 가설이다. 아가멤논의 일생과 그의 집안 내력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몹시 자극적이므로, 그의 이름을 언급하는 것만으로도 기대 심리를 자극한다는 게 필자의 의견이다.
ἵππος가 복수형이 된 것은 이런저런 짐작을 할 수 있겠으나 확실한 것은 없다. 접두어 ἱππο-로써 붙을 때 그것이 단수인지 복수인지를 나타내는 명징한 표지는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ἵππος는 일반명사(∀말)의 쓰임새로 추정되므로 한국어에서는 가산성이 중요하지는 않을 터이다. 그나마 유력한 것은 영문 번역인 the tamer of horses와 같은 논리를 적용했다는 설명이고, 그다음으로는 중간의 휴지를 기점으로 6-3-4 / 3-6-4의 음절 수 균형을 맞추려 했다는 정도이다. 혹은, 본디 말은 고대의 전략 자원이기에 여럿을 길들이고 소유하는 게 당연하다는 걸 강조하려는 의도일 수도 있으나, 여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조금 지나칠지도 모르겠다.
다음 차례로 비교할 것은, 당연하게도 바로 그다음 문장이다. (동어반복적인 문장 구조를 용서하시라. 의도한 바는 아니다.) 2권 24-25행에 대응하는 아래의 예시를 보도록 하자. (순서는 이전과 동일하다.)
ⓐ οὐ χρὴ παννύχιον εὕδειν βουληφόρον ἄνδρα
– ᾧ λαοί τʼἐπιτετράφαται καὶ τόσσα μέμηλε·
ⓑ 백성들을 돌보고 그토록 많은 일을 걱정해야 할 왕의 몸으로
– 이렇게 밤새도록 잠을 잔다는 것은 결코 옳은 일이 아니오.
ⓒ 사람들을 다스리고 많은 일들을 짊어진 왕이여.
– 어찌하여 아직도 잠자고 있는 것이오.
그리스어 본래 어순으로는 ‘밤새 자다니 안 될 일이오 지도하는 자로서 / 군중을 도맡고 많은 일을 돌보아야 하거늘:’ 정도가 된다. 〈거짓 꿈의 신탁〉은 거시적 형상으로는 한국어 번역본을 따르고 있고, 명제논리의 측면에서도 유사한 구조인 것 같으나, 자세히 따지고 들어가면 이 구간에서부터 문체가 일찍 분화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선, “백성”은 “사람”으로 바뀌었고, “돌보다”는 “다스리다”로 미세한 뉘앙스 차이가 생겼다.
‘백성百姓’은 본래 성姓과 씨氏를 가진, 굳이 따지자면 지배를 받는 대상이라기보다는 통치에 참여하는 계층(=백관百官)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것은 대성 호족의 협력을 얻고 동성 제후를 파견하던 시절로부터 출발했고, 성씨의 구분이 희미해지고 일반 민중도 성을 쓰게 되면서 그 의미가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혈연 사회의 흔적이 어근에 남아 있다. 서양의 관작을 번역할 때 하夏‧주周의 오등작五等爵을 사용했던 것처럼, 초기 한국어 번역은 ― 전근대에 집필되었거나 그 당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을 번역할 때 ― 이런 식의 대응이 상당히 많았다. 그런데 λαός는 단순히 휘하에 있거나 피지배 계층인 군중을 나타낼 뿐인 단어로, 백성과는 그 결이 미묘하게 다를뿐더러 그리스 영웅시대 사회상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 ‘사람’은 그 뜻을 완전하게 살리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백성보다는 본래 의미에 더 가깝고, ‘인민’을 지칭하기에 보다 폴리스적polis的인 표현이다.
‘돌보다→다스리다’의 경우는 (위와는 달리) 사람마다 의견이 갈릴만한 영역이다. 호메로스의 작품은 각 상징 간의 연결로 복잡하게 짜인 의미 층을 지녔다. 각자에게 부여된 역할은 엄격히 지켜지고, 그런 만큼이나 인물의 비유도 자연의 도식만큼 선명하다. 사자λέων의 성정을 타고난 영웅은 가축을 사냥하듯 목숨을 빼앗고, 목자ποιμήν의 책무를 부여받은 지도자는 울타리 안의 군중을 보호한다. 아가멤논은 사람들λαοί이 맡겨진ἐπιτετράφαται 목자로서 양들ὄῐ̈ες을 살피는 위치에 있다. 직관적으로는 ‘돌보다’가 호메로스 상징 구조를 이미지화하는 데 적합하게 보이지만, ‘다ᄉᆞ리다’에 어원을 둔 ‘다스리다’ 또한 ‘전사로서의 목자’에 부합한다. 이 부분은 명확한 규준이 없다면 작가의 목표에 따라 달리 쓸 수 있을 듯하다.
한국어 번역본 기준 25행에 대응하는 「어찌하여 아직도 잠자고 있는 것이오.」 구간부터는 소단락과 음보를 일치시킬 수 없는, 본격적으로 내재율 중심의 산문 구조로 변모한다. 이를 시각화하여 설명하기 위해 1문단을 아래 규칙을 통해 임의로 나누었다. (자르는 단위는 최대 8어절이다.)
[규칙]
사선(/): 분절
이중 사선(//): 보정된 휴지(‘음수‧어절‧청크‧읽기 호흡’ 분절이 중첩된 곳에 배치)
채워진 사각(■): 장음
빈 사각(□): 단음
원 숫자(ⓝ): 음절 수
붙임표(-): 명제논리상 연속
[1문단]
아가멤논이여. // 말들을 / 길들이는 // 현명한 / 아트레우스의 / 아들이여.
□□□□□⑥. // □□③ – □□□④ // □□③ / ■□□□□⑥ – □□□④.
사람들을 / 다스리고 // 많은 / 일들을 / 짊어진 / 왕이여.
■□□④ – □□□④ // ■② – ■□③ – □□③ / □□③.
어찌하여 / 아직도 // 잠자고 / 있는 / 것이오.
□□□④ / □□③ // □□③ – □② – □□③.
제우스께서 / 나를 / 사자로 / 보내시어 // 그대에게 / 이렇게 / 이르라 / 하시었소.
□□□□⑤ / □② – ■□③ – □□□④ // □□□④ – □□③ – □□③ / □□□④.
잠에서 / 깨어나 / 속히 // 훌륭한 / 정강이받이를 한 / 장군들이 / 이끄는
□□③ – □□③ / □② // □□③ – □□□□□⑦_■ / □□□④ – □□③
아카이아의 / 군세를 / 이끌고 // 저 트로이아인들의 / 도시를 / 불태우라고.
□□□□⑤ – □□③ / □□③ // □_□□□□□□⑧ – □□③ / □□□□⑤.
[음절+(metron)] [휴지] [청크]
1: 6/3-4/3-6-4(6) (1), 3 1+3
2: 4-4/2-3-3-3(6) 2 3
3: 4-3/3-2-3(5) 2 2
4: 5-2-3-4/4-3-3-4(8) 4 4
5: 3-3-2/3-7-4-3(7) 3 5
6: 5-3-3/8-3-5(6) 3 4
보이는 바와 같이 외형률을 추출할 만큼의 규칙성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운문문학의 개작이라는 정체성에 집중하기보다는, 자유 형식에서 살을 덧대고 내재율에 치중하려는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 증거는 2문단, 4문단, 5문단을 포함한 여러 구간에서 찾아볼 수 있다.
[2문단 中]
저것이 그대의 위업이오.
저것이 그대의 운명이오.
[4문단 中]
믿어 의심치 마시오.
두려워도 마시오.
그것은 그대의 몫이 아니오.
오만과 불손을 나에게 드러내지 마시오.
[5문단 中]
다른 도시와 헷갈리지 마시오.
특히 그대의 도시인 아르고스와는 더더욱 헷갈리지 마시오.
아르고스는 파멸하지 않을 것이오.
아르고스에 두 발을 딛는 이들은 파멸하지 않을 것이오.
그대의 머리 위로는 결코 재앙이 떨어지지 않을 것이오.
예시 이외에도, 두 발(3)/재앙(8)/운명(4)/도시(13)/불타다(6)/오만(3)/불손(2) 등의 단어는 반복적으로 나오면서 점층적으로 표상을 강화하고 통일성을 확보하고 있다. 이는 칭호와 더불어 상징 및 알레고리를 강화하는 고전주의적인 작법이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산문의 전형을 보이고 있다. 그런데 내재율을 검토하는 이 시점에 이르러, 필자는 한 가지 뜬금없는 질문을 던지고 싶은 욕구가 든다. ‘왜 이렇게까지 종용하듯 말하는가?’ 원작에서는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듯 요구하지는 않았었는데 말이다. 그저 아가멤논에게 도시를 빼앗을 신탁이 내려졌고 그것이 제우스의 뜻이라는 말로도 충분하지 않았던가? 걱정이라고 해봐야, 그가 달콤한 잠에서 깨어나 몽중의 이야기를 잊지 않을까 하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 이 거짓 꿈, 혹은 거짓 신탁은 왜 이렇게까지 아가멤논을 전방위적으로 흔들고 다그치는가?
기억하고 계실지는 모르겠으나, 필자는 세 번째 단락장의 시작에서 ‘제목의 중의성’에 관해 후술하겠다고 미리 선언하였다. 〈거짓 꿈의 신탁〉은 제목이 이중 수식 구조로 되어있다. 비문학에서는 기피되는 방식이지만, 문학의 세계에서는 해석을 풍부하게 만들고 뜻밖의 아름다운 오해를 낳기도 한다. 여기서 ‘거짓’은 ‘꿈’이나 ‘신탁’을 동시에 수식하면서, 그 내용이 ‘거짓 꿈’이거나 ‘거짓 신탁’일 가능성 모두를 열어두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꿈이 아닌 ‘의도된 신탁’이라는 의미(거짓 꿈)일 수도, 신탁이 거짓이고 꿈 자체는 거짓이 아닌 ‘진짜’라는 의미(거짓 신탁)일 수도 있다. 이러한 중의성을 의식한 채로, 작품 내 ‘구절의 반복’과 ‘제재題材가 추가된 독창적 부분’을 검토하면 독해의 새로운 지평이 열리게 된다.
〈거짓 꿈의 신탁〉은 《일리아스》 2권 23-34행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름들이 삽입되어 있다. ‘헬레네’, ‘메넬라오스’, ‘이피게네이아’, ‘아킬레우스’라는, “아가멤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 인물들의 이름이 말이다. 이것은 다분히 의도적인 가미이고, 필자는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만약 작중의 내용이 ‘거짓 꿈’이라면, 그것은 아가멤논의 자아ego를 공격하는 내용의 신탁이다. 그리고 반대로 ‘거짓 신탁’이라면, 그것은 아가멤논의 심리적 억압을 신화의 구조로 재구성한 것이다. 어느 쪽을 선택해도 네 인물이 아가멤논에게 의미하는 바는 모두 같다. 그들은 심층으로부터 기어 올라와 전의식preconscious에 손을 뻗는 충동과 억압의 그림자이다.
우선, ‘헬레네’는 트로이 침공의 ‘전쟁명분casus belli’에 해당한다. 그녀는 미케네 스파르타의 왕 튄다레오스의 딸이면서, 이후 스파르타를 통치하게 된 메넬라오스의 아내이다. 미케네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의 남하 이전 미케네 문명권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국가였다. 헬레네는 메넬라오스의 계승권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그녀의 옛 구혼자들과 아카이아인이 트로이를 공격하기 위해 연합을 이룬 주된 요원이었다. 그녀를 무사히 되찾지 못한다는 것은 아가멤논에게 있어 크나큰 실추이고, 형제인 메넬라오스의 정당성과 아카이아인의 지지를 모두 잃는 계기가 될 것이다.
다음으로, ‘메넬라오스’는 아가멤논이 ‘맹주로서 느끼는 부담감’을 선명하게 표상한다. 〈거짓 꿈의 신탁〉에서는 메넬라오스가 ‘형’으로 언급되는데, 이는 스파르타-크레타의 체급에 관한 알레고리일 수도, 펠로폰네소스 일대의 영향력을 우려하는 아가멤논의 자의식을 반영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이번 전쟁에서 반드시 헬레네를 되찾음으로써, 아트레우스의 자손 간 화합을 유지하고 맹주의 권위를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 그에게 있어 메넬라오스의 기대를 저버린다는 것은 그의 치세를 끝장낼 위기가 될 수도 있다.
세 번째로, ‘이피게네이아’는 아가멤논의 자아가 견디기 어려워하는 ‘실패’ 혹은 ‘죄의식’에 해당한다. 작중에서 이피게네이아에게 6문단 대부분에 달하는 비중을 부여한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 아트레우스의 자손은 ― 집안 내력에 걸맞게 ― 살면서 많은 피를 보아왔고, 여기에는 신성한 동물의 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의 사슴을 죽인 아카이아군의 죄를 대신하여 인신공희의 제물이 된 대속자代贖者이다. 본작에서 아가멤논은 딸을 희생한 것을 매우 크게 의식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그 기저 심리의 공백에는 죄의식/불명예/부성애/자격지심 등 여러 항목이 대입될 수 있다. 이피게네이아는 아르테미스 여신이 직접 구해 사제로 삼았으므로 일시적인 상승의 구조를 보이나, 아가멤논은 여전히 자식을 제물로 바쳐 용서받은 죄인이므로 하강의 구조를 띠고 있다. 이피게네이아-아가멤논의 관계는 지금 시점에서 보아도 상당히 복잡한 해석을 유발하는 구도이며, 엘렉트라‧클뤼타임네스트라와 함께 현대에도 살아남아 현대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마지막으로, ‘아킬레우스’는 아가멤논의 딜레마와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최대의 ‘반동 인물’이다. 아가멤논은 목동의 역할을, 아킬레우스는 사자의 역할을 부여받았으므로 겨룰 수 있는 분야가 다르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간극이 있고, 성정의 차이로 인해 트로이 원정에서 끊임없이 마찰을 빚는다. 아킬레우스는 가장 우수한 사자이므로 목동의 이익에 부합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반대로 아가멤논은 가장 큰 목자이므로 사자에게 고개를 숙일 수 없다. 그런데 원정이 길어지면서 아카이아군은 불만이 극에 달했고, 그것을 잠재우려면 전쟁을 빨리 끝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아킬레우스가 ‘반드시’ 필요하다. 아가멤논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만, 자신의 권위를 욕보이는 아킬레우스에게 애걸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진실이 그를 더욱 미치게 만든다.
꿈의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본 네 인물의 삽입은, 이렇듯 아가멤논의 심리를 입체적으로 표상하고 그 개연성을 부여한다. 꿈(소위 “신탁”)은 아가멤논이 생각하는 바 그대로 네 인물을 나열하고, 그럴싸한 근거나 논리를 들어 나름의 방식으로 그를 위로하고 부추긴다. 참으로 기시감이 드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마치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던 ― 명분에 짓눌려 점차 전쟁 중의 희생을 합리화하는 여느 통수권자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지 않은가?
군중을 사지로 내모는 양치기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내부의 정치적 불안이나 ‘동란’을 항시 우려한다는 것이다. 왜 꿈은 그토록 ‘아르고스’를 강조하며 트로이와는 다른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 말하는가? 꼭 그곳에서 무슨 변고가 생길 것처럼 말이다. 삼촌의 아들을 죽이고 그 아내를 약탈하였으며, 그녀와의 사이에서 낳은 친딸을 제물로 바쳤기로서니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불필요하게 말을 보태어 〈거짓 꿈의 신탁〉을 읽을 독자들의 재미를 빼앗지는 않겠다. 저 도시αυτή η πόλη까지 가는 나머지 여정은 스스로 개척해보길 바란다.
기원전 그리스에서 신화를 정신분석학자처럼 읽고 썼다면, 그 사람은 아마도 제전에서 털 빠진 닭 분장을 한 채 공연장 바닥을 쓸며 조롱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펠로폰네소스를 호령하던 현인과 미치광이는 이제 모두 죽고 없고, 오히려 우리가 그들을 한낱 소재로 써먹게 되었으니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현대인에게는 그들 문명의 퇴적층만큼이나 다양한 해석 틀이 마련되어 있고, 무궁무진한 창작의 가능성이 한껏 열려 있다. 인류 문명이 존속하는 한, 고전은 항상 같은 자리에서 변치 않는 이야기를 속삭이고, 지금을 사는 인간은 그것을 재치있게 오해하며 미래로 전달할 것이다. 현대적 재창작이란 이에 다름 아니다.
5. 우리들의 시대로 돌아와
전쟁의 광기가 날로 격화되는 파란만장 가운데, 〈거짓 꿈의 신탁〉과 같은 글을 만난다는 것은 즐겁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작가의 의도가 그 영역에까지 걸쳐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시대의 위정자들은 아직도 청동시대의 폭력과 야만에 사로잡혀 있고, 작품을 읽으며 자꾸만 그 모습을 겹쳐 보게 된다. 그들은 아가멤논보다 못하고 목자도 아닐뿐더러, 우리는 양이나 늑대도 아니고 딱히 계책 내는 자들βουληφόροι ᾰ̓́νδρες이 필요하지 않은데 말이다. 이전에 어떤 비평에서 남겼던 말이 생각난다. ‘우리 시대의 정서와 이야기를 그리스 비극의 형태로 쓴다면, 그것은 곧 그리스 비극이 되는 것이다.’ 왜 하필 이 시점에, 그때 그 선언이 다시 생각나는지….
더 떠들고 싶은 욕심을 버리고 작품 자체에 관해서만 평하자면, 필자는 이번 엽편 〈거짓 꿈의 신탁〉이 과도기적 형태에 있다는 생각이 든다. 본작은 다시 운문으로 돌아갈 수도, 아니면 산문문학의 본질에 충실하여 소설의 모태가 될 수도, 또는 구조를 본격적으로 보강하여 희곡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하자면, 현재 형태로는 그 어느 쪽의 강점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필자는 드리민 작가의 철저함과 신중함을 이해한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고전의 가능성을 붙잡는 데 성공한 작가에게 ‘어디로 가시나이까Ποῦ πορεύῃ;’라고 묻고 싶다. 이러한 스타일을 앞으로 누구에게, 어디서, 어떤 형태로 선보일 것인지 ― 추후에도 이러한 재창작을 지속 가능한 형태로 볼 수 있는지 궁금하다. 고전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하고, 또한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미래적으로 중요하다. 고전의 현대적 재창작은 줄곧 미지를 더듬는 작업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다. 필자로서는 그저 무한한 지지와 응원만을 보내고 싶을 따름이다.
개인적인 주문으로는, 한 번 공연 예술의 관점에서 본작을 다시 보아주기를 바라고 있다. 드리민 작가는 이미 〈클뤼타임네스트라〉에서 실력을 증명한 바 있고, 그렇기에 당시 필자도 좋은 코레고이가 함께하기를 기원하며 비평을 마무리했었다. 요 몇 년간 문화 예술 거리에서 상연했던 작품 중 만족스러웠던 게 없었던 탓인지, 사리사욕(?)으로라도 이런 주문을 떠올리게 된다. 아마 연극인들에게도 가뭄 속 단비가 되어줄지도 모른다. 첨언컨대, 필자는 절대로 포이보스나 디튀람보스의 이름을 가진 이들에게 사주받거나 하지 않았다.
그가 어디로 가든, 항상 지금 이곳에서 좋은 작품을 쓰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