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가 이 소설을 더러 어떤 소설이냐고 묻는다면, 저는 이렇게 답하겠습니다.
마술적 리얼리즘으로 구현된 인간성 탐구 소설
이라고요.
줄거리 요약은 편집장의 시선으로 잘 정리가 돼 있으니 생략하겠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B의 식물과 여부나 식물화 원인, 과정 따위가 아닙니다. 그건 하나의 상징적 연출과 기묘함에 속해 있으면서, 이 소설의 가장 근본적인 뿌리이기 때문에 그걸 부정하는 순간 소설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랜덤 채팅으로 자신이 식물이 된다고 고백한 남자, 그걸 듣는 조건만남 여자. 식물에 적합한 남자와 동물에 적합한 여자. 식물과 동물이라는 의도적인 대비와 배치. 작중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건 이러한 정반합을 통해서 동물(짐승)적 삶 그 이상의 무언가(합)으로 나아가는 것이거나, 혹은 반(동물)을 아예 부정하고 정(식물)을 남겨두는 것으로 보입니다.(결말의 의미심장한 마무리)
B의 고백은 인간실격의 요조를 떠올리게 합니다. 정상성에서 벗어난 자신의 신체와 행동거지 때문에 ‘교정’과 ‘치료’를 받지만, 도무지 나아지질 않죠. 요조는 적어도 ‘흉내’라는 걸 통해서 인간답게 살아가고자 했기라도 하지만, B는 애석하게도 그러지 않고(어쩌면 못하고) 40살까지 쉬었음 청년이 되었습니다.(만 나이 39세면 각종 청년 복지 정책의 ‘청년 정의역’에서 정말 아슬아슬하게 ‘청년’ 끝자락으로 쳐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건 B가 ‘정상성’에서 벗어난 사람이기에 ‘식물’이 되고, 그와 대비되는 J는 ‘별 생각이 없지만’ ‘동물’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또한 B는 식물의 특성으로 ‘생각을 적게 하고 한 가지 생각에만 몰두한다’고 하며, 그와 대비되게 동물은 그렇지 않고 끊임없이 주의를 환기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는 J의 여러 채팅창을 통해 의도적으로 부합하게 한 연출로 보입니다.
B는 자신이 식물이 된다는 고백을 마친 후, 자신을 옮겨달라고 부탁합니다. 실제로 그곳을 찾아가니 나무가 한 그루 있어 J는 그걸 업고 나오고요. 그런 뒤 J는 자신의 변화를 체감하며, 그 이상의 변화(식물화의 전조)까지 체감합니다. ‘동물’이었던 J마저 B의 고백과 옮겨 심기를 통해 ‘식물’로 나아가게 된 것이죠. 감화라고 불러야 할까요?
이러한 일련의 연출들은 제법 맞물려 돌아가는 듯합니다. B가 하늘을 바라보며 고백하는 어구들은 현란해서 제법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 소설의 합치를 얘기하기보다는 미묘한 불협화음들을 좀 더 다뤄보려고 합니다. 왜냐면 이 소설을 읽으면서 한순간 든 생각으로부터 끝까지 읽는 그 순간까지 그 생각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서울시 동대문구에서 별과 은하가 보이나? 이 문제를 굉장히 많이 곱씹어야 했습니다. 식물화 자체는 카프카의 변신처럼 ‘소설의 전제’로서 부정할 수 없는 소설의 핵심 장치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를 두고 마술적 리얼리즘으로서 이해했습니다. 하지만 별과 은하에 대해 얘기하는 장면을 두고 봅시다. 물론 이 역시 마술적 리얼리즘의 일환으로 볼 수 있습니다…만, ‘비현실’을 과감하게 현실로 편입시키는 것과 궤가 조금 다르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B의 사고는 굳이 별과 은하를 바라보아야만 진행되는 게 아니니까요. 이른바 ‘선택 사항’입니다. 분명 아름답고 멋진 비유긴 한데…… 동대문구에서 별이 보일까요? 그것도 서울에서? 처음에 별을 본다고 했을 때, 저는 ‘대한민국에서 별을?’이라고 생각하며 시골 내지는 강원도를 떠올렸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 ‘동대문구’라는 주소는…… 암만 이해하려고 해도 역시 힘든 지점이 있네요. 제가 감수성이 부족한 탓에 마술적 리얼리즘 연출을 폭넓게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하면 저도 할 말은 없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때문에 소설에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죠. 왜냐면 동대문구에서 별과 은하를 봤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B가 진정으로 사회가 규정한 ‘정상성’에서 벗어난 안타까운 한 명의 인간이 아닌, ‘진짜로 제정신이 아닌 환각을 보는’ 인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리고 J가 B를 옮길 때…… 통나무를 들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사람 몸통 만한 통나무는 상당히 무겁습니다. 어느 정도의 크기인진 모르나 B의 키가 그대로 나무로 바뀌었다면 J가 절대 못 들고 나왔을 겁니다. J가 특전사 남자였어도 힘들 텐데, 대나무 같이 속이 빈 게 아니면 나무는 굉장히 무겁습니다…… 그래서 제멋대로 의자 위 앙증맞은 크기의 나무로 바뀌었다고 상상했습니다. 그걸 용케 들고 뒷산까지 옮긴 J를 보니 그간의 ‘동물’적인 밤들이 운동이 된 모양입니다. 마지막으로 B의 논증 역시 그럴싸해 보였지만 치명적인 빈틈이 있었습니다. 그건 바로…… 생각을 누구보다 많이 하는 건 ‘식물이 되어가는 B’지, ‘동물처럼 사는 J’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진짜 식물이 된 B는 더는 ‘통상적인 범주에서의 생각’을 더 할 수 없겠지만, 그 이전까지 B가 제시하는 ‘식물과 동물의 사고 차이’의 완벽한 반례가 B 그 자신이라는 점이 상당히 아이러니했습니다. 논증에 대한 지적은 해체주의적인 접근이니 둘째 치더라도, 앞선 두 고증적 요소에 대해서 아쉬움을 토로할 수밖에 없는 건 이 소설이 ‘순문학’이라는 태그를 달았기 때문입니다. 마술적 리얼리즘도 리얼리즘이고, 이는 바꿔말하면 환상적 연출을 제외한 나머지 요소는 현실에 굳게 뿌리내려야 함을 말합니다. 그래야만 비현실과 현실의 경계가 ‘온전히’ 흐려질 수 있으니까요. 경계가 흐려지지 않고 ‘현실’적 요소마저 ‘비현실’로 느껴진다면, 이 소설이 대비시키고자 한 식물과 동물에 대한 고찰, 그를 통한 인간성과 정상성에 대한 탐구적 메시지 역시 ‘비현실’적인 대비로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물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마구잡이로 흐리는 연출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할 수도 있겠지만, 이 작품이 그런 류의 소설로는 읽히지 않습니다. 이 소설이 초점을 맞춘 건 ‘식물화’ 하나고, 나머지는 ‘현실’에 속한 부차적인 요소니까요. 바꿔말하면 그 부차적인 요소들의 결함으로 인해 저에게는 이 소설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것입니다.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지네요. 하지만 잘 읽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이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연출이 제법 잘 작동하고 있기에 ‘결함’임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던 것이니까요. 리뷰 의뢰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의견은 밝히지 않겠습니다. 잘 쓰셨으니, 조금만 더 현실에 발을 붙이신다면 더욱 잘 쓰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