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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사이버펑크 비평

대상작품: 존재의 대연쇄 (작가: 단요, 작품정보)
리뷰어: Campfire, 2일 전, 조회 43

아래의 인용글은 본 리뷰글을 쓴 후에 달린 작가님의 댓글입니다만, 작품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데에 (제가 그랬듯)큰 도움이 될 것 같아 본문에 앞서 첨부합니다. 작가님의 기 출간작 <트윈>에 대한 이야기를 포함하지만 이또한 <존재의 대연쇄>를 보는 관점에 도움이 될 것 같아 같이 묶었습니다.

…다른 모든 이야기에 앞서서 말씀드리고 싶은 부분은, <트윈>이야말로 철저히 그리고 노골적으로 신학적인 글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그 대체 가능이라는 부제가 딱히 제 작가적 의도가 아니라는 것이 중요합니다(저는 쌍둥이가 대체가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관심도 없습니다).

<트윈>의 핵심은 율법과 정념의 충돌이고, 더 나아가 초월적인 은총의 불가해성입니다.

요컨대 원리원칙과 ‘훌륭한 가치’들만 내세운다면 그 사람은 옳음을 말하는 입으로 사람을 죽일 것이고, 반대로 상대가 원하는 것을 이유불문하고 해주는 사람 역시 그 무절제한 태도로 인해 인간을 망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을 내세우다가도 사람의 마음을 보듬을 필요가 있고, 사람의 마음을 보듬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강경하게 율법을 관철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둘의 섬세한 균형은 실로 어렵고 난해한 것이며, 어쨌든 인간이 하는 일인 이상 셈법의 영향을 받습니다. 내가 이정도는 해 줬으니 너도 마땅히 이정도는 해야 한다, 너는 사랑할 ‘가치’가 없는 인종이다, 하는… 반면 신의 은총은 값이 없으며 무한합니다. 그러니까 신학적 체계 하에서 정념은 믿음의 동의어가 아닙니다.

[셈법으로서의 율법주의(육적) / 인간의 정념(육적) / 초월적인 것에 대한 믿음과 은총, 신비(영적)] 의 대립이 각각 있는 것입니다. 말인즉슨 <트윈>은 정념의 사도(민호)와 율법주의-물질의 사도(민형)가 [육과 쾌락의 표준]과 [맘몬의 율법의 표준]을 들고 충돌하는 동안 우혁이가 사랑의 신비를 겪은 사람으로서 아가페와 신의 은총을 간증하는데(“저는 회심한 김에 남한테 잘해주고자 합니다. 삭개오가 예수를 만난 뒤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주고 자신의 잘못은 4배로 갚게 되지 않았습니까?” 처럼), 그 사랑에 대한 간증이란 결국 신의 언어로 되어 있는 까닭에, 철저한 인간인 최민형 씨가 누가복음 15장의 첫째 아들로서 “니가 남한테 잘해주면 내인생 복구되냐? 그리고 니가 내 인생 복구해줄수는 있냐?” 라고 말하며 대차게 엇나가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율법과 복음], 그리고 [정의와 사랑]은 언제나 보완적이면서도 긴장적인 관계를 구성하고 있으며, 더 나아가 신의 값없는 사랑조차 인간 셈법과의 긴장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학이란 성경 구절 인용하고 구절을 풀이하는 것이 아니라(그건 사실 성경해석학의 영역입니다) 이러한 사고와 가치 표준들의 유기적인 총체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학이 어떤 학문인지를 모르고, 신학적 사고방식이 어떤 감정을 파생시키는지를 모르는 듯합니다. <존재의 대연쇄>의 결말에서 제가 느끼는 감정은 공포나 폭로나 허무함이 아니라 경건과 위의 세계에 대한 경외라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Coram Deo입니다. 그 정도입니다…

인간이 창조된 난쟁이에 불과하다는 관념이 어째서 공포스러운 것인지, 어째서 디지털적인 것의 전유물인지 저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신학적 차원에서 원래 인간은 창조된 난쟁이입니다. 진정한 공포는 이제 그 난쟁이가 주권자로서 다른 난쟁이를 만들게 되었으며 거기에 대하여 ‘창조주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 자체입니다). 셋째 하늘 위에 넷째 하늘이 있고 다섯째 하늘이 있으며 그것이 언젠가 절대자에게로 소급되어 올라갈 희망이 있다는 것은 오히려 은총입니다. 그 점에서 이게 무한소급의 공포에 대한 수많은 이야기(중의 하나)로 읽히는 건 [글이 그런 글이라서]가 아니라 [아무도 신학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단요 작가의 작품은 <트윈>, <수능 해킹(공저)> 두 작품을 읽은 상태로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에 대해선 신학적인 모티브를 자주 사용하는 SF작가라고 듣긴 했었지만, 공교롭게도 내가 읽은 그 두 작품은 그 작풍과 거리가 멀었던 터라 <존재의 대연쇄>를 처음 읽을 때는 초반부터 범람하는 신학과 SF요소에 다소 당혹스러웠다. 물론 처음으로 작가의 진면목을 목격했다는 즐거움도 있었지만, TempleOS를 써본 적도 없고 성경도 제대로 읽어본 적 없는 입장에서는 작품을 제대로 독해하지 못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도 존재했다.

소설은 ‘2025년 9월 13일 오후, 세계가 종말을 맞이했다’는 문장과 함께 시작된다. 이 종말은 주인공 자신이 2005년 9월 13일 새벽에 감전당했던 사건에서 비롯되었음을 밝힌다. 감전 직후 주인공은 의식불명 상태에서 기이한 꿈을 경험하는데, 그는 사방이 정사각형 타일로 된 공간에서 눈을 뜬다. 그곳에는 젊은 시절의 테리 데이비스가 있다. 데이비스는 어셈블리어에 능통한 프로그래머이자, 신의 계시를 받아 독자적인 컴퓨터 운영체제 ‘TempleOS’를 개발한 인물로 묘사된다. 그는 주인공에게 ‘불변하며 참된 말씀’이라며 세상을 구성하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원리를 설명하고 세계는 640×480 해상도의 16색 그래픽으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후 잠에서 깨지만 그날 이후 주인공은 세계의 본질이 8비트 변형 코모도어 시스템이자 16색 그래픽으로 이루어진(세상이 총천연색으로 보이는 건 사탄의 간계이다) ‘튜링 완전’ 세계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꿈에서 본 ‘신성한 격자 공간’을 평생 찾아 헤매게 되며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된다.

<존재의 대연쇄>는 테리 데이비스라는 실존 인물의 일화를 끌어들여 종교적 계시, 종말론적 분위기, 컴퓨터 코딩을 섞어 놓은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주인공은 현실의 복잡한 고통을 8비트, 16색, 코모도어 시스템이라는 극도로 단순화된 디지털 신학으로 환원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성경의 구절은 종교적인 것이 아니라 실행 가능한 명령어로 격하되거나 혹은 승격된다. 그러나 종말 명령어를 통해 도달한 ‘완전함’은 역설적으로 그 어떤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끔찍한 권태로 귀결된다. 고통이 소거된 자리에 남은 것은 환희가 아니라,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시스템적 불사뿐이다. 주인공이 이 권태를 타개하기 위해 스스로 창조주가 되는데, 마지막 순간 주인공이 만든 인공지능이 주인공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계시’를 경험하는 결말에서 이 소설의 세계관이 마트료시카 인형과 비슷한 형태의 재귀 구조임이 폭로된다. 또한 주인공 역시 상위 차원의 누군가가 실행한 시뮬레이션 속 난쟁이에 불과할 수 있다는 공포를 안긴다. 이는 구원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상위와 하위로 끝없이 이어지는 시뮬레이션의 층위만이 존재한다는 디지털 본래의 뉘앙스를 환기시킨다.

다만 딱 한 가지 아쉬운 건 이러한 원형적 서사 구조가 튜링 완전성과 정지 문제라는 테마까지 형식적으로 완성하는 면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독자로서는 무뎌질 만큼 접해왔기 때문에 시장에서의 평가를 전제한다면 다소 아쉬운 마무리라는 인상이 남는다. 그 점 외에는 흠잡을 곳 없는 빼어난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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