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결말을 포함합니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단순히 두 사람 사이의 로맨스뿐만이 아니라 ‘지구’와 ‘달’이라는 두 천체의 러브스토리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지구에 달은 하나밖에 없는 위성이듯, 달에 있어 지구 또한 하나뿐인 행성이기 때문에 둘은 자연스레 서로를 바라보게 됩니다. 인류가 오랫동안 밤하늘에 뜬 달을 올려다보며 저곳엔 무엇이 있을지 궁금해하고 노래해 왔듯, 달에서도 지구를 그렇게 볼 것 같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달, 그중에서도 ‘구름의 바다’는 지구의 중력과 환경을 모방하고 있습니다. 달의 여러 지명은 무슨 무슨 바다라고 불리지만, 이름만 그러할 뿐 실제로 물이 들어찬 바다는 아닙니다. 날씨 정원에서는 지구의 여러 지형 중에서도 달이 갖지 못한 ‘진짜 바다’를 특별히 여깁니다. 이는 화자가 날씨 정원에서 대륙과 바다가 섞여 있는 가운데에서 대륙만 보이는 현상을 ‘운이 나쁘다’고 표현하는 대목에서 드러납니다. 날씨 정원에서 유리돔 가운데에 지구가 위치하면 비를 내려주는데 사람들은 이때에 맞춰 반지나 팔찌 목걸이 등 푸른색이 나는 귀금속을 연인에게 내밀며 낭만적인 시간을 갖습니다. 이 푸른 색 역시 지구의 바다색이 되겠죠. 여기서 느낀 것은 그립다는 감정입니다. 아마도 루나리안은 지구의 환경을 그리워해서 날씨 정원을 찾는 게 아닐까요. 하지만 어른들은 달 정착을 방해하는 듯한, 이런 중력의 낙차에 거부감을 느끼고 구름의 바다를 싫어합니다.
그런데 아직 어른이 되지 않은, 지구에서 온 레이는 날씨 정원에서 비가 어떻게 내리는지를 궁금해합니다. <고독의 거울상>이라는 제목에 비추어본다면 레이는 달에서는 지구의 모습을 어떻게 재현하고 있는지, 말하자면 거울상으로 어떻게 비치고 있는지가 궁금한 것 같습니다. 어떤 존재가 상대에 의해 자기 존재를 확인하려는 것일까요. 그런 것이 사랑의 속성인지 어떤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레이가 이런 낯섦에 흥미를 느끼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는 츄러스를 나눠 먹는 장면이 통째로 좋았는데요. 지구산 밀에 월산 설탕을 듬뿍 묻혀서 주는 레이의 모습이 어쩐지 달에 더 가까이 머물고 싶은 마음을 나타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재회에서, 마지막에 또 한 번 츄러스를 먹으러 갑니다. 이 장면은 지구와 달의 로맨스가 다시 이뤄지는 것처럼 달달하게 느껴졌습니다. 여담이긴 하지만, 츄러스란 단어는 그 발음만으로도 로맨스에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습니까.
제가 SF를 좋아하는 이유 중의 하나는, 어떤 비현실적이거나 극단적인 상황에서 행동하는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너무나도 당연히) 둘이 같은 행성에 있었다면 그들의 만남이 이토록 지연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SF라는 장치는 그 둘을 지구와 달이라는 서로 다른 천체에 각각 떨어뜨려 놓습니다. 그래서 달을 보며, 지구를 보며 서로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옛날 이야기였다면 멀리 떨어진 연인이 보름달을 바라보며 ‘님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저 달을 보고 계실까’ 라는 식으로 이야기가 전개되었겠지만, 이 소설에서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저 별 어딘가에 네가 있겠지’ 라고 서로 ‘마주 보며’ 그리워하게 됩니다. 이것이 SF만이 할 수 있는 공간적 설정이며,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드라마입니다.
레이는 ‘나’와 만날 약속을 하지만 공간적 제약에 의해 그 약속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둘의 만남은 자꾸 연기됩니다. ‘나’는 이 시간을 고독하게 견뎌냅니다. 그리고 그 시간을 견뎌낸 후에 만난 레이를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저는 이 기간에 ‘나’가 레이에 대한 마음으로 ‘시간’을 채우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가, 레이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깨우치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장거리’를 대하는 ‘나’의 관점이 바뀝니다. 즉, 장거리를 ‘공간’이 아닌 ‘시간’으로 치환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레이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으로 온전히 채울 수 있는 것이었지요. 반지를 당장 주지 않겠다는 유예는 ‘나’가 처음에 장거리 우주 항해사가 되기를 꺼리며 시간을 유예하는 것과는 다르게 느껴집니다. 앞서 시간을 유예하는 것을 회피적 행동으로 치부했다면, 이제는 시간이 미뤄지는 것을 여유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도 레이는 레이이고 여전히 아름다우니까요. ‘나’는 이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느냐 하는 공간의 공허가 아니라, 지금 내가 레이를 사랑하고 있다는 시간의 충만함을 이야기합니다. 마치 거리의 제약 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요. 이 소설의 서술은 현재 시점에서 출발해 과거를 되짚었다가 현재로 와서 다시 미래로 향하고 있는데 그래서인지 ‘앞으로 사랑할 시간’은 굽혔다가 펼쳐내었을 때의 추진력이 실린 듯 힘있어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