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그저 싶었던’
필자의 리뷰를 읽었던 분이라면 필자가 작품 제목을 토대로 작품을 해석하기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도 제목을 토대로 작품을 읽어보았다. 만약 작품을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작품을 먼저 읽어봐주시길 바란다.
솔직히 부끄럽지만 필자는 제목을 처음 봤을 때 무슨 의미인지 추측할 수 없었다. 분명 작가님이 말하고 싶은 바가 있겠지만 단편적으로 보았을 때 물음표를 띄웠다. 구멍이 숭숭 뚫린 치즈처럼 묵직한 형태가 있지만 그 구멍의 의미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런 궁금증을 가지고 작품 속으로 들어갔다.
작품은 ‘미루’라는 인물을 중심으로 흘러간다. 굵직한 사연을 죽 나열하는 게 아니라 미루가 처한 상황을 파편적으로 보여준다. 선우의 문자, 미루의 오랜 기억, 미루의 업무 등 미루가 처한 현재를 흩뿌린다. 그러면서 미루가 자란 환경이 보통의 환경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이 부분이 꽤나 중요하다고 보았다. 인간이 삶을 대하는 태도가 가정 교육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물론 사이코패스처럼 주어진 환경보다 타고난 유전자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 기억도 하지 못할 만큼 어릴 때부터 쌓인—부모로부터 받은 감정이나 기억에 큰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생각하면 미루는 애정을 애타게 갈구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태어났을 때부터 없었고 어머니는 자식에게 관심이 없었다. 오죽하면 버리고 떠났다가 그분—불륜 상대의 아내가 죽고 나서야 보육원에서 다시 데려갔을 정도니까. 데려간 사실이 중요하지 않다. 데려가서 방치해둔 게 중요하다. 이럴 거면 왜 데려갔나 싶기도 하다. 아무리 매정한 어머니라도 모성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싶은데 그 후의 상황을 보면 딱히 모성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아 개인적인 궁금증이 남는다. 여하튼 미루는 새로 바뀐 환경—저택 식모의 딸이라는 환경에서 ‘선우’라는 세랑에 하나뿐인 사랑을 만난다. 세상—작가는 참 얄궂게도 서로 사랑해서는 안될 사이를 사랑에 빠지게 한다. 두 사람의 미래는 설명이 없어도 뻔하다. 선우는 아버지의 바람—강요대로 다른 사람—예은과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가진다. 그 모습을 보며 미루는 선우가 자신에게 돌아와주길 바라지만 사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다시 미루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미루는 저택을 빼면 수중에 아무것도 없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물려받은 저택을 유지하기에도 벅차다. 미루는 아르바이트를 한다. 이 지점이 우리가 사는 세계와 다르다는 것을 보이면서 그리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는 지점이다. 미루가 사는 세계는 코로나에 한 번이라도 걸린 사람은 죽으면 좀비가 된다. 듣기만 해도 끔찍하다. 아직까지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분명 있겠지만 필자가 추측하기에 모든 사람이 심하든 약하든 한 번은 걸렸을 거라 본다. 현실에 대입하면 참으로 무섭다. 여하튼 이런 상황은 현실과 다른 지점을 빚는다. 죽은 사람의 처리다. 현실에서는 보통의 장례를 치루겠지만 미루의 세계에서는 다르다. 좀비가 되기 전에 슬럼벨을 맞아야 한다. 그러면 사람의 형태로 죽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돈이 없거나 가정이 없거나 곁에 아무도 없는 사람은 좀비가 된다. 이런 좀비를 처리하는 일을 미루는 하고 있다. 소설에서 보여주는 예시들을 마냥 소설 속 이야기로만 보기 어려웠다. 고독사한 노인, 가정 학대로 죽은 아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젊은이.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을 소설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런 그들에게 미루는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냐고. 어쩌면 미루는 살아있으면서 죽은 그들과 동일시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미루가 맞이한 씁쓸한 결말에 놀라지 않았다. 미루는 벼랑 끝에 서있었고 언제든지 그곳을 뛰어내릴 각오를 하고 있었다. 한 번만이라도 선우를 볼 수 있다면 미루는 기꺼이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리고 그 바람은 이루어진다.
필자는 선우에 대해 오해를 하고 있었다. 미루의 시점으로는 선우가 세상 물정 모르는 순진한 도련님으로 그려지지만 필자는 자신의 욕망—애정 혹은 성욕—을 풀기 위한 도구로 미루를 이용했다고 보았다. 하지만 선우의 마지막을 보니 미루를 정말 사랑했나 보다. 좀비가 되면 생전에 이루지 못한 욕망을 해소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선우는 죽어서까지 미루와 사랑을 나누기를 욕망했다. 하지만 필자에게 이것은 변명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정 사랑했다면 마음에 들지 않는 결혼 따위는 하지 않았어야 했다. 설령 그것으로 아버지의 유산을 받지 못하고 길바닥에 나앉더라도 미루를 진정으로 사랑했다면 그래야 했다. 애꿎은 예은과 결혼하고 아이를 갖지 말았어야 했다. 이는 미루에게도 예은에게도 못할 짓이다. 만약 정당해보이는 선우의 바람이 죽음이 아니라 생으로서 계속 이어졌다면 미루의 미래는 그의 어머니가 맞이한 결말밖에 기다리지 않았다고 필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미루와 선우는 죽은 뒤에나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미루는 죽은 선우와 입을 맞추고 몸을 섞으면서 행복했을까. 필자는 잘 모르겠다. 두 사람이 얽힌 모습이 아직 나 여기 살아있다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발버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슬펐다.
여기서 한 가지 상상을 하자면, 필자는 선우가 사고가 나지 않았더라면 저택에 도착하고서도 문을 두드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한다. 두 사람이 죽어서라도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게 다행인가 싶기도 하다.
얼마 뒤—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좀비 처리를 하러 온 정식은 미루를 알아보지 못한다. 이는 미루가 좀비가 되어서가 아니라 정식이 인간에게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산 사람은 솔직하지 않고 정직하지 않다. 원하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그것을 얻기 위해 속임수를 쓴다. 스스로를 부끄러워 하고 자만하고 위선을 떤다. 정식이 산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이유다. 이러니 미루를 제대로 봤을리가 없다. 이런 이유는 정식도 피해갈 수 없다. 결국 그도 산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금의 선처를 할 수 있는 건 미루와 선우를 보며 ‘섹스하는 좀비 커플’이 아닌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고 편견없이 봐준 건 참작할 여지가 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자. 너희는 그저 싶었던. 필자가 처음 느꼈던 공백을 작품을 읽고 나서 알 수 있었다. 너희는 그저 ‘사랑하고’ 싶었던. 아마 사피엔스 작가님이 독자가 채우길 바랐던 빈칸이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서로 사랑하지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두 남녀의 죽음으로서 그 마음을 보일 수 있다는 게 참으로 안타깝지만 좀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전달한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전할 수 있을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하자고 말하자.
마지막으로, 작가님의 말씀에 따라 작품에 대해 아쉬운 점을 말해보려고 합니다.
과거에 대해 많은 인물들—그분, 예은, 선우 등—이 나오지만 미루의 짧은 플래시백에서 미루와 그들과의 관계가 모호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미루가 굴러들어온 돌인데다 선우와 그런 사이인 걸 눈치를 챘으니까 그런 거겠지 싶으면서도 독자의 추측에 불과하니 조금 더 명확하게 드러났으면 합니다. 그래야 미루가 현실에서 어떻게 심적으로 몰려 있는지 선우를 위해 미루가 무엇을 포기했는지—그 반대의 상황도—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우도 마찬가지 입니다. 앞선 글에서도 썼지만 저는 글이 끝날 때까지 선우가 미루를 진정으로 사랑한다고 느끼지 못했습니다. 작가님께서 그리 의도하신 거라면 드릴 말씀은 없지만 선우도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루를 놓았다는 편이 더 두 사람 관계를 애절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대로 독자가 오해할 수 있는 여지가 두는 것도 괜찮아 보입니다.
인물들에게 조명이 드리웠을 때와 드리우지 않았을 때 흐름이 이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전체적으로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마지막 미루-선우 커플을 찍는 경빈의 태도도 조금 뜬금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앞선 상황들에서는 열심히 촬영만 하던 사람이 좀비 커플이니까 낄낄 거리는 모습이 의아하게 느껴졌다고 할까요. 한 가지 의견을 내자면 첫 촬영 때부터 고독사한 노인은 흔하니까 표정이 뚱해있다고 하거나 고독사한 젊은 남자가 몸이 좋으면 일부러 자극적으로 옷을 들춘다거나 하는 장면이 있으면 죽음을 함부로 대하는 경빈의 태도를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아니면 촬영한 메모리를 따로 챙긴다거나 하는 대사가 있으면 경빈에 대한 의심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팀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마지막에 와서야 독자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그의 고백 또한 뜬금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앞선 장면들에서 팀장이 사자를 대하는 태도에서 사자를 생자보다 특별하게 여긴다는 느낌이 없었어요. 작가의 말을 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팀장의 입을 빌렸다는 느낌이 들어 아쉬웠습니다.
필자의 감상이 과하거나 의도와 엇나가더라도 사피엔스 작가님께서는 이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도 있구나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