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부조리로부터 공모(감상) 브릿G추천 이달의리뷰

대상작품: 스모르찬도 (작가: 사선, 작품정보)
리뷰어: 휴락, 22년 5월, 조회 63

스모르찬도(smorzando). ‘차차 꺼져 가는 듯이’라는 뜻으로, 음악에서 셈여림의 한 형태를 나타내는 용어입니다. 본인은 그다지 대단찮은 식견을 가진 평범한 독자에 불과하니, 여러 단순한 인상에 기대어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스모르찬도라는 제목은, 늦어지다 못해 차츰 흩어져버리는 신호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겠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본작은 류보와 모리가 사무엘 베케트의 희곡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류보는 ‘고도를 기다리며’를 ‘허무맹랑하고 흐지부지’하다 평가절하 합니다. 그는 소설(내지 희곡)을 거짓말로 치부하는 듯한데, 그 자신도 모리를 상대로 이런저런 거짓말을 하거나 자신의 거짓말을 ‘위대하다’며 그를 놀려먹더니, 정작 나중에 가서는 ‘한낱 거짓말에 뭐가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이외에도 류보와 모리는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기는 하지만, 류보의 거짓말로 인한 모호함 탓에 대부분 유의미한 이야기라고는 할 수 없어 보입니다. 이런 식의 영문 모를 약간씩의 어긋남은 몇 차례 더 나타납니다.

한편, 류보와 모리는 양자화된 시간 탓에 의미 지연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단층이라는 곳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메시지가 그들에게 도착했고, 그 발신자를 확인하기 위한 일에 그들이 자원했기 때문입니다. 류보는 메트로놈은 불편하고, 자신은 과학의 발전에 따른 희망도, 인류애도 느끼지 못한다며, 이미 그 발신자도 모두 죽고 없는데 단지 신호만이 닿았을 뿐은 아니겠냐 말합니다. 앞서 장난스러워 보였던 류보는 비관적인 태도를 취하고, 까칠하게 그에게 응수하던 모리는 류보를 달래가며 바람벽을 지나 숲 안쪽으로 진입합니다. 이때 모리는 직전에 안쪽에서는 오래 지나지 않아 동사할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정작 그에 대해 신경 쓰는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것을 선행되었던 어긋남의 반복으로 이해했습니다.

류보와 모리가 숲으로 떠나고, 이야기의 초점은 그들을 지켜보던, 정확히는 그들의 신호를 접하고 있던 ‘나’라는 인물로 옮겨갑니다. 그는 자신의 신호가 류보와 모리에게 닿으려면 35년의 간극을 넘어서야 하리라 독백하는데, 류보에 따르면 단층 인근의 대삼림이 확장된 것은 30년 전, 의미 지연 현상이 보고된 것은 15년 전입니다. 그렇다면 ‘나’는 류보와 모리 시점보다 미래의 인물일 것입니다. 이를 반증하듯, 류보와 모리가 거쳐 왔다는 페올, 적어도 밥은 제대로 먹을 수 있을 것이라던 페올은 ‘나’의 시점에서는 사람을 찾아볼 수 없는 몰락한 도시에 지나지 않습니다.

‘나’의 시점으로 넘어간 이야기는 한층 더 모호해집니다. ‘나’는 페올에 위치한 자신의 거처로 돌아옵니다. 그는 사냥한 고기를 숲에서 만나 동행한 고양이와 나누어 먹습니다. 그러다 ‘나’는 수첩을 발견합니다. 예전에 ‘나’는 수첩에 이런저런 글을 써 보았지만, 의미 지연 현상은 말소리 뿐 아니라 문자의 의미까지도 헝클어뜨려 놓습니다. ‘나’는 글쓰기를 포기하고, 수첩은 불태웁니다. ‘나’는 물을 받아 목욕합니다. ‘나’는 목욕을 하면서 수면에 비친 자신을 유령 같다고 생각합니다. 그 후 ‘나’는 총으로 자살합니다.(여기서 ‘나’의 죽음과 그 죽음을 탐닉하는 고양이의 장면은 할란 엘리슨의 소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나’는 고독했던 것 같습니다. 바람벽이 파괴한 도시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산 사람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와 함께였던 ‘아저씨’라는 존재는 어떤 사고를 통해 ‘나’의 눈앞에서 이미 목숨을 잃었습니다. ‘나’는 고양이에게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런저런 말을 하고, 죽기 직전에는 그 자신을 보듬으며 말을 겁니다. 망가진 것은 시간과 의미 뿐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죽은 ‘나’를 뒤로하고, 고양이는 다시 숲으로 되돌아갑니다. 고양이는 이미 그 삶의 생동감을 잃은 숲과, 무수한 병사들의 시체를 목도합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쏟아내는 의미를 몰랐고, 그렇기에 이해하지 못했으며, 그렇기에 서로 죽였습니다. 그들의 시체는 이리저리 깨지고 부수어져 그 형태를 잃어버렸고, 단지 흔적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고양이는 그것을 한낱 눈꽃, 얼음 조각과 구분하지 못합니다.

다시 초점은 류보와 모리에게 맞춰집니다. 정확히는 그들의 신호인데, 의미 지연 현상 탓에 고양이에게 들리는 그들의 신호는 유예되어 섞여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류보는 이 탐사에 의미가 있었는가, 무의미하고 죽을 것이 뻔한 탐사에 자원한 자신과 모리는 미친 것이라며 냉소합니다. 모리는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옳았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느냐 등 그의 말에 반박하고자 합니다.

이후 숲의 더 깊숙한 곳에서 고양이는 류보의 신호를 쫓아 그와 모리의 시체를 발견합니다. 류보는 다 끝났다며, 거짓말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에 더 알 수 없어진 진실을 알고 싶다, 살고 싶다고 흐느낍니다. 앞서 류보는 진정한 거짓말쟁이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비관하고 불신해야 한다, 그러나 세상 그 자체만큼은 전적으로 믿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서는 제대로 된 거짓말을 만들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거짓말을 할 수 없습니다.

이후 밝혀지는 사실로, 류보의 시체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모리의 시체가 있었습니다. 그는 발신기를 끌어안은 채 죽어 있었는데, 발신기는 조난당했음을, 그리고 구조를 바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류보와 모리가 받았던 신호, 그들을 단층으로 이끈 신호, 그리고 그들을 죽게 한 신호의 발신원은 가장 가까이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사실 이외에도 고양이의 시점에서 이런저런 묘사들이 더 있지만, 저로서는 피상적인 인상과 구체적인 해석을 결부시킬 만한 능력이 부족합니다. 이러한 공백들은 결국 다른 독자들 제각각이 채워나가는 수밖에 없을 테지만, 한편으로 결코 채울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또한 듭니다.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베케트의 대표작이자 부조리극이라는 장르의 대명사로서 유명합니다. 그렇다면 부조리극은 무엇입니까?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인간의 상황은 근본적으로 부조리하며 목적이 결여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의 부조리 철학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만. 이러한 부조리한 상황을 표현하는 부조리극의 방식으로는 비이성적이고 자기모순적인 등장인물의 성격, 의사소통의 혼란, 절망과 혼동, 불안을 느끼고 있는 버려진 존재로 묘사되는 극중의 인간 등이 있습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극 내내 어떠한 줄거리도 없으며, 그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 두 명의 인물이 고도라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전부입니다. 블라디미르는 지적이고 말 많은 낙천주의자로 고도가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반면 에스트라공은 단순하고 감정적인 비관론자로, 기억력이 나쁜지 반복해서 블라디미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기 일쑤입니다. 둘은 고도가 어떤 자인지 모르고, 올 것인지에 대한 확신도 없고, 그를 기다려 무엇을 하겠다는 것조차 없이 그저 기다릴 뿐입니다. 둘의 대사는 무의미한 말장난이 대부분이고, 사실 제대로 그 주고받음이 이루어지지도 않아 동문서답입니다. 그들은 어떤 유의미한 대화도 나누지 못합니다. 그들은 과거가 없고, 과거가 없으니 현재도 없고, 현재가 없으니 미래도 없습니다. 파괴된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고도는 내일 올 것’이라는 그들의 희망은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합니다.

본작이 부조리극의 작법과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많은 부분을 따랐을 것이라 확신하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본작과의 결부시키면 생각보다 많은 접점을 찾아볼 수 있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특히 기억력이 나쁜 에스트라공과 과거의 기억을 잃어버린 모리의 유사성은 이러한 추측을 꽤 지지해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고도를 기다리며’와는 잘 맞지 않는 부분도 많으니, 본작을 하나의 독립된 SF 부조리극으로 받아들이는 편이 나아 보입니다.

한편으로는 류보와 모리라는 이름에도 어떠한 의미가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보았지만. 류보는 ‘유보하다’, 모리는 죽음, 끝 등을 의미하는 ‘Mori’와의 연관성을 추측해보는 정도였습니다. 모리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류보의 말도, 지연시킬 대상을 잃어버린 지연이란 개념의 무의미성을 생각하면 어울린다 싶지만, 어떨까요.

마무리로서, SF와 부조리극이라는 장르의 결합은 좀처럼 상상하기 힘들고, 최소한 본인은 그런 것을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부조리극을 SF와 같은 대중에 가까운 장르와는 결합시킬 수 없는, 어떤 고상한 예술로 인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본작의 존재로 인하여 본인은 다소간 관점을 수정해야만 했습니다. 다시 생각해보면 방향성은 다를지라도 코스믹 호러라는, 유사하다면 유사한 장르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SF 부조리극에 대해 의심한 것은 반성이 필요한 일입니다. 본작 외에도 작가께서는 26편의 중단편과 엽편을 쓰셨는데, 이중 제가 접해본 것은 본작을 포함한 서너 편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작가께 느낄 인상은 상당히 협소한 기반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만, 그럼에도 저는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작가의 다음 작품을 읽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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