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호함이 돋보이는 제목 그대로 흡혈귀를 죽이는 이야기에 세기말의 뉘앙스까지 더해져 매력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건이 벌어지는 장소로 인적이 드문 동굴과 완공되지 않은 아파트 내부를 선택한 것 역시 음습하고 스산한 톤을 살리는 데에 제 몫을 잘 해내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이었던 주인공이 흡혈귀가 되었다는 사실을 자각한 뒤 스스로를 살해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하는 장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여기서도 인간이 흡혈귀가 되려면 다른 흡혈귀에게 피를 빨아 먹혀야 하는데, 구체적인 양상은 케이스마다 차이가 좀 있는 것 같아요. 그냥 죽어버리기도 하고, 흡혈귀가 되었다가 얼마 못 가 죽기도 하고, 주인공 ‘나’처럼 불에 태워도 죽지 않는 흡혈귀가 되기도 하는 식이죠. 여기에 대해 이 이상으로 단단한 규칙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나’는 시체가 된 가족을 이불처럼 덮고 있는 상태에서 깨어났는데, 희미한 기억 속 정황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가족을 죽인 것은 다름 아닌 ‘나’입니다. 끔찍한 장면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전 이 도입부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머릿속에 각인되는 이미지를 도입부에 적어도 하나 이상 만들어두면, 아무래도 단편으로선 유리한 구석이 많지요. 다음으로 인상 깊은 장면은 결말부에 ‘지인화’가 벽을 부수고 들어와 흡혈귀 ‘연지홍’의 가슴에 말뚝을 박는 장면이었어요. 다른 뱀파이어의 피를 뒤집어쓰는 카모플라쥬로 타겟에 접근한 뒤 타격감 있게 등장함으로써 캐릭터의 매력이 배가되죠. 이 카모플라쥬는 이야기 끝까지 굉장히 중요하게 쓰이는 트릭이기도 합니다.
‘나’는 흡혈귀가 된 뒤 인간일 때의 기억과 감정, 인간적인 이성과 기준들을 빠르게 잃어갑니다. 그건 흡혈귀로 살다 보니 무뎌진 게 아니라, 완전히 다른 존재로 거듭나면서 필연적으로 겪게 된 불가피한 변화입니다. 여기선 동물적 본성에 가깝게 묘사되고요. 하지만 이것 역시 모든 흡혈귀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법칙은 아닌 듯합니다. 알고 보니 ‘나’를 흡혈귀로 만든 존재는 ‘연지홍’이라는 여자인데, 그는 인간일 때의 기억과 가치관을 그대로 가지고 있거든요. 다만 연지홍이 스스로를 ‘반푼이’라고 비하하는 것으로 볼 때, 흡혈귀로서 정상적인 변이를 거친 쪽은 ‘나’일 것이라 짐작할 수 있죠. 전 여기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나’와 연지홍이 흡혈귀가 되는 과정에서 어떤 중요한 차이가 발생했는지를 풀어감으로써 이야기를 확장시킬 여지가 있다고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한편 흡혈귀가 인간을 물어 또 다른 흡혈귀로 만들면 둘의 관계가 부모 자식 관계로 성립되고, 피 냄새를 통해 서로의 존재를 감지할 수 있게 되는 설정은, 이 세계관 안에서 그들이 가족이나 사회를 형성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합니다. 그렇다면 아직 등장하지 않은 흡혈귀들이 어딘가에 무리 지어 존재할 가능성도 있겠지요. 그리고 주인공이 뱀파이어 죽이기에 관한 정보를 위키피디아로 검색하여 실행에 옮긴 건 그야말로 탁월한 설정이었다고 봅니다. 현대사회의 어떤 안쓰러운 단면을 떠올리게 하는 장치가 과하지 않게 양념처럼 올라가 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캐릭터의 매력은 셋 모두 충분합니다. 그리고 이들 사이의 관계 구도도 균형 있게 잘 짜여 있습니다. 당연히 이들에게는 아직 다 말하지 못한 사연들이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전 이 작품이 장편으로 발전할 동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