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의 고통은 우리가 회피하려 노력할 것을 전제로 발생합니다. 최소한 진화론적으로는 그럴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공포는 우리가 그 상황을 벗어나려 애쓸 것을 유도하는 감정일 것입니다. 되돌아보면, 많은 경우에 두려움은 우리 삶의 동력원이자 행동 혹은 선택의 이유입니다. 그것도 ‘공포를 초래하는 상황을 벗어나고자 하는 열망’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공포 문학은 존재에서부터 모순적입니다. 물론 공포를 활용한 콘텐츠는 텍스트를 활용하는 문학뿐이 아닐 것입니다. 공포 영화도 있고, 유령의 집은 물론, PC 게임에도 공포물이 있으니까요. 하지만 텍스트를 읽는 경험은 다른 것들과는 좀 다르겠죠. 다른 종류의 콘텐츠가 공포를 초래하는 시각적, 청각적 (혹은 공간적) 요소를 직접 제공하는 반면, 공포 문학은 텍스트만으로 공포의 경험을 전달해야 하니까요. 독자는 텍스트를 읽으며 공포를 ‘지속적으로’ ‘스스로’ 선택해야 합니다. 텍스트와, 텍스트에 연결되는 각종 심상을 직접 연결해 나가면서요.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그러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니 공포 문학을 읽는 행위는, 벗어나길 원할만한 경험을 자기주도적으로 취해야만 하는 기묘한 영역입니다.
여기서 아마 두 가지로 선택이 갈리지 않을까요? 하나는 최대한 영화나 다른 콘텐츠가 제공하는 공포와 비슷한 방식으로 경험을 제공하려는 시도일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텍스트의 특성과 그 모순을 그대로 안고 이를 밀어붙이는 것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즉 공포의 경험을 제공하기 위해, 어떤 선택은 공포를 느끼게 하도록 애쓰고, 다른 선택은 공포를 설명하려 애쓰는 것입니다.
<서원에 드리우는 공포>는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를 디딤돌로 삼고 있습니다. 저는 이 러브크래프트가 ‘설명되는 공포’를 실현한 작가라고 생각합니다. 즉각적으로 느끼기보다는 그의 세계를 읽고 참여하여 이해함으로써 그 공포적 우주를 경험하도록 이끌어 가니까요. 그렇다고 러브크래프트에게 공포의 느낌이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의 문장은, 영어로 읽을 때에는 크툴루보다 영단어가 무섭도록 만들 정도로 미려합니다. 또 공포를 선언적으로 제시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공포를 ‘두괄식으로’ 경험하도록 만듭니다. 즉 생각하지 못한 곳에서 충격을 주기보다는, ‘자 이건 무서운 거야. 왜냐하면…’의 느낌인 거죠.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서원에 드리우는 공포>에서도 고스란히 나타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러브크래프트적인 글은 호불호가 갈릴 수 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잘 쓰기도’ 몹시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러브크래프트적’인 것이 단순히 러브크래프트와 같은 것이라면, 러브크래프트와는 또 다른 시대와 문화권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이는 그저 낯설고 별 재미없는 이야기가 될 위험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끊임없이 흥미를 끌고 읽고자 하는, 주체적으로 공포를 선택하고자 하는 의지를 북돋는 동시에, 이러한 의지에 보상하는 공포의 경험이 함께 주어져야 하는, 어려운 도전이 되는 것입니다.
<서원에 드리우는 공포>는 어느 정도 성취를 했을까요? 러브크래프트와 닮았느냐고 한다면 여러 부분에서 분명한 접점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미지에 대한 공포, 설명되는 방식의 공포, 이질적이고 낯선 것이 날 것으로 제시되는 데에서 오는 위화감 – 심지어 해산물에 대한 거부감까지. 그리고 그 성과는 아마 반반 정도 – 하지만 여전히 기대함이 더 크다고 할 정도라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구성 면에서, 이 글은 액자적 구성을 취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외전’의 역할을 하기 위한 구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액자는 한편으로는 외부와 내부를 전복시킴으로서도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구조입니다. 아쉽게도 이 글에서 그러한 구조는 눈에 띄지 않는 듯합니다. 다만 외전을 충실힌 본편과 연결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화하고 더 풍성하게 하는 데에는 충분한 성취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서사 측면에서는, 세 편으로 나뉘는 바람에(그야말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이지만) 엇박자가 느껴지는 것을 제외하면 완급의 구조가 잘 맞춰져 있다고 느꼈습니다. 도입의 긴장과 결론의 긴장, 그 긴장의 의미를 심화하는 전개부. 읽으며, 공포로 인한(혹은 운명적인) 인물의 추락을 더 극적으로 구현하는 것도 좋지 않았을까,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주인공의 변화에 대비를 더 분명히 줌으로써… 등의 방식으로요. 물론 이 글에서 그러한 대비는 나타나고 효과적으로도 작동합니다. 다만 중단편인 만큼 더 강렬해도 무리없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공포는 직접 읽으며 경험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적 배경에서 구현되는 크툴루 신화는 어떤 것일 수 있을지, 혹은 우주에 대한 동양적 이해와 러브크래프트적 이해는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지,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공포’라는 것을 구체화할지? <서원에 드리우는 공포>를 읽는 분들이 제가 경험했던 흥미와 긴장을 느끼게 될지,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발견하고 기뻐하실지, 아니면 실망하실지는 단언할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러브크래프트의 ‘지적 공포’가 한국적 경험으로 재창조되는 데에 필요한 작은 단락들이 이 글 속에 분명히 심겨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계속해서 작가님의 글을 읽고 싶다는 기대감은, 무엇보다도 끝없는 탐색에 있습니다. “인류의 가장 오래된 감정은 공포이며, 가장 강력한 공포는 미지의 것에 대한 공포다.”는, 굉장히 서구적일 수 있는 선언이 동양, 혹은 한국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어떤 공유 가능한 문화적, 인간적 토대가 존재할까요? 이러한 탐색의 길을 한편으로는 기대, 다른 한편으로는 응원의 마음으로 돌아보며 몹시도 불친절한 리뷰를 몇 줄 남겨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