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신랑 – (하)

  • 장르: 호러, 판타지 | 태그: #섬 #신랑 #각시 #용왕
  • 분량: 80매 | 성향:
  • 소개: 진홍은 이 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 진홍이 원하는 단 한 가지였다. 더보기

내 신랑 –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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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행렬은 아침 일찍 서쪽 숲 끄트머리에서 첫 걸음을 뗐다. 이날을 맞이해 한껏 치장한 그들은 이 섬의 아낙들이었다. 용왕님의 사자(使者)로 신의 뜻을 받들어 둔덕을 넘고 포구를 지나 느긋하게 마을로 입성할 것이었다.

 

아침나절의 안개가 걷혀 날씨는 몹시 쾌청했다. 섬에서 가장 가파른 언덕에 올라 발돋움하면 아스라하니 먼 수평선 가까이로 육지 끝자락이라도 보일 성 싶은 날이었다. 손에는 꽹과리며 북, 징을 들고 어깨에는 장구를 걸친 채로 아낙들이 구성지게 목청을 뽑으며 어깨춤을 췄다.

 

“물렀거라, 용왕님께서 우리를 인도할지니 이 길을 따라 걸으면 새 각시에게 이를 것이다.”

 

혼례를 이틀 앞둔 날. 각시 후보인 열한 명의 소녀들은 새벽같이 일어나 치성을 드렸다. 가마에 불을 때고 물을 데워 머리를 감고 댕기를 드리웠다.

 

이 순간, 각자의 거처에서 가르마가 내려다보이도록 다소곳하게 고개를 수그리고 있을 그 소녀들의 복색은 같았다. 노랑저고리에 다홍치마. 소녀들의 어머니가 며칠 밤을 꼬박 새워 지은 새 옷이었다.

 

장지문이 흘려보낸 빛 속에서, 진홍이 기름을 발라 보드라워진 손등으로 꿰맨 데 하나 없이 반지르르한 비단 치마의 결을 만끽했다. 그러다 한쪽 무릎을 세우고 턱을 괴고서 달이는 지금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늠해보았다. 그 애 역시 인두로 다려 빳빳한 동정의 감촉을 느끼며 속눈썹을 내리깔고 있겠지? 한편으로는, 가슴 속에 억누를 수 없는 기대감을 품은 채로 무율과 자신의 혼례를 그리고 있을지 몰랐다.

 

진홍은 달이가 자신에게 고마워하리라고 믿었다. 먼 훗날 진실을 알게 된다면, 결국에는. 그것이 비록 생살을 찢는 것 같은 고통을 안긴다고 할지라도.

 

장구와 징, 북과 꽹과리 소리가 경쟁하다시피 서로를 윽박질렀다. 아낙들은 이미 당산나무를 비껴 들어온 이후였다. 보윤 역시 그 무리에 섞여 난장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팔을 젓고 입을 벙긋거리며 눈 밑을 그늘지게 만든 근심을 떨치기 위해 애쓰고 있을 것이다.

 

아낙들이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우르르 방앗간을 지났다. 푸줏간 앞마당에서는 한참동안 법석을 떨면서 제자리걸음했다. 가옥들 사이 텃밭을 가로지를 때에는 꿈결에 떠올릴까 무서운 욕설을 지껄이며 가래침을 뱉는가 하면, 안 그래도 넘어가기 직전인 목책을 차 기어이 분질러놓기까지 했다.

 

부락민들이 그들의 행각을 훔쳐보며 낄낄거렸다. 오라비의 어깨에 걸터앉아 돌담 위로 머리를 들이밀고 있던 꼬마 하나가 신나게 손뼉을 쳤다.

 

마을 전체를 들썩이게 하던 함성과 웃음소리가 진홍이 들어앉은 집 앞 골목을 지나 조금씩 멀어졌다. 장지문 근처에서 바깥의 소음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둘째가 철없이 까불거렸다.

 

“에이, 누나가 아니었나보네.”

 

얼결에 그 얘기를 뱉어놓고 녀석은 진홍에게 이마라도 한 대 쥐어 박힐까 겁먹은 눈치였다. 하지만 진홍은 그 경망스러운 놈의 말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그저 얌전히 정좌해 있을 따름이었다.

 

장지에 난 구멍으로 밖을 염탐하던 셋째가 거친 숨을 시근덕거리며 엉덩이를 뒤로 끌었다.

 

“오, 오고 있어. 여, 여자들이. 그 여자들이 오고 있다고.”

 

그때 문짝이 부서질 듯 난폭하게 밀려 나가더니 아낙들이 들이닥쳤다. 그 선두에 선 화이는 평소보다 곱절은 거대하고 당당해 보였다.

 

“들어라, 용왕님의 목소리를 빌어 외치나니 너, 진홍을 각시로 간택하겠다.”

 

서슬 퍼런 그 호령에 놀랐는지 아니면 낯가림 때문인지, 넷째가 엄지손가락을 입에 물고 울음을 터뜨렸다. 화이가 또 한 번 일갈했다.

 

“어허, 용왕님 앞에서 냉큼 엎드려 예를 표하지 못할까.”

 

동생들은 물론이고 여자들 모두 머리를 조아리고 부랴부랴 진홍에게 큰절을 올렸다. 연신 칭얼거리던 넷째를 아낙 하나가 솜씨 좋게 받아 안았다.

 

진홍이 버선발을 놀려 문턱을 넘으며 슬그머니 보윤을 넘겨보았다. 넷째를 등에 업은 어머니의 안색이 굳어 있었다. 진홍은 그의 귓가에 속삭여주고 싶었다. 어머니, 제가 이겼어요. 저는 이 빌어먹을 섬을 떠나고 말 거예요.

 

들어올 때 요란했던 행렬은 물러나는 동안에는 대단히 정숙했다. 누구 하나 노랫말을 흥얼거리거나 휘파람을 불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흥이 오른 얼굴로 길가를 기웃거리던 부락민들까지 부정이 탈세라 꼭꼭 문을 걸어 잠그고 숨어버린 뒤였다.

 

진홍은 아낙들의 호위를 받아 마을 후미로 이어지는 꼬불꼬불한 샛길을 걸었다. 서낭당 인근에도 어김없이 금줄이 늘어져 있었다. 풀이 돋은 마당에 새파란 포를 걸친 신랑 후보들이 열을 지어 꿇어앉아 있었다.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화이가 신호를 보내자, 진홍이 치마를 걷으며 디딤돌을 밟고 올라섰다. 신의 권위가 깃들어서일까, 좌중을 둘러보는 진홍의 눈매가 매섭도록 날카로웠다.

 

신랑 후보는 모두 일곱 명, 백년가약을 맺은 경험은 없으나 하나같이 혼기가 찬 성숙한 소년들이었다. 병치레 때문인지 뼈대가 가늘고 호리호리한 산은 그보다 나이가 적은 아이들 틈바구니에서도 혼자 도드라졌다. 각시를 마주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는 당부를 어기고 진홍을 쏘아보는 유치한 태도부터 그러했다.

 

진홍은 그를 무시했다. 신이란 자고로 관대해야 하는 법이었으니까.

 

침묵이 가뜩이나 긴장한 어깨들을 짓눌렀다. 뭇 것들이 신경을 곤두세운 채로 진홍의 선언을 기다리고 있었다. 밤나무 꼭대기에서 깃털을 가다듬던 뜸부기조차 앞으로 일어날 일을 은밀하게 고대하고 있는 듯했다. 

 

“들어라, 용왕님의 목소리를 빌어 외치나니.”

 

진홍이 등등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의 손가락이 허공의 한 점을 가리키며 스르르 뻗어 나갔다.

 

“너, 무율을 내 신랑으로 간택하겠다.”

 

잘생긴 그 소년은 디딤돌 바로 아래에 엎드려 있었다. 무율이 남몰래 미소 지었다. 그의 소망은 성취됐다.

 

혼절이라도 할 것처럼 비틀거리던 화이가 서낭당 벽에 등을 대고 가까스로 몸을 지탱했다. 진홍은 뒤통수에 쏟아지는 원망의 시선을 느끼며 짓궂은 미소를 머금었다. 진홍은 그 여자들과의 약속을 어겼다. 어젯밤 그들이 지목하라고 종용한 신랑은 무율이 아니었다. 산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그들은 협박에 못 이겨 진홍을 신의 자리에 앉혔고 이제 칼자루를 쥔 것은 시건방진 저 소녀였다.

 

이로써 피를 흘릴 자가 결정됐다.

 

그때 쿵, 하는 소리가 난데없이 정적을 갈랐다. 산이 바닥에 다시 한 번 머리를 짓찧었다. 돌발적인 그 행동에 놀란 몇이 거칠게 숨을 들이켰다. 개중 하나는 쥐고 있던 꽹과리를 놓치기까지 했다.

 

“진홍아, 진홍아!”

 

산이 야차처럼 울부짖으며 자신에게 거듭 상해를 입혔다. 찢어진 이마에 핏방울이 배어 나와 있었다. 그러는 동안 입술까지 물어뜯었는지 턱 아래까지 시뻘겋게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바로 옆 동무들이 그를 말리려고 했지만 병약한 육신 어디에 그런 괴력이 서려 있었는지 산은 일거에 그들을 물리쳤다.

 

“진홍아!”

 

산이 피범벅을 한 채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기겁한 나머지 미처 정신을 추스르지 못한 화이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고 더듬거렸다.

 

“저 아이를, 저 아이를, 어서.”

 

아낙들이 달려들어 산을 제압했다. 겉으로는 물러 보일지 몰라도 그들은 아이를 낳고 식구를 먹이고 가축을 도살한 자들이었다. 비쩍 마른 사내애 하나 끌어내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산의 반항은 극렬했다. 팔을 비틀린 채로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괴성을 질렀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진홍아, 네가 없으면, 나는, 나는!”

 

일단의 여자들이 진홍을 에워쌌다. 혼례가 내일이었다. 인간사의 사소한 다툼으로 말미암아 신을 위한 의식을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남은 일들은 신속하게 처리될 것이다.

 

“진홍아, 제발, 진홍아.”

 

절절한 그 호소가 듣는 이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그러나 진홍은 산을 조금도 측은하게 여기지 않았다. 도리어 그가 자신에게 얼마나 진 빚이 얼마나 크고 깊은가 생각하며 남몰래 한숨을 쉬었을 뿐이었다.

 

 

 

 

혼례는 성대하게 치러졌다. 불화의 몸짓일랑 끼어들 여지가 없는 자리였다. 사람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웃고 떠들었다. 음식은 얼마나 맛좋고 넉넉한지 노인들이 신랑 각시의 백년해로를 기원하며 닭을 날릴 즈음 개들마저 배불러 있었다.

 

이제 잔치는 파했다. 어린 부부는 초례를 치르고 배에 오를 것이고 마을은 이전과 같아질 것이었다. 그들은 바쳐 마땅한 것을 올림으로서 한해 동안의 무사태평을 약조받았다.

 

오늘의 해가 죽고 밤이 되살아날 무렵, 무율은 가마에 실려 있었다. 어지럼증 때문인지 똑바로 앉아 있기가 불가능했다. 무율은 폐색된 그 공간 속에 갇혀 속수무책으로 가라앉는 몸뚱이를 추스르고자 애썼다. 가뜩이나 속이 부대껴 죽을 지경인데 저 여자들은 왜 저런 기분 나쁜 노래를 부르고 있을까, 연신 툴툴거렸다.

 

휘장 저편에서 나지막하게 경(經)을 외는 소리가 들렸다. 육체적으로 허약해져 있어서인지, 무율의 귀에는 그 소리가 초상집에서 곡하는 소리처럼 음침하게 들렸다.

 

무율이 기억하는 마지막은 합근례였다. 무율은 진홍과 마주앉아 시반과 수모가 따라주는 술을 호쾌하게 들이켰고, 어느 순간부턴가 정신이 혼미해져 두어 번 눈을 끔뻑이다 푹 고개를 꺾었다. 몇 식경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는지 몰라도 깨어나 보니 사인교에 올라 있었다. 흔들리는 어둠 속에서 무율은 완전히 깨어 있지도 그렇다고 잠들어 있지도 않은 상태로 엎어져 있었다.

 

무율이 마른침을 삼키며 끙끙거렸다. 시원한 물 한 사발만 마시면 정신을 차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팔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무율은 고작 합환주 두 잔에 취해버린 스스로가 한심스러웠다. 골을 빠개는 듯한 두통을 의식하지 않기 위해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다 예기치 않게 달이를 떠올렸다. 그 아이와는 두 번 다시 만날 일이 없겠지. 잘 지내라는 인사도 못 했는데.

 

가마는 쉴 새 없이 나아갔다. 돌다리를 건너고 숲을 지나 겹겹의 문을 넘고 또 넘었다.

 

사인교가 정지했다. 여러 손들이 무율을 가마 밖으로 끌어내렸다. 목적의식이 확고한 손길들이 그를 이리 옮기고 저리 날랐다.

 

무율은 그들에게 반항하지 않았다. 이 또한 의식의 일부라면 기꺼이 따라야 할 터. 여자들은 소리 없이 움직였다. 극도의 조심성을 갖추고 신속하게 일을 해치웠다.

 

무율이 요 위에 눕혀졌다. 탁, 문이 닫혔다.

 

그때에 이르러서도 무율은 자신이 어떤 위기에 처해 있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밭은 숨을 뱉으며 오늘은 각시의 품에 안겨 잠들어야지, 안일한 꿈이나 꾸고 있었다.

 

이 밤이 끝이 아니었으니까. 앞으로도 무수하게 많은 나날 동안 내 각시를 어루만질 수 있었으니까.

 

오산이었다. 이 밤은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끝나지 않을 예정이었다.

 

무율의 발아래 어딘가에서 스륵 스르륵 쇠줄 끄는 소리가 났다. 무율이 신음하며 굼뜨게 고개를 들었다.

 

각시는 쇠줄에 묶여 있었다. 피에 전 활옷을 입은 그가 언젠가 스스로 뜯어먹었는지 모를 썩은 입술을 벌렸다.

 

각시가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의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온 것은 인간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소리, 짐승의 포효였다.

 

 

 

 

보윤이 돌각담이 끝나는 곳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거기서 백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보윤이 고개를 돌린 채로 팔을 내질러 진홍에게 보퉁이를 떠안겼다. 진홍에게는 시선조차 주고 싶지 않다는 듯한 태도였다.

 

“가거라, 어서.”

 

진홍이 머뭇머뭇 얼굴을 들었을 때 보윤은 이미 그를 등진 뒤였다. 불을 밝힌 등롱이 대오리 끝에서 대롱거리며 멀어졌다.

 

진홍이 눈물을 글썽이며 두 팔로 보퉁이를 부둥켜안았다. 진홍은 더는 댕기를 드리우고 있지 않았다. 여느 아낙들처럼 머리를 올리고 허투루 흘러내리는 일이 없도록 양옆으로 단단하게 비녀를 찔러 고정시켰다. 연화 역시 살아 있었다면 검고 탐스러운 머리채에 버드나무를 다듬어 만든 이 백목 비녀를 찔렀을 것이다.

 

백이 담뱃대를 털어 허리춤에 도로 차곤 진홍을 반기는 몸짓을 했다.

 

“이야, 결국 해냈구나. 축하해. 이럴 줄 알았어.”

 

백의 반색에도 진홍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백이 아무렴 어떠냐는 듯 미소 지으며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무심한 태도로 뱃사공을 따라 걷던 진홍이 포구 근처에 다다라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며 뒤늦게 허청거렸다. 가슴속에 차오른 회한 때문인지 태연하게 걸음을 뗄 수 없었다.

 

어쨌거나 진홍은 아직 어렸다. 아무리 후회하지 않겠다 다짐했다 한들 이런 일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리 없었다.

 

이 밤, 괴수는 무율을 먹고 그 피로 목을 적실 것이다. 그리하여 속수무책의 허기와 갈증을 채운 다음, 이 봄이 지나고 여름과 가을, 겨울에 이르기까지 긴 잠에 빠져들 것이다. 그에게 바칠 제물이 끊이지 않는 이상 이 섬은 대대손손 안녕할 것이다. 그것이 괴수와 인간 신랑의 초례이자 꽃잠의 비밀이었다.

 

그 여자들은 무율을 잠들게 했다. 그 점이야말로 진홍에게는 일말의 위안이었다. 무율은 진짜 각시가 누구인지 보지 못할 것이므로.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짐작하지 못할 것이므로. 무율이 기분 좋게 들이켰으나 자신은 마시는 시늉만 한 그 술에 이 섬의 사내들이 연초에 섞어 피우는 꽃을 말려 빻은 가루가 들어 있으리라고, 진홍은 추측했다.

 

상심해 있는 진홍을 달래기 위함인지 백이 다정하게 속살거렸다.

 

“남쪽 포구에 다다르자마자 나와 다시 혼례를 올리는 거야. 걱정할 것 없어. 나만 믿고 따라오면 돼. 나는 처음부터 네가 마음에 들었거든.”

 

진홍이 불쑥 물었다.

 

“당신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예요?”

 

“전부 다.”

 

백이 웃으며 덧붙였다.

 

“나는 쫓겨난 각시의 자식이거든.”

 

진홍은 그제야 백이 어떤 사연으로 이 임무를 맡게 됐는지 상상할 수 있었다. 백이 이 섬에서 무엇을 받아가 육지에 파는지, 그 거래가 이곳의 부에 어떻게 이바지하는지도. 백이 어깨를 들먹이며 덧붙였다.

 

“뭍에서 산다는 게 네가 상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를 수도 있어. 저 밖은 이전과 한 치도 달라지지 않았으니까. 멀쩡한 사람들까지 미치게 만드는 곳이거든.”

 

백이 제 흥에 취해 이 얘기 저 얘기 늘어놓았다.

 

“첫 번째 각시는 무릉도원에서 쫓겨나는 기분이었겠지. 그래도 별 수 있었겠어? 자신이 고른 신랑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해들은 후에는 더더욱 정신을 차릴 수 없었을 거야. 반항할 마음을 품을 새도 없이 눈물을 쥐어짜며 배에 몸을 실어야 했겠지.”

 

그때 괴물의 부르짖음이 발톱이 날카로운 새처럼 밤하늘을 찢으며 그들의 머리 위를 스쳐 지났다. 백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곧 그 일이 시작될 모양이야. 서둘러 닻을 올려야겠어.”

 

진홍이 눈을 가늘게 뜨고 돌각담 위로 용마루를 드러낸 기와지붕을 바라보았다. 연화는 자신이 미웠을 것이다. 언니의 여린 마음으로는 제 손으로 한 생명을 괴수의 아가리에 처넣었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연화의 목을 조른 건 죄책감이었다. 그 자신의 두 손이었다.

 

비명은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가늘게 잇닿았다. 백이 눈살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왜 저러는 거지. 무슨 문제라도 생겼나.”

 

보퉁이를 안은 진홍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돌담 옆 흙길을 노려보던 진홍이 본능적으로 뒤돌아섰다. 백이 돛을 손보다 말고 깜짝 놀라 외쳤다.

 

“어이, 어디 가는 거야? 이제 곧 떠날 거라고.”

 

진홍은 그 자리에 멈추기는커녕 한층 빠르게 발길을 옮겼다.

 

“잠깐만 다녀올게요.”

 

“어딜?”

 

“저 집에요.”

 

진홍이 담장 너머를 가리켰다. 이 마을에서 하나뿐인 기와집, 진짜 각시가 잠들어 있는 곳.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백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짜증을 냈다.

 

“떠나고 싶어 했잖아. 이 마을에 잠시도 머물고 싶지 않다고. 이제 와서 왜? 뭐 때문에?”

 

눈물이 마른 진홍의 눈가에 사나운 기색이 어렸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의 기백을 되찾았다.

 

“당신 몫을 받으려면 여기에서 기다려야 할 거예요. 바로 이 포구에서. 알고 있죠? 이 보퉁이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걸 뭍으로 가져가 높으신 분들에게 팔아야 하잖아요. 꽃이요. 연초에 넣어 피우면 근심 걱정을 잊게 해준다는 흰 가루 말이에요. 떠나지 말아요. 여기서 기다리세요. 나는 꼭 돌아올 거예요.”

 

백이 초립 끈을 당기며 우물거렸다.

 

“정 그렇다면 알겠어. 그래도 오래는 안 기다릴 거야. 한 식경 뒤에는 혼자서라도 배를 띄울 거라고. 내 말 알아듣겠어?”

 

그러나 진홍은 어둠 속으로 이미 녹아든 뒤였다. 백이 뱃전에 맥없이 걸터앉았다.

 

목련꽃이 떨어지고 있었다.

 

 

 

 

그 집은 돌각담 안으로 세워진 겹겹의 내담과 샛담, 차면담과 중정, 정원에 에워싸여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