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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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일.

 

 

 

커피를 진하게 타 난간에 기대 천천히 마신다. 도대체 이 쓴 음료를 왜 마실까. 집에 늘 커피를 사다 두기는 했지만 나는 커피를 싫어한다. 커피는 오로지 손님 접대용이다. 물론 집에 오는 손님이란 인희 밖에 없다. 쓴 음료를 억지로 삼킨다.

 

요즘은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인희 뒤만 쫓는다. 인희와 갔던 공원을 다시 간다. 인희와 봤던 영화를 다시 본다. 인희가 해줬던 요리를 다시 해본다. 인희에게 선물했던 액세서리를 찾아본다. 인희에게 써 줬던 편지와 같은 편지지를 찾는다. 인희가 듣던 노래를 찾아 듣는다. 언제 어디를 가더라도 항상 인희와 관련된 일들이 떠오른다. 동네에 인희 흔적이 가득하다. 가끔은 대학교 근처도 찾아가보고 싶을 때도 있다. 이제 장거리 운전은 일도 아니다. 하지만 갈 수 없다. 절대 가까이 가고 싶지 않은 장소가 있으니까.

 

 

 

나는 대학원생이 되었고 인희는 졸업반이 되었다. 폭풍 같은 시기가 왔다. 서로 논문 쓰랴 읽으랴 정신이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저녁시간에 연구실에 안 가기에 그 전에 남들이 하는 일을 다 끝내야 했다. 게다가 저녁에는 일 한다고 거짓말을 해 놨기 때문에 혹시라도 길에서 연구실 사람을 마주칠까 조마조마했다. 나쁜 소문이 항상 따라붙어 언제나 몸을 사려야 했다. 여기서 소문이 더 늘면 견딜 수 있을까. 나는 어렸고 사람들과 교류가 없는 만큼 성장이 느렸다. 여전히 내 안에 틀어박혀 인희에게만 기댔다.

 

인희도 인희 나름 힘들었다. 실습도 해야 했고 시험도 따로 준비해야 했다. 부모님 희망에 따라 교육자의 길을 걷겠다 했지만 정작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다.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랐다. 서로 못 만나는 날이 많아졌다. 날카로운 문자를 주고 받았다. 인희와 나는 엄마 아빠처럼 바빠서 싸웠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도 참 나쁜 년이다. 왜 그렇게 내 생각만 했을까. 어쩌면 미연언니가 떠난 이유도 내가 너무 이기적이었기 때문일까. 나는 내가 받는 상처만 생각하고 다른 사람에게 나도 상처를 준다는 생각을 못한다. 평생을 그렇게 산다.

 

 

 

인희는 내 간호사이자 약사이자 상담사이자 사회복지사이자 교사이자 변호사였다. 인희는 내 상처를 가려주었다. 인희는 내 상처를 치유해주었다. 인희는 내 이야기를 언제나 들어주었다. 인희는 굶어 죽어가는 나를 살려주었다. 인희는 나에게 사람과 사람이 사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인희는 언제나 내 편에 서주었다. 인희는 내 세상이었다.

 

 

 

커피는 이미 다 식었다. 내 위는 눈치가 없다. 또 일 달라고 시끄럽게 울어댄다. 그래 오늘도 하루를 사니 먹고 살아야겠지.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거리로 나간다.

 

차창을 활짝 열고 인희가 좋아하던 가수의 목소리를 튼다. 세상은 어제와 같고 시간은 흐르고 있고 나만 혼자 이렇게 달라져있다.[1] 그래 나만 변하는구나. 언제까지 이런 세상에 혼자 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시간은 흘러간다. 갔으면 오지 말 것이지 굳이 미련하도록 다시 온다.

 

카레를 끓인다. 나는 카레가 좋다. 가끔은 당근이나 감자만 넣고 아무것도 안 넣고 끓여둔다. 밀폐용기에 담아 차곡차곡 냉장고에 쌓아뒀다가 하나씩 꺼내 먹는다. 그리고 그날 그날 재료를 추가한다. 비프카레가 먹고 싶으면 소고기를 사다 넣는다. 치킨카레가 먹고 싶으면 치킨을 시켜서 찢어 넣는다. 치즈도 넣어본다. 해산물도 이것 저것 골라다 넣어본다. 이런 저런 채소만 많이 넣고 끓이기도 한다. 카레는 스케치북처럼 넣는 재료마다 달라진다. 오늘 카레에는 뭘 넣어볼까.

 

 

 

그날도 종일 카레를 끓였다. 인희와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었는데 과제를 못 끝냈다고 다음에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정말 바쁜 것 같았다. 밖에서 밥을 먹기 번거로울 것 같아서 반찬이라도 해주려고 했다.

 

당근 감자만 넣고 끓인 기본카레를 작은 냄비에 옮겨 담고 소고기 넣고 끓여서 한 통. 돼지고기와 햄을 썰어 넣고 끓여서 한 통. 삶은 닭 가슴살을 찢어 넣고 끓여서 한 통. 양파, 파인애플, 사과를 넣고 끓여 한 통. 볶은 양파와 양송이 버섯을 넣고 끓여 한 통. 인희는 조금씩 먹으니까 이 정도면 일주일은 먹겠다. 카레를 가방에 차곡차곡 쌓아 둘러메고 인희 집에 가는 길에 마트에서 인스턴트 밥을 한 박스 사서 낑낑거리면서 들고 갔다.

 

인희 집에는 전자도어락이 없었다. 언제나 열쇠를 고집했다.

 

 

 

번호키는 진짜 낭만이 없어요.

 

그냥 삑삑 누르고 들어오면 재미없잖아.

 

벨도 눌러보고 문도 두들겨보고 안에서 누가 나올지 기다리는 낭만이 있어야지.

 

그리고 밖에 나갈 때 열쇠 숨겨놓고 나가면 재미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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