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일., 104일., 1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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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일.

 

 

 

어제는 얼마나 울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렇게나 아프고 슬펐던 하루가 시간만 지나면 아무 일도 없듯이 돌아온다. 이 세상은 지겹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생활을 한다. 요리를 하고 책을 읽고 음악을 듣는다. 나는 멈춘 세상에서 유일하게 흐르는 강물이다. 홀로 고고하게 흐른다. 더 이상 카레는 만들지 않는다.

 

 

 

104일.

 

 

 

오랜만에 아침이 상쾌하다. 아침을 먹을까. 계란 하나, 치즈 한 장, 식빵 두 조각. 계란을 굽고 식빵을 데운다. 치즈를 얹은 빵을 한 입 크게 문다. 포크를 꺼내 계란을 쪼개 먹는다. 맛있다. 먹고 있는데도 입에 침이 고인다. 남은 식빵을 마저 꺼낸다. 목이 막혀 켁켁거리면서 수돗물을 들이킨다. 창문을 연다. 문을 열고 옥상에 선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내 몸에 햇살이 내리쬔다. 따뜻하다. 눈을 감고 고개를 든다. 바알갛게 눈꺼풀을 뚫고 들어온 햇빛에 눈이 부시다. 바람이 몸을 감싼다. 아 햇빛이 이렇게나 따뜻했구나. 비치체어를 꺼내와 털썩 눕는다.

 

 

 

비치체어가 배달 온 날 인희와 나는 서로 조립하겠다고 서둘렀다. 묘하게 경쟁이 붙어 깔깔거리며 조립을 시작했다. 그리 어렵지도 않아서 나는 보는 순간 구조를 파악하고 조립을 시작했다. 조립에는 아무런 조예가 없던 인희는 이건 어디 부품이야 라는 말만 연발했다. 나는 아주 뿌듯한 표정으로 거의 다 조립한 의자를 들고 인희를 내려봤다.

 

 

 

어쭈 지금 의자 좀 빨리 만든다고 재냐.

 

죽었어.

 

내가 먼저 만들거야.

 

 

 

인희는 파이프들을 몇 개나 손에 들고 여기저기 맞춰보고 있었다. 하지만 의자 틀을 다 맞추면 커버를 씌우지 않았고 커버를 제대로 씌우면 빠진 부품이 나왔다. 나는 내가 만든 의자에 드러누워 마치 재롱부리는 손녀를 보듯이 웃으며 보고 있었다.

 

 

 

야 웃어?

 

너 지금 비웃지?

 

죽었어, 이리와 너 요즘 자꾸 까분다.

 

 

 

인희는 짜맞추던 의자를 집어 던지고는 내 위에 올라타 나를 간질였다. 나는 간지럼을 병적으로 타서 누가 손만 대도 자지러졌다.

 

 

 

야 자꾸 까불래.

 

선생님한테 혼난다.

 

이리와, 어딜 도망가!

 

 

 

인희는 깔깔거리며 옥상을 뛰어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501호 부부와 502호 할머니는 참 착한 분들이었다. 엄청나게 시끄러웠을 텐데. 어느새 지친 내가 또 비치체어에 털썩 눕자 인희가 내 위에 올라타 장난스럽게 내려보고 있었다.

 

 

 

야 비켜봐, 나 좀 눕자.

 

넌 가서 의자나 마저 맞춰.

 

빨리! 나 놀린 벌이야.

 

 

 

난 킥킥거리면서 남은 의자를 조립했다. 둘이 나란히 의자를 놓고 누워 술을 마셨다. 나는 숙성시켜서 맛이 부드럽다는 소주를 마셨고 인희는 분홍빛이 도는 샴페인을 마셨다. 바람이 솔솔 부는 가을 저녁이었다.

 

사귀기 시작한지 오 년 기념 파티. 중간에 몇 년간 헤어져 있었지만 모르는 척 했다. 냉장고에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넣어두고 같이 산 의자를 조립했다. 따로 선물을 주고 받지 말고 그냥 서로 비치체어를 사주기로 했다. 그래서 각자 고른 비치체어를 샀고 그 덕에 두 비치체어는 크기도 모양도 조립법도 달랐다.

 

 

 

아 시원하고 좋다.

 

야 근데 왜 너 의자가 더 좋아 보이냐.

 

그거 넓고 되게 편해 보인다.

 

나랑 바꾸자.

 

나랑 바꿔 응?

 

나랑 바꾸자고.

 

 

 

인희가 어느새 내 의자에 건너와 같이 누워 콧소리를 냈다. 그렇게 아웅다웅 하다가 문들 둘 다 잠이 들었다. 인희는 잠꼬대가 심했다.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는데 말이 많았다. 인희가 잠꼬대를 하면 나는 그 말에 일일이 다 대답을 해줬다. 가끔은 인희가 알아듣기도 했다. 둘 이야기를 꿈꾸기도 했고 학교에서 수업하는 꿈을 꾸는 날도 있었다.

 

 

 

수업 시작할게요. 다들 안녕. 어제는 잘 잤어요? 오늘은 선생님이랑……

 

 

 

나는 잠결에도 킥킥거리면서 잠꼬대를 들었다. 잠꼬대가 심한 날은 인희는 혼자서 몇 분이나 떠들기도 했다. 가끔은 잠꼬대를 하다가 깨어나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꿈을 꿨다고 안아달라고 했다. 그날도 인희는 잠꼬대를 했다.

 

 

 

같이 있어줘서 고마워……

 

 

 

인희는 내가 할 말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떻게 찾았는지 더듬더듬 내 손을 찾아 잡았다. 나는 다른 빈손으로 인희 뺨을 쓰다듬다 뺨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때니 인희가 눈을 뜨고 있었다. 나는 괜히 잠을 깨워 무안한 마음에 몸을 때고 일어났다. 그러자 인희는 팔을 뻗어 내 목을 감았다. 그렇게 연애를 시작한지 오 년 만에 처음 입을 맞췄다. 나중에 인희는 그때가 첫키스였다고 했다.

 

인희와 나는 사랑한다고 말은 해도 사실 그냥 여자 사람 친구처럼 지냈다. 주변 시선을 극도로 무서워하던 인희는 스킨십이나 애정표현을 거의 하지 않았다. 물론 집에서는 가끔 끌어안고 누워있기도 했다. 처음에는 불만이 많았다. 나는 땀이 나도록 인희 손을 잡고 싶었고 가슴이 아프도록 끌어안고 싶었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키스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희는 스킨십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고 심지어 부끄러워했다.

 

 

 

아 몰라 부끄러워 저리가.

 

야 이 변태야, 넌 맨날 더듬을 생각만 하냐.

 

 

 

변태라니. 건강하다고 해주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내가 엄청 밝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난 그저 체온을 느끼고 싶었을 뿐.

 

대학시절 연애를 시작한지 세 달쯤 되던 날 인희 집에서 둘은 대취했고 나는 두 번째로 인희 집에서 자고 갔다. 자다가 문득 깨어나니 옷을 다 입고 있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옆에 인희가 있는지 순간 잊고 옷을 훌렁 벗어 던졌다. 순식간에 알몸이 되어 이불을 덮고 누웠다. 옆에서 콧김이 느껴졌다. 그제서야 난 인희 옆에 누워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큰일났다. 손도 잘 못 잡게 하는데 지금 이 꼴을 보면 분명이 엉덩이를 걷어차 쫓아내지 않을까. 하지만 술기운은 사람을 낙천적으로 만드는지 아무 생각 없이 인희를 꼭 끌어안았다. 인희는 꼬물꼬물 내 품으로 파고 들었다. 어느새 인희도 날 안고 있었다. 나는 행복하게 잠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정말 엉덩이를 걷어 채여 쫓겨날 뻔했다. 인희는 엄청나게 당황해서는 화를 내며 울었다.

 

 

 

안아주는 건 좋은데.

 

옷은 왜 벗었어?

 

 

 

나는 주저 주저 내 잠버릇을 설명했다. 인희는 뭐 이런 어처구니 없는 멍청이가 다 있나 하는 표정으로 날 빤히 바라봤다.

 

한숨을 푹 쉬더니 내 손을 잡고 말했다.

 

 

 

나도 너 좋아.

 

나 안아주면 좋고.

 

손 잡아줘도 좋아.

 

그러니까 이제 가끔은 안아주자.

 

손도 잡아주고.

 

응? 약속.

 

내가 진짜 미안해.

 

너무 내 생각만 하느라 너 마음은 생각을 못했어.

 

근데 그래도 옷은 입었으면 좋겠는데……

 

 

 

인희는 나를 만나기 전에 연애라고는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눈이 고장 났던 모양이다 … (계속 읽으시려면 로그인해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