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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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일.

 

 

 

오늘은 점심으로 먹고 싶은 음식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다. 무작정 마트에 간다. 마트를 돌아다니며 수없이 많은 인스턴트 식품들을 구경한다. 요즘에는 삼계탕도 완성품으로 나오는구나. 이런 저런 포장을 비교하다가 고기 완자가 눈에 띈다. 나는 완자라는 말이 좋다. 어디 멀리서 놀러 온 친구 이름 같이 친근하다. 물론 그 친구를 불에 지져서 아작아작 씹어 먹어야 한다는 불편한 관계가 있긴 하지만. 고기보다 야채를 좋아하던 인희에게 고기를 먹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기도 하고.

 

 

 

비위가 약한 인희는 고기에서 냄새가 나면 입에도 못 댔다. 삼계탕도 잘 못 먹었다. 생선 비린내도 못 참았다. 이래저래 손이 많이 가는 아이. 다르게 말하면 인희랑 함께하는 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고기는 숨어서 먹어야 했다. 그래도 상관 없었다. 인희 곁에 있을 수 있다면 그 어떤 일이라도 참을 수 있었다.

 

가끔은 인희가 고기를 먹자고 했다. 분명히 나 때문에 꺼낸 말이겠지. 그럴 때마다 달달한 불고기나 돈까스처럼 향이 진한 소스를 뿌려먹는 음식을 먹으러 갔다. 집에서 간단하게 먹고 싶으면 햄버거를 만들기도 했다. 햄버거는 야채를 많이 넣으면 냄새가 별로 안 나니까.

 

어린 시절 동네에 손자 뒤를 밥그릇을 들고 따라다니며 밥을 먹이는 할머니가 있었다. 엄마는 식사 시간에 밥을 안 먹으면 따로 간식도 밥도 안주는 교육을 했다. 나는 대식가라 언제나 배가 고팠지만 식사시간에만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을 놓치면 굶어야 했다. 나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손자를 따라다니는 할머니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인희를 만났다. 어느새 나는 그 할머니처럼 밥그릇을 들고 인희를 따라다니고 있었다.

 

 

 

제품 뒷면에 성분표시를 유심히 본다. 고기가 들어야 완자다. 소시지도 꺼낸다. 적당한 만두를 고른다. 작은 물만두가 먹고 싶다. 토막 내서 파는 닭을 찾는다. 감자, 당근을 고른다. 대파와 양파를 싣고 고추장을 찾는다. 오늘은 오래된 양념보다 새 양념을 쓰고 싶다. 밥은 귀찮다. 오늘은 고기만 먹어야지. 맛술을 찾고 올리고당을 찾고 뿌려먹을 깨를 찾고 당면을 찾는다. 매일 오는 마트지만 올 때마다 길을 잃는다. 예전에는 재깍재깍 잘 찾았었는데 어쩐지 요즘에는 항상 멍하니 헤맨다. 주류코너를 쿨하게 지나친다. 이제 나는 멍하면서 맑은 정신을 안고 산다.

 

집에 돌아와 편안한 옷으로 갈아입고 재료부터 손질한다. 양파껍질을 까고 네 토막으로 자른다. 감자를 씻어 껍질을 깎아내고 큼직하게 썰어둔다. 당근도 씻어 겉을 깎아내고 반 정도만 감자처럼 썰어둔다. 대파를 씻어 가운데 손가락 길이로 뿌리 쪽 흰 토막 두 개 줄기 쪽 푸른 토막 두 개. 닭고기를 씻어 대충 핏기를 뺀다. 맛술을 뿌려 잠시 묵히면 잡내가 날아간다. 고추장에 올리고당에 간장에 간 마늘을 잘 섞어 양념을 만든다. 잡내가 날아간 닭고기를 양념에 미리 재어둔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완자를 굽는다. 솥에 물을 올리고 찜기를 올려 만두와 소시지를 쪄냈다. 물이 끓는 동안 맛나게 완자를 먹는다. 고기냄새가 향긋하다. 찌고 남은 따뜻한 물에 당면을 불린다. 잘 익은 만두와 소시지가 뜨겁다. 만두에서 야채 냄새가 올라온다. 소시지가 뽀독뽀독 씹힌다. 웍에 감자와 당근을 볶는다. 겉이 익으면 물을 부어 끓기 시작하면 양념이 잘 배어든 고기를 넣는다. 파와 양파를 넣는다. 소시지를 하나 우물거리며 가끔 저어주면서 물을 졸인다. 감자가 잘 익었나 젓가락으로 찔러본다. 감자가 다 익었으면 고기도 다 익었겠지. 깨를 뿌린다. 좋아 오늘은 닭고기 먹는 날이다.

 

 

 

그날도 닭고기를 먹었다. 날도 추워서 오랜만에 매콤한 음식이 먹고 싶어 마트에서 고르고 있었다. 닭고기를 들여다 보는데 누가 옆에 와서 섰다. 공간을 내주려 한 발 물러섰다. 한 발 물러선 날 빤히 바라보며 서있었다. 뭐 하는 짓인가 싶어 고개를 돌려 마주봤다. 그리고 나는 망부석처럼 굳어버렸다.

 

내가 했던 짓들이 있기에 말을 걸 수가 없었다. 마트에 쥐구멍이 있으면 다시는 그 마트에 안 가겠지만 필사적으로 쥐구멍을 찾았다.

 

 

 

오랜만이네.

 

근처 살아?

 

나 얼마 전에 이쪽으로 전근 왔거든.

 

 

 

4년만에 인희와 마주쳤다.

 

나는 혼이 빠져나갔다. 집에 돌아와 재료를 손질하다 손가락 끝을 잘라먹기도 했다. 양념을 잘못해서 닭고기는 맵다 못해 쓴맛이 났다. 그래도 그 매운 닭고기를 꾸역꾸역 먹고는 사온 소주를 순식간에 비웠다.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킬 수가 없었다. 손이 떨리고 입술이 쓰렸다. 그리고 인희에게 전화가 왔다.

 

혼이 빠져나간 나는 말을 더듬었다. 인희는 내 번호를 기억하고 있었다.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방을 서성이며 인희 이야기를 들었다. 몇 마디를 정신 없이 주고받고는 주말에 잠깐 만나기로 했다. 짜릿한 술기운에 묘한 불안감에 씁쓸하고 미안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왜 만나자는 걸까. 나갔다가는 시원하게 따귀라도 얻어 맞을까.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머리라도 깔끔하게 다듬을까. 전근을 왔다니 임용고시는 잘 봤나 보네.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고개도 못 들겠는데 어쩌지. 못 나간다고 할까. 아니 못 나간다고 하면 믿어주기나 할까. 속이 더 울렁거렸다. 화장실에서 뱃속에 든 것들을 다 게워냈다. 불을 토하는 기분이었다. 드라마를 보면서 세상에 백화점이 하나 밖에 없나 원수도 인연도 뭐 죄다 백화점에서 만나네 하고 어이없어 했는데 그 드라마가 내 이야기가 될 줄은 몰랐다. 주말까지는 고작 3일 남았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배가 불러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다. 파란 하늘을 보며 비치체어에 드러눕는다. 얼굴에 미소가 퍼진다. 부끄러운 기억을 떠올리면 왜 웃음이 나오지. 그때만 생각하면 언제나 부끄럽다.

 

이어폰을 귀에 꼽고 숨을 길게 내쉬고 눈을 감는다. 살아온 날들이 흘러 회색 빛 가득 눈물이 드리운 내 맘이 부딪혀 깨어지는 소리를 들었네. 그래 나 아무것도 버리지 못했던가.[1] 오늘 기분은 아주 쾌청한데 귀에 울리는 목소리는 아무것도 버리지 못한 내 미련한 처사를 말하고 있다.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나야 다 버릴 수 있을까.

 

 

 

생각을 정리할 수 없었다. 불안한 내 마음을 무시하고 주말이 왔다. 나는 무슨 옷을 입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가 최대한 깔끔하게 입기로 했다. 단순한 스키니진에 단순한 티셔츠를 껴입고 두꺼운 흰색 셔츠를 덧입은 위에 검정색 블레이저를 걸쳤다. 날이 추워서 장갑도 끼고 두꺼운 운동화를 꺼내 신고 길을 나섰다. 어디를 봐도 여자 같지 않았다.

 

인희는 약속장소에 없었다. 나는 언제나 약속시간보다 십분 일찍 도착했다. 그날도 우두커니 서서 인희를 기다렸다. 익숙한 손바닥이 등짝을 강경하게 쓰다듬었다. 인희가 헤실 헤실 웃으며 서있었다.

 

 

 

잘 지냈어?

 

더 말랐네.

 

오늘 드레스 코드는 뭐야?

 

에드워드 시저핸즈?[2]

 

 

 

난 그저 멍청하게 서있었다. 아무 말도 못했다.

 

 

 

밥 먹었어?

 

안 먹었으면 먹으러 가자.

 

나 이 근처 하나도 모르는데 맛있는 집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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