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령열차

  • 장르: 호러, 판타지
  • 평점×24 | 분량: 218매 | 성향:
  • 소개: 멈추지 않는 인간의 탐구와, 끝없는 미지, 정복욕, 그리고 죽음. * 제1회 어반 판타지 문학 공모전 당선작 더보기

유령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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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차원’

얼마나 매혹적인 주제인가! 누구나 한 번쯤 이 주제에 심취해 본 적 있으리라. ‘이다음 차원’을 발견해내려는 인간의 뿌리 깊은 공상. 생각보다 낯익은, 이 허기는 모두가 날 때부터 타고나는 것 같다. 과학자를 꿈꾼 적 없는 소년조차 같은 망상에 푹 빠져든다고 하니, 탐구와 공상이야말로 우리 인간의 날것 같은 본질이 아닐까? 나는 그렇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니 서두에서 제안하건대, 우리 그 황홀했던 시절의 기분을 한번 되살려 보자. 지금부터 내가 들려주고자 하는 이야기가 바로 그런 이야기니까. 여러분은 차원을 더하는 아주 간단한 공식을 알고 있을 것이다.

1차원인 ‘선’이 2차원에 도달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어느 한 점에서 다른 방향으로 새로운 선을 뻗는 것뿐이다. 그러면 그것이 곧 ‘x축’과 ‘y축’이 되어 ‘면’을 구성한다. 3차원도 같은 원리다. 면 한가운데로 다시 한번 직선을 꿰뚫게 하자. 사람들이 통상 ‘z축’이라고 일컫는 것, 바로 제삼의 새로운 축을 말이다. 그러면 그로부터 ‘공간’이 탄생한다. 그때부터는 종전에 볼 수 없었던 선들의 경계 안쪽까지도 우리가 손쉽게 인지할 수 있게 된다.

우주의 법칙이란 이토록 간단하다. 이런 단순한 함정에 꾀인 나머지, 사람들은 그다음 네 번째 차원을 찾아내고자 하는 유혹을 좀처럼 떨쳐내지 못한다. ‘우리를 가둔 공간을 가로지르는 이다음 세계의 축.’ 지금도 일련의 무리가 눈에 불을 켜고 쫓는 그 제4의 축을 나는 ‘오메가 축’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아마 자신이 갈구하는 진실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을 것이다.

(중략)

목적지의 이름은 ‘클락스빌’이라고 해 두겠다. 어쨌든 지금은 잊힌 장소이고, 굳이 사실을 곧이곧대로 밝혀서 과거의 망령을 들쑤실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클락스빌은 산자락으로 가로막힌 땅에 세워진 도시였다. 산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긴 터널이 도시로 통하는 유일한 입구였다. 터널은 차량을 위한 작은 것과 기차가 다니는 큰 것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통행자 대부분이 기차를 이용한 탓에 작은 터널은 거의 버려져 있었다. 우리는 초라한 헤드라이트 불빛 두 개만으로 암흑을 조심스레 헤쳤다. 벽 건너편에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기차 소리가 덜커덩덜커덩 울려 퍼졌다. 아무 말이 없던 택시 기사는 그때 딱 한 번, 돌아오는 길에는 기차를 잡아야 할 거라고 넌지시 알려 주었다.

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눈앞에 비친 클락스빌의 전경에 나는 그만 숨이 턱 막혀 버렸다. 유황불이 타오르는 듯했다. 짙은 황색 불꽃으로 가득 찬 희뿌연 안개가 산등성이 밑자락에 내려앉은 광경이었다. 그 위로 그을린 연기 한 자락이 피어올랐다. 새까만 밤하늘과 클락스빌을 흡사 탯줄처럼 이어주고 있었다. 택시가 비탈길을 휘돌아 내려가면서, 흑요석으로 마감한 석재 건물의 단면들이 희미하게나마 산의 그림자에서 벗어났다. 열기에 스멀거리는 형체가 드러났고, 그 위로 잿가루가 휘날리는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탁한 구릿빛으로 번쩍이는 도시는 마치 밤의 마수에 달구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 같은 감상의 탓일까, 클락스빌은 전체적으로 측은한 애수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곳은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의 야심한 밤이 무색했다. 높은 곳에 달린 창문마다 불이 환히 밝혀져 있었다. 자신이 가둔 빛으로 밝혀진 창살들은 현대적이면서도 거꾸로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그리고 풀무 소리가 차가운 밤의 정적을 흩뜨리고 있었다. 메아리가 되어 가로변에 부딪는 소리는 거리에 맺힌 외로움을 더 깊게 정제했다.

우리는 곧 입구에 다다랐다. 해묵은 광산 도시의 위압적이면서도 고혹적인 공기가 나를 매료시켰다. 대장장이의 신을 찬미하는 신전의 강철 기둥처럼 건물들이 우뚝 솟아 있었다. 그 틈바구니서 고개를 들어 보니, 도시 전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뿌연 숨결이 보였다. 이것은 아까 보았던 탯줄의 강을 이루었다. 강은 별 한 점 보이지 않는 까마득한 하늘 저편으로 찢어져 가냘픈 비명처럼 흘러갔다.

(중략)

우리는 겨울 동안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서의 저택은 생각했던 대로 호화롭기 짝이 없었다. 응접실은 궁전의 홀처럼 넓었고 가구는 모조리 북쪽에서 수입한 것이었다. 언제나 육즙 가득한 고기 요리가 저녁 찬거리로 나왔으며, 찬장마다 해묵은 술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는 내 편의를 충분히 봐 주었다. 큰방을 내준 것은 물론이요 내가 구독하는 신문을 배달받기로 계약을 맺었다. 또 시간을 보내는 데 쓰라고 돈까지 쥐여 주었다. 내가 할 일이라곤 오직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밖에 없었다. 아서는 항상 내키는 대로 떠들어 댔다. 실험에 관해서, 사업에 관해서. 내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설명하고 동조를 구했다. 그 아이디어에 흥미를 보이든 보이지 않든, 난데없이 벌컥 화내고 자리를 떠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그리고 그랬다면 반드시 다음 날 술과 함께 사과했다. 사과와 더불어 실험의 결과를 한탄하던 말이 괴상한 우화와 이론으로 변질되는 일은 항다반사였다.

그의 표현에는 알쏭달쏭한 대목이 너무 많았다. 그것은 광기로 치부하기에는 다분히 작위적인 면모가 있었다. 내게 매몰찰 만치 감정을 쏟아 부으면서도, 마음속 깊은 곳에 감춰진 불순한 구석까지는 드러내지 않도록 늘 조심하는 것 같았다. 나도 처음에는 그의 이런저런 이야기에 관심을 나타냈다. 그러나 종내 그것들에 아무런 알맹이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주어진 역할만을 묵묵히 수행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아서는 첫 번째 설명 이후 기실 내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있었다. 세부적 계획과 진척이 몹시 궁금하였지만,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졸라 본들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엔 간밤의 꿈에서 얻은 힌트나 철학 논법으로 돌아갈 뿐이었다.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내 물음 역시도, 아서의 비위를 맞춰주기 위함에 지나지 않게 됐다.

그러나 한 가지 기록해 두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아서의 저택에 도착하고 한 달 정도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나는 그의 계획이 좀처럼 진척되지 않음에 조바심하고 있었다. 여전히 구체적인 내용은 알지 못했으나, 그는 더 이상 ‘네 번째 차원’이라든가 ‘환상의 축’과 같은 단어를 입에 담지 않았다. 이야깃감이란 물론 날마다 변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안하더라도 그가 어떤 기술적 문제에 부딪힌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가 내뱉는 단어들에서는 지리멸렬한 토의에서나 느낄 수 있는 답답한 말맛이 느껴졌던 것이다. 아서는 그 순간만을 모면하기 위해 지엽적인 내용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러기를 몇 주일, 나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는 기분에 사로잡혔고, 마침내 기회를 엿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서가 잔을 도로 채우는 짧은 순간이었다.

아서는 내가 말하는 제안을 제안으로서 취급하지도 않았는데, 그의 기준에서 내 사고는 범인의 그것과 마찬가지였고 그런 졸렬한 것에 신경 쓸 겨를은 없었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잠자코 내 말을 들어주기는 했지만 말이다. 나 역시 이것이 그의 마음에 차지 않으리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자극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이런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어디선가 몇 마디 주워들은 것이 있어. 자네가 말하는 그 ‘환상의 축’이 바로 ‘시간’일 거라고 믿는 사람이 많더군.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한다면 시간의 흐름을 공간 개념과 연관 지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듣자 하니 중력이 큰 행성일수록 시간의 흐름이 느리다더군. 중력에 빛이 붙들리는 정도가 더 크기 때문에, 그들이 보는 세상은 한층 더 굼뜨고 둔하다는 설명이었네. 그러니까 거대한 세계일수록 정체된 것처럼 보이고, 작은 존재에 의한 영향을 덜 받는다는 말이야. 그 격차가 커지면 커질수록 시간의 분화가 공간끼리의 격리로 전이되면서, 결국 같은 공간을 살아도 같은 공간을 살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지.”

나는 나름대로 설득력 있다고 생각한 가설을 길게 주절거렸다. 하지만 아서는 이를테면 천사의 마법을 빌려서 씨앗이 싹트는 과정을 설명하려는 어린이를 대하는 태도로, 빙그레 미소 지을 뿐이었다. 잠시 뒤 그가 안심하라는 듯 나지막이 대답해 주었다.

“그렇지, 시간이라. 자네 말이 완전한 정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분명 중요한 실마리를 던져주고 있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발견해야 할 답을 찾게 도와줄 질문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단 말일세. 우리가 찾고 있는 것이 ‘시간’의 축이라면,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변부터 알아보아야 할 걸세. ‘시간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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